'학살자' 전두환, 수천 억 꿀꺽한 채 천수 누리나

'추징 시효 놀이'에 끌려다니는 대한민국…국회, '전두환법' 통과시켜야

전두환은 2003년 6월 23일 판사에게 29만1000원이 담긴 통장을 제출했다. 자신의 전 재산이라는 주장과 함께.

판사 : 어음 14만 원, 채권 15만 원, 그 밖에 1000원…. 그러면 30만 원(29만1000원)이 예금, 채권 다네요?
전두환 : 네.
(…)
판사 : 지금까지 무슨 이유로 돈을 안 낸 것입니까?
전두환 : (수천 억 원대의 받은 돈은) 정치자금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정치자금을 인정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당한 것입니다. 정치자금에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하는 바람에.
(…)
판사 : 채무자는 무슨 돈으로 골프나 외유를 다녔습니까?
전두환 : 전직 대통령에게는 골프협회에서 그린피를 무료로 해주고 있습니다. 내 나이가 이제 72세인데 그동안 인연 있는 사람과 생활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측근과 사업을 하는 자식놈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
판사 : 측근이나 자녀들에게 (생활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들은 추징금 낼 돈은 안 줍니까?
전두환 : 그들도 생활을 해야지요.

지난 1997년 4월 대법원은 "보안사령관으로서 계엄사령부 정식 지휘 계통을 배후 조종해 광주 유혈 진압을 지시했고 계엄군과 시위대가 격앙돼 있는 상황에서 자위권 발동을 배후 지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발포 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며 "반란 수괴" 전두환에게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추징금만 2205억 원이었다. 이 거액의 뇌물 출처는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일부는 고인이 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재벌 총수들이었다. 이 돈을 받고도 "나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1996년 열린 첫 공판 기록에 나오는 전두환의 '생각'이다.

그러나 형 확정 8개월 만인 1997년 12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학살자' 전두환을 사면했다. 논란은 거세게 일었다. 추징금 부분도 논란 대상이 됐는데, 추징금은 사면 대상이 아닌 것으로 당시에 결론이 났다. 그러나 전두환은 지금껏 추징금까지 사면을 받은 것처럼 행동해왔다. 오히려 추징금을 징수하는 사법부에 배짱을 부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전두환 추징금 문제는 '뻔뻔한 전두환, 무력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사안이 됐다.

국회는 6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있다. '5.18 왜곡' 파동 때문인지 전두환에 대한 여론도 더 나빠졌다. 최근 제출된 '전두환 추징금 징수법'만 4건이다. 여야 원내수석부대표는 28일 일정 조율을 마쳤다. 그런데 한때 '전두환의 사위'였던 새누리당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의 이력이 눈에 거슬린다. 국회는 '전두환법'을 처리할 수 있을까.

▲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사형을 선고받았음에도 '국가 원로'로 행세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도 했다. ⓒMBC 화면 캡처

전두환의 '추징금 놀이', 그 기나긴 역사

1997년 이후 전두환은 추징금을 자진 납부한 적이 거의 없다. 재산이 없다며 버티다가 추징 시효가 다가오면 찔끔찔끔 납부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전두환 '추징금 놀이'의 역사는 꽤 길다.

1997년 추징 선고 후 검찰은 전두환으로부터 무기명 채권 126장 등 188억여 원, 현금과 예금까지 포함해 총 313억 원을 강제 집행했다. 전광석화처럼 보였지만 이후 실적은 지지부진했다. 보통 추징 시효는 3년이다. 3년을 넘기면 시효가 끝난 것으로 보지만, 3년을 넘기기 전 1원이라도 추징하면 자동으로 3년이 추가 연장된다.

조용하던 검찰은 지난 2000년, 전두환의 1987년식 벤츠 승용차를 강제 집행한다. 추징 시효 만료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벤츠는 평가액이 500만 원 정도였는데, 당시 경매에서 1억 원가량에 팔렸다. 전두환의 '고물 벤츠'를 낙찰받은 사람은 5공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인사였는데, 그는 이 차를 전두환에게 돌려줬다. 이때 검찰은 전두환의 콘도 회원권 등 1억7000여만 원도 강제 집행한다.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 별채도 경매에 나왔는데, 16억4000만 원을 추가로 징수할 수 있었다. 이 별채를 낙찰받은 사람도 전두환에게 다시 돌려줬다. 코미디 같은 일들이었다.

이 때문에 추징 시효는 2003년으로 넘어갔다. 2003년 즈음이 되자 잠잠하던 전두환도 바빠졌다. 전두환은 추징 시효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미리 '전 재산'이라며 29만1000원이 입금된 통장을 법원에 자진 납부했다. '국민 우롱'이었다.

'29만 원 파동'으로 '괘씸죄'에 걸렸을까? 2004년에는 '전두환 비자금 사건'이 터진다. 검찰 추적 결과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을 비롯해 부인 이순자, 이순자의 동생(전두환 처남) 이창석 등이 가지고 있던 수백억 원대의 '괴자금'이 발견됐다. 전재용이 구속되는데, 당시 이순자는 검찰에 출석해 "알토란 같은 내 돈"이라며 눈물 속에 130억 원을 내놓는다. 이를 포함해 검찰은 200억 원을 추가로 징수했다.

2004년에는 전두환이 1975년에 사뒀던 서초동 51평짜리 땅이 압류됐다. 이 땅은 2006년 경매에 나왔다. 검찰은 1억1900여만 원을 새로 추징하게 된다. 이후 추징 시효는 2009년으로 연장되지만, 추징 시효 만료를 앞둔 2008년 은행이 채권 추심을 통해 전두환의 통장에서 4만7000원을 징수한다. 추징 시효는 다시 2011년 6월로 연장됐다. 장난 같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2010년 10월 11일 전두환은 갑자기 300만 원을 추가로 냈다. 대구 지역 강연을 통해 받은 돈이라고 했다. 또 추징 시효는 2013년 10월 11일로 연장됐다. 그 추징 시효가 이제 5개월여 남았다. 전두환은 교활했다. (관련 기사 : '학살자' 전두환, 이번엔 1672억 꿀꺽?)


그가 내야 할 미납 추징금은 현재 1672억 원. 지난 16년간 지겹도록 봐 왔던 '추징 시효 놀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6년 5월 19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 주간에 그는 경기 가평 이천리 프리스틴밸리 골프장에 나타나 유유히 골프를 즐기고 갔다. 5월 19일은 1980년 계엄군이 민간인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긴 날이다. 이 골프를 즐기기 불과 22일 전, 전두환의 서초동 땅은 경매를 통해 추징되고 있었다.

29만1000원의 통장을 전 재산이라며 제출했던 그는 육사에 발전기금 1000만 원을 쾌척했다. 고급 호텔에서 열린 손녀의 억대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보훈처 산하 88골프장에서 골프도 친다. 여전히 잘 먹고, 또 잘살고 있다.

추징 시효가 만료돼 추징이 불가능해지면 감당할 수 없는 '욕'을 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두환이 모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 재산 29만 원'이라는 희대의 해프닝 역시 전두환의 꼼수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추징 시효를 연장시켜가며 "사회적으로 욕을 덜 먹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으로 가면 그는 평생 추징 시효만 연장하며 살 가능성이 높다.

추징금은 벌금과 달라 시효가 끝나 추징을 못하게 되더라도 당사자가 노역장에 끌려갈 일이 없다. 전두환이 눈을 감는 날, 추징금은 사실상 소멸된다. 상속인이 전두환의 유산 상속을 거부하면 추가 징수하지 않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추징 시효 놀이'의 이 고리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수천 억 재산 보유 추정되는 '전두환 일가'

'추징 시효 놀이'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전두환 일가의 막대한 재산이다. "아버지는 29만1000원밖에 없는데 자식들은 떵떵거리며 사니 불효자가 따로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혀 우습지 않은 상황이다.

▲ 청와대에서 찍은 전두환 가족 사진 ⓒ연합뉴스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잘 알려져 있다. 연 매출 440억 원가량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는 전재국은 '전두환의 아들'보다는 한국 출판 산업의 큰손으로 통한다. 시공사는 전재국이 지분 50.5%를 가지고 있고, 그의 부인 정도경, 동생 전효선, 전재용, 전재만이 각각 5.32%씩 가지고 있는 가족 기업이다. 시공사는 만화, 유통, 교육 등 출판 관련 회사 십여 곳의 지분을 가지고 있거나 소유하고 있다. 전두환 일가는 이들 회사 곳곳에 감사, 이사 등으로 포진해 월급을 받고, 또 각종 부동산 매물들을 굴리며 잘살고 있다.

전재국은 시공사 사옥 등 서초동에 건물을 두 채 가지고 있고,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건물과 땅을 가지고 있다. 파주 출판문화단지에도 건물이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의 부동산 자산은 2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재국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대지 1만7000평의 '허브 빌리지'도 소유하고 있는데, 이곳 역시 땅과 건물을 합쳐 평가액이 200억 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차남인 전재용은 부동산 투자 회사 비엘에셋을 운용하는데, 이 회사의 부동산 자산만 330억 원이 넘는다.

전두환 일가의 부동산 거래 뉴스 등은 잊을 만하면 나오는 단골 이슈다. 알려진 것 외에도 전국 각지에 숨겨둔 재산이 상당하다는 추정이다. 이 같은 전두환 일가친척들의 재산을 합치면 2000억 원이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런 재산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자식놈"들의 돈을 받아 근근이 살아간다는 전두환과 이순자는 지난해 4월 총선 당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민주 시민'으로 한 표를 행사한 후 기자들에게서 추징금 관련 질문을 받았다. 이순자는 "정치자금을 뇌물죄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돈을 우리가 낼 수 없어요. ('자식들이 대신 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대한민국에서는 각자가 하는 것이고 연좌제도 아닌데 그건 아니죠"라고 말했다. 자식들의 재산은 자식들의 것이라는 말이다. 전 씨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을 감안할 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국민이 얼마나 될까.

전두환은 "할멈"이라고 부르며, 기자들의 질문에 응대하는 이순자를 말렸다. 자식 재산과 '연좌제'를 걱정하는 이순자의 논리는 2003년 '29만 원 공판'에서 전두환이 말한 것과 같은 논리다. 10년이 지나도 이들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전두환 집 압수수색? '전두환법'부터 통과시켜야

그렇다면 전두환 자녀들로부터 추징금을 환수하는 것이 가능할까. '추징금 시효 놀이' 방지는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민주당 최재성 의원이 27일 발의한 공무원범죄몰수특례법 개정안(일명 전두환법)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법안은 범죄자가 추징금을 못 내 그 시효가 지날 경우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도록 근거를 만들었고, 전직 대통령, 국무위원 등 고위직을 지낸 인사의 경우 추징 대상자 외에 가족 등에게서도 불법으로 축적한 재산의 추징이 가능하도록 하는 길을 터놓았다.

최 의원은 CBS 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해 "지금 소유주가 전두환 씨의 아들이나 친인척이라 하더라도 전두환 씨가 이것을 불법적으로 조성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편법 취득을 했다면 그 전두환 씨 아들이나 친인척에게도 추징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징 시효가 다가오기 전 검찰의 강제 조사를 피하기 위해 소액을 납부해 추징 기간을 연장시키는 이른바 '추징 시효 놀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도 있다. 추징이 확정되고 3년이 경과하면 검사의 청구에 따라 무조건 강제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최 의원이 낸 법안 외에도 세 건의 '전두환법'이 발의돼 있다. 민주당 유기홍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전·현직 대통령 등이 취득한 불법 재산을 친인척에게서 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열어놓은 법안이다. 또 지난해 민주당 김동철 의원이 발의한 '특정 고위 공직자에 대한 추징 특례법 개정안', 진보정의당 김제남 의원이 발의한 '부패 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안'도 비슷한 내용인데, 올해 국회 법사위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상태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28일 대검찰청에서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전두환 등의 사례를 의식, "특별 수사를 한다는 비상한 각오로 계좌 추적, 자산 추적, 필요 시 압수수색 등 입체적, 다각적 방법을 총동원하라"며 "고액 벌과금 미납 집행과 관련해 가시적 성과를 내달라"고 주문했다. 마치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 압수수색도 불사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검찰 안에는 '전두환 전담팀'까지 꾸려져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채 총장의 이처럼 단호한 말들 역시 '시효 연장 놀이'의 연장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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