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 고함

[다른백년 칼럼] 희망은 다시 촛불의 보통시민들이다

2018년도 마지막 한 달을 조금 남긴 채로 저물어 간다. 2016년의 12월은 매 주말마다 추위를 녹여내는 광장의 열기와 함성에 대한 기억으로 생생하고, 2017년의 연말은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도 있다는 위기상황에 긴장하면서 토론자리마다 찾아 다니고 국내외를 떠도는 여론에 밤을 지새며 뒤적거린 지난 추억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진다.

지난 2년 여의 세월은 한마디로 물극즉반(物極則反)의 상황이었다. 끝 모를 지경으로 대한민국을 막장으로 몰아가던 박근혜 정권이 드디어 몰락하고, 시민의 힘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족간 전쟁은 불가하다고 단호히 선언하자 민족사에 서광이 비치는 듯이 한반도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에 호응하면서 제6차 핵실험과 화성 15호를 마감으로 북한이 핵개발과 미시일 발사를 중단하며 대화의 국면으로 전환하였고 4.27, 5.26, 6.12, 9.19 등 이젠 정확히 일자를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세 번에 걸친 남북간 정상회담과 역사적인 북미회담도 진행되었다. 한반도 상황은 일단 전쟁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점에 안도하면서 한숨을 돌렸고, 이제는 차분히 숨을 고르는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면서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러나 낙관만을 할 수 없는 많은 징후가 포착되고, 우울한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 트럼프에게만 의존하고 있는 한국 외교의 현재적 주소, 그의 등 뒤에서 내용조차 파악이 어려운 시나리오를 꾸미는 미국 보수파와 군산복합체들의 여전한 현존, 미국의 의도대로 상임이사국들의 전원일치라는 결정구조에 막혀버린 대북제재의 해제와 이를 돌파할 의지를 상실한 한국 정부, 한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체로 무지한 친미파의 목소리가 일방적인 국방외교 라인의 인적 구조, 미일 합작품인 SM-3 도입과 편법적인 한미연합사의 유지라는 최근 한미군사협의회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정보들, 한미일의 대중견제라는 블록 속에 군사문제를 중심으로 여전히 심화되고 있는 한중간의 갈등구조, 헌법9조 개정 등 새로이 발호하는 일본 아베 정권의 극우적 성격 등 수많은 난제들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외교적 국제 정세에 더하여 통상과 국민경제의 외부적 환경 역시 더욱 어려워 지고 있는 가운데, 남한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 모습들이 참으로 한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어,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의례적 예삿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근대 인류사의 대사건들은 비슷하게 단기적으로는 실패라는 유형의 흐름을 보여왔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단두대 정치와 테르미도르 반동시대를 자초하였고, 소비에트의 무산자 혁명은 스탈린의 일인독재와 당간부 중심의 부패한 관료제로 변질되어 무너지고, 민족민권민생 구호를 내세웠던 신해혁명은 수천 년간 지켜온 봉건제의 황제국가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으나 뒤이은 군벌의 등장으로 빛을 잃었고, 87년 민주화 운동은 양 김씨의 정권탐욕으로 군사정권의 연장과 IMF 위기를 자초하면서 재벌을 포함한 기득권을 오히려 한층 강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혁명 이후에 나타나는 중첩적이고 모순적 상황, 즉 물적 기반을 장악하고 있는 구체제 기득권의 저항과 음모, 혁명적 절정 이후 생활 속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보통시민들의 일상성, 가보지 못한 길인 혁명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내부적 혼선 등에 직면하여 대부분의 혁명은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러나 중장기적인 긴 호흡으로는 진전의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촛불시민운동 이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현재, 대한민국에 또다시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촛불시민 운동은 시민의 힘으로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점에서 혁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나, 헌정 질서의 유지라는 법치적 명분 때문에 이명박근혜를 탄생시키고 묵인했던 정치질서를 차기 총선까지 인정하고 연장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서, 충분한 준비도 없이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지난 시기 한층 강고해진 기득권 세력의 지위와 기반을 축소시키고 시대적 과제로서 보통사람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한없이 무력하고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일부의 인적 청산 이외에는 제도적 개선이나 사회경제적 내용에 전혀 진보성을 담아내질 못하면서 시민들이 기대하는 개혁에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상기에 언급한 무력한 상황의 우선적 원인은, 무엇보다도 독식이 가능한 소선구제를 바탕으로 구성된 정치적 권력구도와 수구적 세력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의회를 해산시켜 새로이 총선을 치를 출구가 없는 현행 헌법의 한계에서 오는 것으로, 당연히 한국사회의 전진을 위해서는 선거법의 개혁과 헌법의 개정이 긴히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을 거부하는 세력이 단지 수구적 야당집단들뿐만 아니라 여당인 민주당 의원 중에 중진을 포함하여 다수가 버티고 있다고 하니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정말로 답답한 일이다. 이명박근혜의 정권 탄생을 용인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더구나 촛불시민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이를 경원하였던 현하 정치구도 속에서 잔명(殘命)하는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한국사회의 미래를 논할 자격이 없는 무면허 소지자들이다.

적폐청산의 대상인 야당을 인정해야 할 만큼 기존의 헌정질서를 존중해야 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당연히 출범부터 대화가 가능한 야당과 반대세력을 포용하는 연합적 연대적 정부로 구성하여 속도를 조금 늦추더라도 개혁의 실행이 가능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다. 이때 사용했어야 할 단어가 바로 포용이다. 그러나 출범 당시부터 정부의 인적 구성은 야당과 반대파를 포용하기는커녕 집권여당조차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문캠프' 중심과 개인적 선호에 의해 형성되면서 오늘까지 정치적 파행과 무능을 연출하고 있다. 그나마 정권교체 과정에서 시간이 없었다는 변명을 인정하고 귀에 담아 보았다.

그러나 출범 이후에도 개혁 정책의 요체이면서 핵심에 해당하는 누진적 조세개혁과 보유세 도입을 거부하면서 문정부의 개혁 의지와 방향에 큰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시대적 상황에 정합적인 소득주도성장을 구호로 앞에 내세우면서도 이를 현실적으로 추진할 구체적 정책도 의지도 전혀 보여주질 못했고 오히려 내부의 주도권 싸움에만 열중하였다. 공정경제를 주장하면서 수십 년간 누전된 고질적인 재벌의 비리에 변죽만 건드리면서 예의 연출적 시늉만 보여주고 있다. 개혁의 대상이 알아서 스스로 개혁을 이룬 경우는 하늘이 열린 태초 이래 아예 없었다. 혁신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혁신이 무엇인지를 정부 당국자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실상이다. 사회경제적 혁신의 핵심적 요체는 보통의 시민들이 성실한 생업을 통하여 편하게 사람답게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환경과 조건을 형성하는데 있다. 새로이 급조한 포용정책은 포용을 시행할 물적 기반과 조건을 갖출 때만 실천이 가능한데, 기득권에 대한 누진적 중세를 거부하는 한, 현정권의 포용정책이라는 구호는 자가당착 또는 일시적 연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몰린 문재인 정권은 경제정책 수뇌부 인사교체를 통하여 오히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이 시대에 기회적이고 기득세력과 야합적인 관료들에게 의존하면서 엉뚱하게 2040 중기적 계획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 실패의 구실을 찾으려 하는가? 아직 2018년도 지나지 않은 현 시점에서 참여정부시절에 이미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2030 계획이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쓸만한 내용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반(半)만이라도 실천하고 시행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지름길이라고 판단한다.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보통시민을 위한 개혁정부인가? 아니면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고 야합하는 관리적 기능정부인가? 엄중한 역사의 시점에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도 분간을 못하는 주제에, 주간단위 노동시간의 탄력적 운용이라는 코메디같은 아젠다로 노동단체들과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고, 그나마 시민들에게 청량감을 주는 경기도지사 개인을 놓고 한가로이 벌리는 집권세력 내부의 정신분열적 착란을 무엇으로 설명하려는가?

진실로 개혁적인 정부가 되고 싶다면 다시 되새겨야 하는 것이 연합론이다. 지금이라도 대화가 가능한 야당을 수용하고 정부조직 내에 포용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만약에 역사를 보는 관점과 정책적 내용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수구적인 야당을 품어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개혁성을 담보하고 있는 진보야당들과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함께 나누면 힘이 커진 것이 개혁의 의지요, 촛불 보통시민의 격려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정치연대적으로 열린 마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시민들과 함께하면서 귀를 열고 대화하고 함께 결정해가는 길이다. 우선 국민청원 제도라는 용어부터 수정되어야 한다. 주권자인 시민들이 일꾼으로 뽑은 대통령에게 청원한다는 용어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이다. 국민청원제가 아니라 시민제안제도 또는 시민요청제도로 이름을 개명하고 이 제도를 통해 일정수준에 이른 사안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만 검토해서 답변을 할 것이 아니라 명실공히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별도의 시민위원회, 예건데 민회적 대표제를 구성하여 사안별로 단계별로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공론위원회, 시민의회, 더 나가서는 국민투표까지 시행하는 것을 검토해야 할 일이다. 헌정질서라는 보호막 아래 건건이 발목을 잡는 못된 수구적 야당을 우회하고 이들의 저항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개혁적 행보를 속도감 있게 진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통로는 보통시민들의 지지를 구하고 협력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보통시민들이 간명히 요구하는 것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속도감 있게 제대로 추진하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유행한 조직이 민관협치라는 이름의 기구들이다. 그러나 실제 시행되어온 모습들을 살펴보면 시민들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는 실제적인 토론과 의견수렴의 경로과정은 매우 부실하고 사안과 정책을 결정할 권한의 위임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중앙부처나 지방자치 단체장들이 선정하거나 선호하는 인사들이 소위 완장을 찬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고 홍보하고 이에 형식논리로 포장하여 활용해온 구차한 측면이 강하다. 현행의 협치 기구들은 한마디로 구색을 갖추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이제는 협치라는 형식적인 구호에서 명실상부한 민치의 시대로 진입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보통시민들은 민치의 주체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하여 삼일독립혁명, 419민주혁명, 6월 민주화운동 그리고 2016/7 년간의 촛불시민혁명 등 지난 백여 년간의 근대역사가 이를 보증한다. 각 단위, 각 영역 각 부문에서 필요한 단계를 거쳐 가며 보통시민들이 참여하고 토론하고 숙의하고 성찰하는 과정의 경험을 통하여 시민들이 스스로 책임있는 결정을 만들어가는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결정이 이루어진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후 진행되는 실천과 시행과정을 모니터링하고 감독하며 수정을 요구하는 역할도 검토해야 한다.

촛불의 보통시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수구 야당의 못된 옹니로 교착상태에 빠진 정치적 함정에서 빠져 나와 새로이 찾아가야 할 문재인 정부의 출구이자 올곧은 개혁의 원기를 회복하여 속도감 있게 추진해 갈 수 있는 근거지이다. 한국사회의 희망은 다시 촛불의 보통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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