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기관의 주장이 진실임이 입증되는 순간, 친모는 친생자를 출산하고도 스스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을 보낸 실패한 여성으로서의 낙인과 함께 에밀리의 출산 사실을 남편과 에밀리의 언니들에게까지 일생동안 감추고 살아온 거짓말한 사람으로서의 낙인 아래 처절하게 놓이게 될 것이다. 입양기관은 입양기관대로 자신들의 입양복리에 대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진위를 떠나 이 일이 언론을 통해 논란된 것 자체로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을 겪었으리라. 정부 당국인들 편안했을까? 한반도 남부 지역의 아동양육시스템의 하나로 정부가 정교한 틀을 만들어 60년 동안 유지해온 일에 느닷없는 부작용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당국자들의 당황과 국민 앞에 면구스러워 하는 모습 역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니까 말이다.
뿐인가? 시민사회는 어떤가? 이 가련한 여성의 거짓말에 대해서 손가락질을 하고, 입양기관들의 탐욕에 대해서 분개하며, 정부 당국의 무책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일로 시민사회는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의 사형 재판을 결심한 빌라도 총독이 물그릇을 가져다가 손을 씻었다고 해서 그 오심의 죄책으로부터 깨끗해질 수 없었듯, 시민사회가 스스로 나서서 해외입양 60년의 정교한 아동양육시스템을 발전시켜 온 일에 공동의 책임이 있음을 고백하고 나아가 무엇이 이 한반도 남부지역의 인간성과 경제적 위상에 걸 맞는 아동양육체계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그것을 재구성해내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 에밀리에게 우리 시민사회가 어른으로 설 수 있겠는가?
입양서류 위조의 관행화, 왜?
필자가 이 사안을 챙겨보면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관행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인권침해에 관련된 입양서류의 위조에 관한 것이다. 호주 SBS는 '그녀 입양서류에 의하면 한국부모는 당시 한국에서는 수치스럽게 여긴 혼전관계로 자신을 출산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에밀리가 한국에 와서 만난 친가족에는 언니들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당시의 한국 정황으로 봐서 친부모는 결혼관계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입양기관은 아이를 입양 보내겠다고 자필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은 당사자의 주민등록관계 서류를 당연히 제출받았을 것이고, 거기에 혼인관계가 나타나 있음에도 혼전관계로 에밀리를 출산했다고 기록해서 입양서류를 조작해서 보냈다면 이는 당연히 사문서 위조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이다. 만에 하나 주민등록관계 서류를 제출받지 않았기 때문에 입양기관은 에밀리의 친모의 혼인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더 큰 문제인 바, 아동을 입양하고자 데리고 오는 사람의 법적 신원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런 관행이 있었다면 어떻게 아동약취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겠는가?
부끄럽게도 벌건 대낮에 사안의 진실을 다 알면서도 이런 사문서 위조가 자행된 것은 비단 에밀리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입양인들이 들고 오는 서류에서나 아니면 그들이 가족찾기를 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이와 같은 사문서 위조행위는 입양기관들이 광범위하게 또 별 문제의식 없이 실천해온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동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더 큰 복리를 위해 아동의 존재의 근원에 관한 진실과 같은 더 작은 복리는 불가피하게 무시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무시할 수 있다는 의식이 이 기관들의 사회복지사들에게 광범위하게 공유된 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의 담당자들은 이 사실을 알만한 전문성이 없었거나 아니면 알고도 묵인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런 관행이 입양인들의 일생을 가름하는 아픔과 정신적 폭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단 에밀리의 경우만이 아니다.
부모가 자동차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입양인 남매의 사연
필자가 해외입양인센터이자 해외입양인권익옹호 시민단체인 <뿌리의집>을 운영하는 동안 만났던 입양인들의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몇 가지만을 들어 보겠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노르웨이에서 왔던 한 입양인이 <뿌리의집> 발코니로 나를 불러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사연은 이런 것이었다. 자기와 자기 여동생은 노르웨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되어 성장했는데, 이 남매의 한국 부모는 한 날 한 시에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입양서류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남매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입양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친생부모가 사고로 돌아가신 날이면 해마다 두 분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둘 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살았지만 친생부모의 기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만나서 조용한 레스토랑 한 쪽 구석에서 촛불을 켜고 두 분을 추모하면서 지내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입양기관을 찾아 친가족찾기를 시도하는 그 날에 이 입양인은 정말 느닷없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친생부모 두 분은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없고 아직 두 분 다 살아 있으며 이혼을 하고 각각의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입양기관의 안내를 좇아서 두 분을 만났고 친부와 친모의 집에서 각각 며칠씩 지내다가 <뿌리의집>에 와서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분이 살아계셔서 무엇보다 다행이긴 하지만, 입양서류를 따라 두 분을 추모해온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허망함을 가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짓 정보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을 구성해온 그 동안의 자신들의 삶의 궤적이 주는 배반이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구성해온 자신들의 정체성을 허물고 10여 년의 세월 동안 지켜온 친생부모 사망과 애도의 기억을 이젠 지워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또 한 겹 영혼의 상처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문서 위조가 그들의 삶에 남긴 잊을 수 없는 상처와 존재의 근원에 깃들인 위엄을 훼손당한 인권유린의 참담함을 이기고, 새롭게 주어진 정보와 관계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재구성해가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로 그들은 내어 몰려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미국 사우스다코타로 입양인 여성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의 무의미성에 대한 좌절을 벗어나는 일이 일상의 생의 과제인 여성이다. 이 여성의 삶에 있어서 우울증의 돌쩌귀가 된 정보는 그녀가 입양되기 전 골목에서 버려졌다가 경찰에 의해서 발견되어 입양 보내어진 아이였다는 입양서류의 기록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의 근원에 관한 전부였다. 유기가 생의 출발인 사람. 상상이 가는가? 그 냉혹의 아픔을!
그러나 이 입양인의 이모인 내 친구 입양인이 발견한 사실은 좀 달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친가족을 찾고 보니 자기 엄마만 자기를 입양 보낸 것이 아니라 엄마의 딸인 자기 언니도 딸을 입양 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이런 가혹한 불행을 대물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살고 있다. 언니의 딸을 찾아 나선 그녀가 언니로부터 먼저 들었던 이야기는 언니가 딸을 입양 보내기로 하고 입양기관에서 직영하는 고아원에서 일주일 동안을 울며불며 먹고 자며 아기와 함께 보내다가 결국 입양을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조카의 입양서류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되는 대신 길에 버려진 아이를 파출소에서 데리고 왔다고 되어 있었다. 만일 입양서류에 이런 사실이 기록되었더라면 이 사우스다코타주에 살고 있는 이 여성이 이토록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까라고 하고 내 친구 입양인은 질문을 던진다. 친생모가 이 아이를 그토록 사랑했고 결별을 아파하는 중에 입양을 보냈다는 사실이 기록되었다면, 이 입양인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슬픔이 그토록 깊었을까? 그리고 일생을 가름하는 우울증에 내어 몰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문서 위조는 사실상의 범죄행위일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실체적 생애를 유린하는 인권침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사우스다코타의 입양인의 삶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아마도 두 가지 이야기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부분의 입양인들이 가족찾기를 위해서 가지고 오는 서류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증명해준 고아호적 혹은 고아증명서와 그 번역본이 대부분 포함이 되어 있다. 이 고아증명서는 입양서류심사 단계에서 입양수령국의 입양자격심사에 합격하기 위해서 제출하는 서류 중의 하나이다. 미국의 경우 양친사망 고아를 일컬어 복수고아(double orphan)이라고 하고 친모나 친부만 있는 경우를 단수고아(single orphan)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정의이지만 미국 국무부가 입양가능아동으로 제시하는 조건이다. 이 두 범주의 고아에 해당하는 아동만이 입양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입양기관은 이 서류심사에 합격하기 위해서 실제로 아이에게 친부모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고아증명서를 첨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아동의 신분에 대한 입양기관과 시군구 단위의 장에 의해서 공모되는 일종의 사문서 위조행위에 해당한다. 전쟁 중인 나라가 아닌 이상 양친의 사망이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정부와 시민사회와 입양기관이 요보호 아동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이 입양이라고 하는 관념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민관공모의 범죄행위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건 대낮에 그리고 소위 고수입국가로서의 자긍심으로 가득한 나라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문서 위조는 입양인이 다 크고 나서야 인지하는 일이니 공소시효 7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훨씬 지난 후의 일이고 보면, 법정 쟁의에 시달릴 염려도 전혀 없는 일이니, 마음을 푹 놓고 작업을 해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와 입양기관은 아동의 존재의 근원과 그 존엄에 관한 인격권을 침해하고 결국 입양인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근원에 관한 조작된 서류에 나타나는 바에 따라 거짓 정체성을 구성해가도록 유인하며 유기에 내동댕이쳐졌던 자신의 과거와 거듭 씨름하도록 내어 몰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입양기관에서 일했던 사회복지사의 말을 빌면, 입양에 관한 한 파일A와 파일B가 있다는 것이다. 파일A는 입양수령국의 입양심사에 통과할 수 있도록 갖추어진 서류이며 대체로 여기에 고아호적 혹은 고아증명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일B는 아동이 친생부모에게 넘겨질 때 같이 넘어가는 서류인데, 파일B에는 통상 보다 상세한 아동의 입양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상기한 에밀리양의 경우처럼, '한국부모는 당시 한국에서는 수치스럽게 여긴 혼전관계로 자신을 출산했다'와 같은 내용이 들어가 있는 서류와 같은 것들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입양기관에는 사실상 파일C가 남아있는 경우가 또한 대부분이다. 친모나 친부에 의해서 의뢰된 입양에 관한 상세 경위와 그들의 주민등록관계서류 등 신상에 관한 파일이다. 여기에는 종종 사실상 이모나 할머니에 의해서 아동이 입양의뢰된 사실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결국 비록 한국 사회의 가족적 삶의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친권자인 친모나 친부에 의해서 입양의뢰된 것이 아니고 제3자에 의해서 입양의뢰가 되었으니 사실상 아동약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종종 친모만의 친권포기로 친부의 친권포기로 가름한다는 일종의 이면계약이 붙어 있는 경우도 흔치 않은 일이 아니다. 이런 모든 관행들은 우리에게는 관행이니만큼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권리에 관한 엄밀한 잣대를 대고 보면 이는 미국의 법학자이자 국제간의 아동 입양에 관한 전문가인 스몰린(David Smolin)박사가 주장하는 대로 <아동세탁(child laundering)>인 것이다. 불법자금을 세탁해서 합법화시키는 지하 금융세계의 불법에 유사한 일이 국제간의 아동입양의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스몰린 박사는 준열하게 지적하고 있고, 위에 적시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입양의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불법 관행들
입양의 미명하에 저질러진 이와 같은 불법관행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도하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입양인의 추방, 노숙, 정신분열증, 우울증, 마약중독, 알콜중독, 도박중독, 폭력, 범죄, 자살에 관한 사실들을 점점 더 자주 접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성공한 입양인의 신드롬에 빠져 넝쿨당 따위의 주말연속극이 생산해내는 입양 판타지에 열광하는 동안, 혼혈아동과 극빈가정아동과 장애아동과 미혼모 아동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우리와 동등한 생명권과 사회권을 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살 권리 그 자체를 박탈당한 20만 해외입양인들 중 상당한 일부는 인종과 언어와 문화와 몸이 다른 땅에서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입양의 선의라는 이름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에 관한 기록을 위조(falsifying)하고 조작(fabrication)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면 입양 그 자체가 문제적이다. 입양을 위한 아동세탁은 비록 그것이 고문이나 학살과는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궤를 달리하고는 있지만, 정부가 친생가족이 함께 살아갈 이 땅 모든 시민의 사회권을 옹호하는 일에 실패하고 나아가 이를 위한 사회복지비용의 지출을 회피하는 일에 연루된, 나아가 입양의 선의에 대한 무한하고도 절대적이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를 오랜 세월 동안 주저해온 그래서 성취할 수 있었던 민간의 입양사업의 흥왕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권력의 교집합 안에서 일어난 우리 사회의 최주변부에 내어 몰린 미혼모라 이름 지어진 여성과 아동의 인권에 대한 일종의 연성폭력(軟性暴力)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필자의 과도하고 과격한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해 7월 호주의 상원의 입양관련 상원조사위원회에서는 호주 사회 내부에서 60~70년대 나아가 80년대에 이루어진 입양의 관행에 대해서 그 본질이 미혼모와 입양인들에 대한 폭력적 성격을 지닌 일이었음을 인정하고 입양에 가담했던 교회기관들과 입양기관들에 대한 사과를 권고하고 지방정부와 연방정부도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에는 호주 서부주정부에서, 올해에는 호주 남부주정부에서 공식 사과를 했고, 연방정부도 조만간 사과할 것으로 보인다. 입양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을 한 나라의 정부가 시인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를 하는 일을 통해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뿐 아니라 지난 2007년부터 한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입양인들이 한국사회와의 화해를 전제하고 입양에 관련한 일종의 과거사위원회의 국회나 정부 차원에서 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 바, 그 선두에 서서 활동하고 있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의 주장 역시 입양은 결국 친생가족이 함께 살 권리에 대한 사회적 외면이자 아동과 모성에 대한 가혹한 사회적 규율의 한 방식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을 언급해두고 싶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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