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동독 출신 노동자 오마지치 씨 이야기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③]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이야기

베를린 장벽 붕괴 한 달 후, 동독은 스스로 민주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89년 12월 7일, 동독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운동가와 사회주의통일당(SED) 수뇌부가 만나 민주적 체제 수립을 논의하는 기구 '중앙원탁회의'가 출범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으려 했다. 민주적 헌법을 만드는 것부터 자유로운 정당 활동 보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쏟아졌다.

하지만, 통일에의 열망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18일, 1대 1 기준의 마르크화 통합은 동독 자생적 변화의 끝을 상징했다. 이후 독일은 다시 하나가 됐다. 이제 서독 체제를 일방적으로 흡수하는 숙제가 동독인에게 주어졌다. 상당수는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에 힘없이 떠밀려갔다. 동독은 통일 당했다.

소개할 안드레아 오마지치(Andrea Omasics) 씨의 인생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금도 독일 내에서 논란이 되는 동서 간 격차, 그로 인한 구 동독 지역의 극우화 현상 등은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 체제 적응에 실패하는 이를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이는 민주 국가라면 마땅히 고민해야 할 숙제다. 북한과의 교류를 앞둔 우리도 서둘러 준비해야 할 문제다. 약자의 눈으로 독일 재통일을 바라봐야 할 이유다.

▲ 극우 시위 사태로 논란이 된 작센 주 인구 25만 명 규모 도시 켐니츠의 화요일 오전 9시경의 풍경. 중앙역 인근의 번화가임에도 도시가 텅 비어있다. 급격한 통일의 후유증으로 구 동독 도시 상당수는 극심한 실업 상태를 겪어야 했다. ⓒ특별취재팀

오마지치 씨의 사례를 전하기에 앞서, 재통일 30주년을 향해 가는 오늘날 독일의 동서 격차 상황을 통계를 통해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달 2일자 <더 타임스>와 작센(Sachsen) 주 지역 언론 <mdr 작센> 등에 따르면, 유럽의 도시별 하수도에서 가장 많은 양의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이 검출된 지역이 바로 최근 극우단체의 이른바 ‘인간사냥 사태’와 난민 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은 작센 주 도시 켐니츠(Chemnitz)다. 2위는 튀링엔(Thüringen) 주의 주도인 에어푸르트(Erfurt)다. 5위가 작센 주 주도인 드레스덴(Dresden), 7위는 뉘른베르크(Nürnberg)다. 유럽에서 마약이 가장 만연한 도시 톱10 중 독일에서만 4개 도시가 올라 있고, 그 중에서도 3개 도시가 신연방주 소속이다.

격차는 더 다양한 통계자료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10월 발간한 <통계로 보는 독일통일> 자료집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신연방주(베를린 제외)의 지역총생산(GDP)은 3486억1500만 유로로 구연방주(베를린 제외) 2조6546억100만 유로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신연방주는 5개주고, 구연방주는 8개주임을 고려해야 한다. 도시주 3개(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 중 2개가 구 서독 지역에 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격차는 분명하다. 2016년 기준, 신연방주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포메른 주의 GDP는 414억2900만 유로로, 도시주(일종의 직할시)에 불과한 함부르크(1106억7400만 유로)의 37% 수준이다.

2010년을 기준(100)으로 볼 때, 2015년 현재 구연방주의 취업인구가 105.6명으로 늘어나는 동안 신연방주는 오히려 99.9명으로 줄어들었다. 2016년 현재 구연방주의 실업률은 5.6%이지만, 신연방주는 8.5%에 달한다. 통일 이후인 1991년부터 2015년 사이 바이에른 주 인구는 1만 명당 23.9명이 늘어났지만, 작센-안할트 주에서는 55.8명이 줄어들었다. 2015년 기준, 통일 당시 1450만 명이었던 동독 인구는 200만 명 순감했다. 통일 이후 신연방주에서 인구가 늘어난 지역은 수도 베를린을 둘러싼 브란덴부르크 주뿐이다.

베르텔스만재단이 △다양성 인정 수준 △유대감 △공동의 이익 도모라는 3대 요소로 지역별 사회결속력을 분석한 결과, 1993년에서 2003년 사이 신연방주 5개주 전부에서 사회결속력 지수가 뚝 떨어졌다. 구연방주에서 이 지수가 떨어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다. 통일 후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95년 당시 조사 결과에서 작센, 튀링엔,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포포메른, 작센-안할트 주의 사회결속력 지수는 각각 –0.23, -0.36, -0.71, -0.74, -0.94였는데, 2003년 조사에서는 이 수치가 각각 –0.50, -0.77, -0.93, -0.43, -1.31로 더 떨어졌다. 그나마 약간이라도 개선된 곳은 오직 메클렌부르크-포포메른 주뿐이다. 서독 지역의 사회 결속력이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반면, 동독 사회는 갈수록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셈이다. 차이가 동서로 극명하게 갈린다.

이 같은 상존한 격차가 2015년 독일 재통일 25주년을 맞아 각 언론사가 일제히 동서 격차를 조명한 이유다. 당시 독일 공영방송 ARD의 보도 제목 "하나가 되었으나, 결코 같아지지는 않았다"는 상징적이다. 경제적 격차, 불안한 미래는 필히 극우화 바람을 불러온다. 물론 유럽 전역에 부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로 인한 소득 양극화, 늘어나는 난민 유입 등의 원인이 있겠으나, 유독 신연방주에서 극우화 바람이 거센 이유를 통일 후유증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제 오마지치 씨의 인생 역정을 소개할 차례다. 오마지치 씨는 장벽 건립 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청소년 시절에는 방황했다. 동독 시절 싱글맘으로서, 비숙련 노동자로서 아이 셋을 키웠다. 열심히 노력해 한때 내 가게를 가지나 했으나, 통일의 여파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통일 후에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평생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는 지금도 통일이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뷰이의 생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오마지치 씨의 육성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각색했다.

▲ 안드레아 오마지치 씨. 오마지치 씨 삶의 이력은 구 동독 출신으로서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일 지 모른다. 통일 후에도 동독의 일부 엘리트 노동자는 좋은 삶을 이어갔지만, 대다수 저숙련 노동자는 힘든 시기를 거쳐야 했다. ⓒ특별취재팀

서에서 동으로

난 1957년 서베를린에서 7남매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어요. 그러다 한 살 때 동베를린 쉔하우저 대로(Schönhauser Allee) 부근으로 이사했죠. 장벽 바로 맞은편이야. 요새는 부자들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지(프렌츠라우어베르크).

어떻게 동서를 오갈 수 있었느냐고?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없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어. 보통사람들이 이념이니 뭐니 알았나. 당시 우리 아버지 직장은 서베를린에 있었는데, 동베를린 집값이 싸서 이사했어요. 그게 다야. 그런데 하루아침에 장벽이 세워져버리더라고.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야 그런 일이 생길 걸 몰랐지. 이때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이들도 있어요.

결국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었어요. 그래서 직업센터를 찾아 일을 얻었어요. 동독에 이런 센터가 많았어요. 센터에 노동자카드(사회보험 적용 대상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증)를 들고 가서 실직 상태를 증명하면 나라에서 다른 직업을 알선해주곤 했죠. 나중에 통일 되고 이 카드로 인해 연금 수령 문제가 생기기도 했어요. 동독에서의 노동 경력을 인정받으려면 이 카드가 필요한데, 통일 되고 별 생각 없이 이걸 버려버린 사람들이 노동 경력을 입증 못해서 연금 수령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죠. 난 잘 보관하고 있는데, 사실 내 경력이 백퍼센트 기록되진 못했어.

아무튼, 동독에서는 직장을 잃어도 바로바로 새 일자리를 찾아주니 실업자가 거의 없었어요. 나중에 아버지는 기차 운전을 하셨고, 과일 판매도 하셨지. 어머니는 사무 관리직으로 일했죠.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했고, 집에도 잘 안 들어오셨어요. 집이 싫던 난 사춘기 때 가출했죠. 그러다 경찰에 여러 번 잡히기도 했죠. 동독에서 나 같은 아이는 고아원(Erziehungsheim, 직역하면 훈육의 집)으로 보내졌어요. 14살에 그곳에 들어가 2년 정도 생활했죠. 17살에는 소년원(Jugendwerkhof)으로 보내졌죠. 이곳은 악명 높았어요. 호네커 의장의 아내가 이 시설을 전국에 늘리는 걸 밀어붙였는데, 이 시설 때문에 가족이 생이별하는 일이 많았거든. 난 괜찮았어요. 집이 더 싫었으니까. 여기서 일하는 법도 배우고, 비슷한 또래들과 생활도 같이 했어요.

▲ 분단 시기 미국이 담당했던 동서 출입경 지역인 체크포인트 찰리. 지금은 베를린의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분단사를 상징하는 지점의 하나다. 역시 대표적 관광 명소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부근의 오베르바움 다리 역시 분단 시기 동서 접경 지역이었다. ⓒ특별취재팀

동독의 싱글맘

성인이 되고 창고 관리인으로 일했어요. 실용적이고 돈도 잘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21살인 1978년에 결혼했어요. 당시 이미 남편과 동거 중이었는데, 대출을 받으려고 혼인신고했어요. 동독에서는 결혼한 부부나 아이가 있는 가정이 대출 받기 쉬웠거든. 이후 베를린을 떠나 남편의 고향인 퓌르스텐발데(Fürstenwalde)의 시부모님 댁에서 살았어요. 보통 동독에서 결혼하면 집을 얻었는데, 시부모님 댁이 커서 우리는 그 집 아래층에 살았죠. 그리고 당국에는 '우리는 집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게 나중에 내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남편과 결혼 7년 만에 이혼했어요. 사랑의 유통기한이 7년인 건 세계 공통 아닌가? (웃음) 양육권은 내가 가졌어요. 동독에서 이혼하면 법적 절차를 밟는데, 대부분의 경우 아내가 양육권을 가졌어요. (동독의 여성 노동에 관해서는 지금도 여러 의견이 나온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했으니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이지만,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동독이 여성의 노동 참여를 요구했을 뿐, 동독이 더 여성 친화적인 정부는 아니었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이 노동에 활발히 참여함에 따라 오마지치 씨의 사례에서처럼 여성이 양육권을 쉽게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지점으로 보인다. 여전히 남은 가부장적 문화에 출산 후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까지 더해 이혼 시 여성이 양육권을 지키기 어려운 한국과 비교된다.)

이제 이혼했으니 집이 필요하잖아. 당국에 집을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과거에 집 필요 없다 했다'며 집을 안 준다는 거야. 어쩔 수 있어? 이혼하고도 시댁에서 살았어요. 그러다 셋째 아이까지 갖게 됐지 뭐예요.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않는 전 남편 가족과 계속 살 순 없잖아요? 이미 큰 아이는 12살이고 둘째가 2살, 막내는 생후 4개월 됐을 때예요.

당시 전 시부모님 집이 참 열악했어요. 난 아래층 방 3개 중 2곳을 썼는데, 이 방들이 다 연결되어 있거든. 주방에 가려고 해도 남의 방을 지나야만 하는 상황이에요. 집에 욕조가 없고 변기도 없었죠.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당국에 집을 요청했지만 반년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어요. 다시금 호네커 의장 앞으로 편지를 썼죠.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이니, 사회주의 국가의 이상대로 모든 인민에게 기본적인 물질적 토대를 제공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말이야. 2주 내로 내 요청에 정부가 답하지 않는다면, 빈 집에 그냥 들어가 살겠다고 했어요. 서쪽으로 가겠다고도 했고. 그제야 당국에서 집을 주더라고. (앞서 플뤼겔 씨 부부의 사례에서 보듯, 인민이 문제 해결을 위해 호네커 의장에게 직접 호소하는 형식이 동독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오마지치 씨 편지의 논조에서 보듯, 강력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편지도 형식상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내 집이 생기니 상황이 조금 나아졌어요. 동독에서는 아이가 셋 이상인 싱글맘에게 양육 지원을 더 해 줬어요. 주거비를 추가로 주고, 아이 옷값 등도 조금 더 줬지. 크리스마스에는 보너스를 주기도 했죠. 이런 지원금이 아이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 나왔어요. 어린이집을 구하는데도 혜택이 있었죠. 이런 지원은 동독이 좋았어요.

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상점 판매원으로 일했어요. 동시에 공장의 기계 보조공으로서도 일했고. 이른바 투 잡을 뛰었죠. 요즘 사람 기준으로 보면 힘든데 뭐 그리 많이 낳았느냐 싶죠? 당시 사람들이 좀 순진했어. 생활이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육아 부담도 적었으니 아이를 많이 갖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좀 있었어요. 아이가 있는 집은 한 달에 하루 '집안일을 위한 휴가(Haushaltstag)'도 유급으로 얻었는걸.

▲ 오마지치 씨의 동독 시절 노동자 카드. 우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이 카드에 소지자의 노동 이력이 빼곡이 기록됐다. ⓒ특별취재팀

재통일의 여파

정신없이 살다보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더라고. 이때 마침 동독에서도 자유 바람이 일었는데, 1990년 1월 1일에 일하던 가게 운영권을 내가 인수하게 됐어요. 일종의 봉급 사장이 된 셈이지. 이제 살림이 좀 펴나 싶었는데 가게 소유권이 몰수되어버렸지 뭐야? 자세한 사정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때 희망이 꺾였죠.

재통일 되고 퓌르스텐발데에도 실업자가 넘쳐났어요. 일자리가 없으니 어떡해? 가족과 친지들이 다 있는 베를린으로 1991년 돌아왔어요. 일단은 여동생이 살던 집에 들어앉았지.

분단 당시에 동독을 탈출할 생각 안 해 봤느냐고? 안 했어요. 당시 사촌 여동생이 서베를린에 살아서 출산을 축하하러 한 번 가봤어요. 여기서 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서독 체제에서 나 같은 사람은 낙오자가 되겠다 싶었죠. 어차피 난 일자리도 동쪽에 있는데, 그냥 동독에서 평범하게 아이 키우면서 이웃이랑 잘 지내고 싶었어요.

재통일 후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어요. 일단 난 실업자가 됐지.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정부에서 일자리 재교육을 이것저것 시켰어요. 난 화장품 메이크업 교육을 받았어요. 내 가게를 차리고 싶었거든. 그런데, 자격증 시험일에 아이가 아파서 못 갔어. 아쉽죠.

일자리 찾기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직장이 없는 상황 자체가 고통이었어요. 아이 셋을 기르면서 직업센터를 꾸준히 가야하고, 실업급여 받으러 다니는 것 자체가 힘들었죠. 이때 간이음식점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며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어요. 그렇게 재통일 후 쭉 살았지. 그러다 보니 이 나이가 되어 버렸어. 난 지금은 베를린 도심에서 (대중교통 기준) 동쪽으로 약 한 시간 이상 떨어진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요. 나 같은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에요(인구 약 300여만 명이 사는 베를린은 서울 면적 1.5배 크기의 거대 도시다.).

지금은 결손 가정의 아이를 돌보는 돌봄 노동자로 일해요. 세금 카테고리상 자영업자인데, 실제로는 하청 노동자예요. 한국의 특수직 자영업자와 사정이 같아요. 어느 사회에나 조손 가정이 있고, 부모가 몸이 아파 집안일을 하기 힘든 가정도 있잖아요? 이런 곳에서 복지 지원 신청을 하면 복지단체가 나 같은 사람에게 연락해요. 그러면 우리가 가서 맡은 가정의 집안일을 해 주죠. 독일의 복지시스템 일부예요.

이런 사람을 위한 지원제도인 소득불능연금(Erwerbsunfähigkeitsrente)도 있어요. 소득 수준이 매우 낮거나, 몸이 불편해 노동을 하기 힘든 사람이 따로 받는 연금이에요. 나도 일자리 문제로 인해 이 연금을 5년 정도 받았어요.

통일이 좋았느냐고? 글쎄...

계속 이 연금을 받으면 되는데 뭣 하러 힘든 일을 하느냐고?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집에 앉아 있어봐야 뭐 해요? 그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어요. 내가 할 줄 아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난 평생 내 가게를 꾸리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못 했어요. 이제 다른 사람 손 안 벌리고 내 힘으로 돈 벌면서 살고 있는데 얼마나 좋아요. 돈을 모아서 따뜻한 나라로 여행 갈 생각이야.

▲ DDR박물관에 전시된 유겐트 복장. 독재 시절 한국, 북한과 마찬가지로 동독은 병영국가였다. 청소년은 유겐트로부터 집단 체제의 일원이 됐다. ⓒ특별취재팀
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가정을 볼 때마다 통일이 좋았다고 마냥 웃어넘길 수 없게 돼요. 요즘 사회 안전망이 다 무너졌잖아요. 예전에는 젊은이라면 사회가 일단 받아들여줬어요. 일자리가 없으면 일자리를 구해주고, 교육을 받고 싶다면 공부하게 해 줬어요. 그런데 요즘 사회는 젊은이를 그냥 무시해요. 그러니 젊은 아이들이 자꾸만 엇나가는 거야. 동독 시절에는 아이들이 활기찼어요. 유겐트가 있으니 아이들이 어디든 소속되어 활발히 활동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할 일이 없으니 마약이나 하잖아요! (소년단 등 동독 체제에 관한 태도는 앞선 인터뷰이들의 사례를 봐서도 알 수 있듯, 이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이 사회에서는 이른바 자유가 있어서 원하는 건 뭐든 돈으로 살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것도 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웃을 돕는 문화도 사라지고 있어요. 모두가 경쟁하기만 해요. 사회적 유대가 돈독했던 옛 시절이 가끔 그리워요.

물론 청승맞게 동독 시절이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동독 출신으로 재통일 후 힘들게 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요. 젊은 시절 친구들을 시간이 지나 만나보면, 잘 사는 아이들이 없어요.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중독자 자녀를 가진 집도 많죠.

나 같은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 한 마디 더 할까요? 독일 미디어가 동독을 묘사하는 걸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독일 미디어가 온통 동독 사람들은 어릴 적 고아원에서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못 한다는 식으로 보도하는데 짜증나요. 난 오히려 소년원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거든. 동서독 사람이 뭐가 그렇게 달라?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애초에 일을 안 하려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동독의 일부 사람 예를 가지고 모든 동독 사람이 게으르다는 식으로 보도하니 문제예요. (통역: 추영롱)

앞선 인터뷰이들이 통일로 인해 혜택을 받은 구 동독 출신의 소수라면, 오마지치 씨는 통일의 여파에 적응하지 못한 대부분 저소득 노동계층을 상징하는 사람이다. 다음 편에는 역시 비슷한 연령대의 인터뷰이를 한 번 더 만나볼 예정이다. 그는 동독 체제에 온 몸으로 저항했으며, 동독 독재 체제를 극도로 혐오한 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더 젊은 세대와의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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