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10대 동독 소년, 지금은 어떻게 살까?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⑤] 동독 1020세대가 기억하는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기존 동독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30~50대의 동독 주민들 중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똑같은 변화를 겪은 10~20대는 이들과는 좀 달랐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양태는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동독 사회와 비교했을 때 보다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서방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프레시안>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며 청년‧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요하네스 빈클러(Johannes Winkler, 1965년 생), 세바스티안 플뤼겔 (Sebastian Flügel, 1973년 생), 칼 에릭 다움 (Carl Erik Daum. 1978년 생) 씨를 만나 그들이 기억하는 독일 재통일과 동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통일로 인해 동독 사회와 주민들이 받았던 충격과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인터뷰는 지난 9월 9일(현지 시각) 신 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중 하나인 튀링엔(Thüringen) 주에 위치한 예나 시에서 진행됐다.

재통일의 출발, 교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김나지움 6학년(김나지움은 독일의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이다. 김나지움 6학년은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한다. 편집자) 이었던 다움 씨는 동독 이야기를 꺼내자 가장 먼저 동독 시절 국가보안부이자 소위 '비밀 경찰'로 악명 높았던 '슈타지'(Stasi)를 언급했다.

"아버지가 동독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셨다. 그런데 가게에 이따금 정보를 캐내기 위해 슈타지 요원들이 들르는 경우가 있었다. 슈타지 요원이 들어오면 금방 표시가 났기 때문에,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당신 슈타지 맞지?"라고 말하면 그 요원은 그냥 나가버리곤 했다. 이런 식으로 슈타지 요원들이 정보를 캐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움)

다움 씨에 따르면 슈타지는 교회나 환경단체와 같이 동독 내에서 활성화된 주민들 모임에 이른바 '정보원'을 한 명씩 심어놓았다. 그런데 이 정보원은 단체 내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누가 정보원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플뤼겔 씨는 교회를 관리하는 고위층은 누가 슈타지인지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목사들은 오히려 슈타지가 한 명씩 심어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독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교회의 경우, 슈타지가 교회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설명이다.

▲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서 슈타지를 교회에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교회가 반정부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Leipzig)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월요 시위'가 동독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독 내에서 교회가 민주주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냐는 질문에 플뤼겔 씨는 "민주주의 같은 개념은 아니었고 교회나 환경 단체가 큰 가족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 하고 있으면 편하다, 좋다고 느꼈고 여기서는 내가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 동독 시절에는 지금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두 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놀러갈 수도 있지만, 동독 시절에는 교회를 가는 것외에 다른 여가 생활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독 내에서) 재통일을 주도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교회나 환경 단체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소련의 지원도 떨어지자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나 환경단체에 더 많이 가게 됐다" (플뤼겔)

동독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슈타지의 활동도 많이 위축됐다. 플뤼겔 씨는 장벽이 무너진 이후인 1989년 12월 즈음부터 슈타지가 교회나 다른 단체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슈타지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재통일 이후 슈타지들이 보험회사나 운전 학원, 부동산 중개소 등으로 전업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누가 슈타지였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충성심을 보여라

동독 정부는 체제에 충성심을 보이는 학생들에게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열어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섰던 빈클러 씨는 동독 체제가 이어졌다면 자신의 대학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내가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치르고 대학 공부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학급이 25명이라고 한다면 동독 정부는 그 중 3명 정도만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나는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집권당)의 소년단이라고 불리는 FDJ(Freie Deutsche Jugend, 자유 독일 청년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SED의 당원도 아니었다" (빈클러)

결국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9월, 광학회사인 칼자이스(Carl Zeiss)가 운영하는 엔지니어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장벽이 무너진 뒤인 1990년에는 이 교육기관의 본부가 있는 예나에서 공부했다.

동독 시절에 정부에 충성하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빈클러 씨는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성경의 십계명에 써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을 소신있게 이야기한다고 가르쳤다"며 정부에 거짓으로 충성하는 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 요하네스 빈클러 씨 ⓒ특별취재팀

다움 씨 역시 동독 내에서 대학을 가려면 충성심을 증명하는 증표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다움 씨보다 10살이 많은 형은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동독 시절에는 대학에 가려면 동독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FDJ에 속하거나 당원이 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군대에 3년동안 복무해야 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는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형은 동독이 계속 유지됐다면 (군 복무를 했더라도) 대학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통일이 되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다움)

동독 TV를 누가 봐?

슈타지와 충성 유도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던 동독 정부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특히 서독의 TV 채널이 동독에서도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동독의 몇몇 지역만 빼고 서독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동독 사람 중에 동독 TV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가끔 동독 TV에서 좋은 영화를 보여주거나, 호네커(동독 최고 집권자, SED의 서기장)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만 동독 TV를 봤다.

요즘도 그렇지만 뉴스 시작하기 전에 시계가 나오지 않나. 당시 서독 방송에는 동그란 시계가, 동독 방송에는 네모난 시계가 나왔다. 가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TV 속 시계 모양을 물어봤는데, 학생들 대부분 당연히 동그랗다고 대답했다. 다 서독 TV만 보니까.(웃음)

1989년 가을 서독 방송에서 헝가리가 국경을 열어 사람들이 넘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또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한 엄마가 수 미터 정도 되는 (서방국가의) 높은 대사관 담장 위로 자기의 아이를 넘기는 장면이 방영됐다. 동독인들은 이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무런 폭력적인 상황 없이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교회를 주축으로 평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100명이 모였다가 다음날 500명이 됐고, 학생이나 젊은층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도 같이 나갈 정도였다. 방송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플뤼겔)

▲ 세바스티안 플뤼겔 씨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와중에 1989년 5월 사람들의 시위에 불을 당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SED가 부정선거를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SED는 98.9%가 자신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였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실제 어느 정당에 투표했냐고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는 SED가 말한 것과 너무 달랐다" (빈클러)

"당시 선거는 기표소에 들어가서 후보를 찍는 비밀선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비밀선거를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밀투표를 하겠다고 기표소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에 낙인이 찍혔다" (다움)

"기표소에 들어가면 비밀투표를 했다고 표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직장 상사가 불러서 기표소에 좀 들어가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 회사가 지원을 못 받는다면서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플뤼겔)

동독이 소위 '큰 형님'이라고 부르던 소련의 태도 변화도 동독 사람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데 주요한 촉매제가 됐다.

"동독 사람들에게 소련은 모범적인 국가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개방을 한다고 하니까 동독에서 혼란이 커졌다. 소련에서 동독으로 보내는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개방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동독 정부는 그 잡지에 대한 판매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동독 사람들은 정부에 더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내게 됐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게 "도와줄게"가 아니라 "변화 늦게 하면 너한테 벌을 줄거야"라고 이야기하니까 동독 주민들은 "이게 뭐지" 싶었다" (플뤼겔)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이 시위를 막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시위에 나서게 됐다" (다움)

장벽 붕괴를 전후로 학교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움 씨는 동독으로부터 도망친 선생님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동독 정부는 중국 정부가 정말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었다. 동독 정부에 대해 친화적인 발언을 했던 선생님들도 그 발언 수위가 약해졌다.

동독은 당시 매년 9월 1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기 시작 첫 날에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 한 분이 안 계셨다. 알아보니 프라하에서 (서방국가 쪽) 대사관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 선생님뿐만 아니라 서독으로 넘어간 친구들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이었다" (다움)

통일이 아니었다면?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졌다. 다움 씨와 플뤼겔 씨는 당시 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연방주(구 동독)가 서독에 흡수되고 화폐 개혁도 예정보다 몇 달 더 빨리 이뤄졌다. 동독에서는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 매일 매일 느껴졌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동독 내에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혁된 동독을 유지하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흡수통일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다움)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거나 훔쳐갔다고 보지 않는다. 동독에서 그 상태로 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경제를 비롯해 동독 내의 많은 것이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플뤼겔)

빈클러 씨 역시 당시 시위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는 통일로 인해 유토피아가 열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동독 말기에는 (1989년 5월 지방선거와 같은) 부정선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SED에서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시위에 나갔다. 사회주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당시 시위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독에서 여행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동독 내에서 억압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권리인데 그게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흡수통일이 내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긴 했다.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빈클러 씨는 튀링엔 주 천문관측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낙원이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빈클러)

빈클러 씨와 다움, 플뤼겔 씨에게 통일이 나름의 기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움 씨는 본인이 통일로 인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세대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의 부모님 세대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여전히 서독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경우도 있을 거라고 전했다.

▲ 칼 에릭 다움 씨 ⓒ특별취재팀

"통일될 무렵에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후 서독 교육 시스템에 바로 안착해서 아비투어를 보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0살 많은 형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에게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또 연금과 관련, 재통일 체제에서 동독 사람들이 동독 시절 직장에 다녔다는 것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독 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만한 기술이 있는 공장도 있었지만, 재통일 체제에서 이런 공장을 없애버린 경우도 많다. 기존 서독 지역에 경쟁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서독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다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지 30여 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동서독 간 차이는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서독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가 동독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첫 1년은 뮌헨에 있었다. 당시 회사 사장이 동독 사람에게 '프로젝트가 언제 끝나냐'고 물으면 동독 사람은 '한달 후'라고 대답하고 정말 한 달 후에 끝냈다. 그런데 서독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주일 후에 끝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 하지만 절대 그 기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은 불평도 많고 좀 딱딱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은 지키는 성향이 있는데, 서독 사람들은 말은 다 해줄 것처럼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플뤼겔)

"서독 출신들은 동독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랐기 때문에 생활 방식도 다르다. 유머감각도 좀 다르고. 예를 들어 서독 출신 사람들은 동독 출신에 비해 자산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또 동독 사람들은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지 않았나? 그래서 물건을 샀는데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려고 노력하는데 서독 사람들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동독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식에서 동독의 잔재 같은 것이 남아있다. 동독 시절에 언론 매체가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지금도 언론 매체를 통해 나오는 기사를 보면 일단 덮어놓고 믿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빈클러)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동독 시절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밖에서 자유롭게 말하면 안 되는 사회였는데, 서독의 경우에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감이 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딸이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계속 발표 수업을 한다. 자꾸 자기를 보여주는 교육을 십수 년 동안 배우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움)

동서독 간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차이도 여전하다.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전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나이대에 서독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출발할 때의 자본이 두 배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자손 세대 정도가 되어야 서독과 대등한 경제적 출발 자본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 기업들도 40년 동안의 동독 시절에 다 망가졌다. 지금 동독에 큰 회사들이 이따금 있지만 나머지는 굉장히 영세하다. 겨우 겨우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키워 놓으면 서독에서 그 회사를 사버리곤 한다. 앞으로 두 세대는 더 지나야 동서독이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플뤼겔)

동서독은 40년 동안 따로 살다가 재통일됐지만 남북은 분단만 해도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또 전화나 편지를 교환하고 서로 방문도 할 수 있었던 독일에 비하면 남북은 교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북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동독의 다수는 체제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독 정부는 개인의 의견을 통제하지 못했다. 서독에서 친척이 오고 가면 동서독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정보가 왔다갔다 했는지 동독 정부는 몰랐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독은 남북 상황과 비교되지 않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다움)

"동서독은 재통일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남북은 이런 식으로 통일하면 안된다" (플뤼겔) (통역 : 조경혜)

"너희도 통일할 것 같아?"

플뤼겔 씨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바로 독일에서 호평을 받은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조경혜 번역가다. 조 번역가는 1996년 예나로 유학을 왔고 이후 지금의 남편인 플뤼겔 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22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바깥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어떤지 들어보기 위해 9월 10일(현지 시각)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 조경혜 번역가 ⓒ특별취재팀

우선 1990년대 중반, 독일이 통일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예나라는 구 동독 지역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서독 지역에도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많았을텐데 왜 하필 예나였을까?

"1996년이면 재통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독문학을 공부하려고 알아보던 중 교수님이 요즘에는 동독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서독 지역에도 지원하고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와 예나에 있는 대학에도 지원했는데 예나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입학허가서 들고 바로 왔지.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예나에 얼마나 있는지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짐 싸서 왔다. 예나에 도착해서 알게 됐는데 당시 한국 사람이 5명 있었다. 첫 번째 한국인을 만나는데 3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여기가 예전 동독 지역이다 보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물어봤다. 어르신들 중에는 동독 시절에 북한 사람 많이 알고 지냈다는 분도 계신다"

학위만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독일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20년 넘게 백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특히 요즘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떠오르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도 늘어가고 있어 독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독일 극우 집단들의 타깃이 동아시아 쪽은 아니라서 제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낀 건 없다. 그런데 지난해 60대 여성이 한 난민에 의해 강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일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는다. 다만, 이슬람 문화를 좋아하는 독일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베를린의 경우 터키계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데도 그렇다.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경우 전략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동독 지역을 공략한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난민 때문이라는 식으로 선전을 한다.

그런데 난민에 대한 반감은 극우뿐만 아니라 중산층에도 좀 있는 것 같다. 자기가 낸 세금을 가지고 난민의 생활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인다"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도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주로 동독 지역에서 지지를 얻은 이유가 됐을 거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실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면서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을까?

"예전 서독 지역에 가면 분위기가 동독 지역과는 좀 다르다. 물론 예전 서독 지역 중에서도 주로 큰 도시를 가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동독 지역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독일 기준으로 외국인도 훨씬 많고.

또 예나는 대학이 있어서 동독 내에서도 발전이 좀 이뤄진 도시이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 도시들은 좀 어렵다. 라이프치히만 해도 큰 공장 건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리할 수 있는 자본이 없어서 빈 건물로 놔둔 곳이 상당수 있다.

물론 예나도 재통일 전에는 좀 어두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에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색을 칠하고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밝아졌다고 한다. 예나의 건물 중에 웬만한 건 다 수리했다고 보면 된다. 하다못해 페인트칠이라도 다 새로 했다"

분단 40년에 통일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동서독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분단 100년이라는 시간표를 받아들지도 모를 남북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남북 간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여기가 한국보다 더 난리다. 지난해에는 저도 걱정되더라.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너희도 통일할 거 같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려울 거 같다고 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기도 했고 분단됐을 때 교류도 안했고. 또 이산가족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고.

독일은 40년 분단 기간 20년 정도는 TV부터 시작해서 통신 등을 허가하면서 동서독 간 교류를 해왔다. 이게 기반이 되어 국제 정세가 딱 맞아 떨어질 때 통일을 한 것이다. 이 사람들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남북이 교류하는 게 선행되어야 통일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인 문제보다 남북이 이질화가 심각해졌다는 것이 가장 문제 아닐까 싶다. 남한은 문명과 변화에 너무 민감하고 북한은 너무 통제돼서 사실 극과 극이다. 이 둘이 융화되려면 남북이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면서 조금씩 통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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