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페미니스트 가수로 산다는 것은..."

[인터뷰] 21년차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

최근 '이수역 폭행 사건' 이후 대중음악계에 '페미니즘' 논쟁이 일었다. 래퍼 산이가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논란의 불을 지폈다.

"여자와 남자가 현시점 동등치 않단 건 좀 이해 안돼. 우리 할머니가 그럼 모르겠는데 지금의 너가 뭘 그리 불공평하게 자랐는데 (중략) 그렇게 권리를 원하면 왜 군댄 안가냐. 왜 데이트 할 땐 돈은 왜 내가 내. 뭘 더 바래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 다 내줬는데. (중략) 나도 할말 많아 남자도 유교 사상 가부장제 엄연한 피해자야. 근데 내가 이걸 만들었어? 내가 그랬어? Sister why mad? Blame System, not men."

산이가 제목은 '페미니스트'이지만 여성혐오적 가사로 가득찬 노래를 발표하자, 이번에는 래퍼 제리케이와 슬릭이 각각 ‘NO YOU ARE NOT(노 유아 낫)’, ‘EQUALIST(이퀄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산이 ‘디스’ 곡을 내놨다.

"같이 타도하자 가부장제 뭘 망설여. 36.7% 임금 격차 토막 내. 그럼 님이 원하는 대로 언제든 돈 반반 내. CEO, 고위직, 정치인 자리 대신에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로 내는 생색."(래퍼 제리케이의 ‘NO YOU ARE NOT’ 가사 중)

"니가 바라는 거, 여자도 군대 가기 데이트 할 때 더치페이 하기, 여자만 앉을 수 있는 지하철 임산부석 없애기 여성전용 주차장 없애기, 결혼할 때 돈 반반 내기, 남성혐오 안 하기 역차별 안 하기, 워마드 폐지 메갈 폐지, 조금 다른 널 믿어주기. 내가 바라는 것, 죽이지 않기, 강간하지 않기, 폭행하지 않기, 죽이고 강간하고 폭행하면서 피해자 탓하지 않기, 시스템을 탓하라면서 시스템 밖으로 추방하지 않기." (래퍼 슬릭의 ‘EQUALIST’ 가사 중)

자칭 ‘페미니스트’ 산이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행사 취소’?


산이가 촉발시킨 ‘페미니스트’ 논쟁이 보여주는 것은 대중음악계 내에서도 이제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여성의 시각과 경험에 바탕한 노래를 만드는 여성 가수들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페미니스트 가수’를 표방하며 20년 넘게 활동해온 가수 지현을 26일 만나 이번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 ⓒ프레시안(전홍기혜)

"개인적으로는 산이가 행사가 취소되니까 한발 물러선 해명을 내놓은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그 전까지는 '6.9 센티미터'라는 제리케이 디스 곡이자 여성혐오적인 랩을 또 내놓는 등 전혀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제시 믹스'라고 여성들이 주 소비층인 의류 브랜드의 행사의 출연이 취소되자, 19일 '페미니스트 곡에 등장하는 화자는 본인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라는 입장을 밝혔어요."

지현은 또 산이와 랩배틀을 이어갈만큼 '페미니스트' 여성 뮤지션이 늘어난 것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제가 데뷔할 때만 해도 대다수의 여성 뮤지션들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기 바빴다면, 이제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뮤지션들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21년 전에 '페미니스트 가수'라고 나왔을 때는 페미니스트가 뭐냐는 반응이 가장 많았어요. '나 여자 너무 좋아하는데, 그럼 페미니스트냐'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많았죠. 물론 2018년에도 산이가 그런 가사를 쓴 것을 보면 여전히 안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인디신에서는 요조, 오지은 등 여성의 눈으로, 여성 입장에서 노래를 만드는 뮤지션들이 많이 늘었지만, 음반 산업을 주도하는 주류 쪽에서는 아직도 이런 뮤지션이나 노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혔다가 일부 남성 팬들의 반발을 사는 일이 발생하는 등 여전히 '페미니즘'은 일종의 '금기어'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그룹 출신 예은이 싱어송라이터인 핫펠트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주체적인 뮤지션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등 주류신에서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가수로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는 의미 있고, 반가운 일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싫은 일일 수 있습니다. 저는 평생 페미니스트로 살았고, 너무 힘들었던 순간에 나를 구해준 것이 페미니즘이고, 내 삶이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 페미니즘이니까 그 위치에서 노래하는 것이 너무 당연했습니다."

"가부장제와의 긴 싸움...치유가 필요하다"

지현은 1997년 여성 밴드 '마고'로 활동을 시작해 2002년 1집 앨범을 냈다. 이 앨범에는 여성의 자위를 당당하고 건강하게 표현한 '마스터베이션', 성추행하는 남성을 비난하는 노래인 '아저씨 싫어' 등 '센' 노래들이 담겼다. 그러나 지난해 15년 만에 내놓은 2집 앨범 '나의 정원으로'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20-30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여성주의 문화운동이 매우 활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가수'로 처음 데뷔했을 때 큰 어려움 없이 여성주의 문화 운동판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너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빨리 잘 나가게 된 것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사소한 갈등이 생기고 서로 상처를 주게 되고, 무대에 서는 것이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 됐었죠.

개인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사회적 환경이 확 달라지게 됐어요. 각종 지원금도 다 끊기고 여성 문화단체에 경찰서장이 찾아와서 마치 감시라도 하듯 둘러보고 가는 일이 벌어지는 등 그때부터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암흑기가 시작됐어요. 대학 내 여성주의 문화제도 없어지고, 각종 여성주의 행사가 사라지면서 제가 설 자리를 잃게 됐죠. 이런 상황이 개인적인 슬럼프와 겹치면서 음악활동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문화학-문화연구, 여성학)도 하고 문화 행사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로 저를 가져가면서 성장시켰어요.

그러다가 2009년께 성폭력상담소에서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몸의 욕망을 알아가는 '욕망찾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화상을 만드는 과정(자화상 꼴라지)이 있는데, 이 과정을 진행하다보니 내 스스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깨닫게 됐어요. 그런 상황에서 2011년 가수 조약골 씨가 트위터를 통해 (홍대 앞 강제 철거 반대 농성을 하던) 두리반에서 '칼국수 음악회'를 하는데 노래를 해달라고 해서 참여했습니다. 또 그 즈음에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송은지 씨에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음반 작업을 같이 해달라고 해서 참여하면서 다시 노래를 하게 됐지요."

지현은 2012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위한 헌정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에 '나와 소녀들과 할머니들에게'라는 노래로 참여했다. 또 2014년 동성결혼식을 다룬 정소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퍼스트 댄스>의 엔딩곡 '어디에나, 그대'를 쓰고, 불렀다. 그리고 지난해 1집과 달린 서정적인 노래들을 주로 담은 2집 <나의 정원으로>를 냈다.

"가부장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억압이기 때문에 가부장제와의 싸움은 정말 긴 싸움입니다. 우리가 20대였을 때도 뜨겁게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아서 여성운동을 접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다시 싸울 수 있도록 돌보고 치유를 돕는 병원, 쉼터, 은신처도 필요합니다. 이제는 제 역할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한동안 상처를 받고 개인적으로 힘들어서 무대에 서는 것을 그만 두었는데, 2집 앨범을 프로듀싱한 박혜리 씨 등 다른 여성 음악인들을 만나 다시 음악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없이는 페미니스트로 한국에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자기 치유를 계속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이전에 비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 지현의 두번째 앨범 <나의 정원으로>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여기 있다"

지현은 이 앨범으로 지난 10월 데뷔 21년 만에 '올해의 성평등문화상'(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았다. 이 상은 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최하고 <여성신문>이 주관하며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상이다. 그는 "초심을 잃지 말고, 용기 내서, 기운 내서, 지치지 말고, 앞으로 40년 더 활동하라는 응원으로 생각하겠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담은 노래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다시 음악활동을 활발히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10-20대 여성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 지에 대해 절감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 데이트 폭력, 불법 촬영, 보복성 영상 등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위험하고 잔인한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끔찍하게 생각됐습니다.

최근에 제가 사는 지역에서 길고양이들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같이 만난 20대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니까 깜짝 놀라더라구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면 주변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반려인과 고양이들과 함께 사는 성소수자인데, 10대, 20대 젊은 레즈비언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과연 40대 이상의 레즈비언은 있는가. 이처럼 단절감을 느끼면서 사는 다음 세대들에게 나의 존재, 지나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넘게 '페미니스트 가수'로 활동하면서 최전선의 투쟁을 독려하는 노래와 지치고 힘든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러온 그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 뮤지션들의 역정(歷程)이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을 남겨두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제가 갖고 있는 자료만이라도 디지털 아카이빙을 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도 하고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얘기해주는 활동도 활발히 하려고 합니다."

가수로서 3집에 대한 계획을 묻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요즘 디제잉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춤곡을 만들고 싶었는데 막상 곡을 쓰려고 하면 그게 잘 안 되어서요. 한국 사회는 정말 춤을 억압하는 문화죠. 춤이라고 하면 젊은 세대는 클럽에 가서, 나이든 세대는 고속버스 안에서, 혹은 콜라텍이나 카바레에서나 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춤은 특정한 장소에서,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자유롭게 춤 한번 출 수 없는 사회가 됐는데, 특히나 요즘엔 젊은 여성이 클럽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춤을 추면 영상에 찍혀서 '00녀'라고 SNS를 통해 회자가 될 수도 있겠죠. 얼마 전에 여성문화단체인 '줌마네'의 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워크숍을 갔는데, 마지막 뒤풀이 자리에서 여성들이 춤판을 벌이더라구요. 20대에서 50대 후반의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너무나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나는 춤을 추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2집이 <나의 정원으로>였으니까 3집의 가제를 생각해 본다면 <함께 춤을 추는 정원으로>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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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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