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청와대뿐 아니라 외교부와도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외교부의 민원으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5년 동안 미뤄왔다는 것이다. 생의 말미에서 재판 결과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피해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현직 부장판사인 A 판사는 지난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과거 이 소송을 맡았던 대법관과 선배연구관이 납득하기 힘든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2014년 2월∼2016년 2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했다. 당시는 박근혜 정권 시절이다.
그는 "종전 미쓰비시 사건의 판시를 인용한 의견서(판결 초고)와 보고서를 주심 대법관께 보고했다"며 "난데없이 선배 연구관이 '그 판결 이유가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 판결에서 인용한 미쓰비시 사건을 다시 파기환송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미쓰비시 사건'은 2007년, 2009년 1, 2심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에 패소했지만 2012년 대법원이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2013년 부산고법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미쓰비시중공업이 피해자 1인당 8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후 미쓰비시 측의 상고로 다시 대법원에 사건이 올라왔는데 이례적으로 대법원 스스로 자신의 판결을 뒤집으려 했다는 게 A 판사의 주장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5년 째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을 수사 중인 검찰은 대법원이 강제징용 소송 판결을 미뤄온 이유가 박근혜 정부 당시 '외교부 민원'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최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하드디스크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외교부 사이의 거래 정황이 담긴 문건을 발견했다. '강제노동자 판결 관련-외교부와의 관계(대외비)'라는 제목의 문건이다.
해당 문건 내용을 보면, 외교부는 2013년 9월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민원을 대법원에 여러 차례 전달했다. 이에 법원행정처는 "외교부를 배려해 절차적 만족감을 주자"라고 제안하면서 '법관의 해외 파견과 고위 법관 의전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미루는 대가로 일부 법관의 편의를 제공받으려 한 것으로 읽힌다.
사법부는 '재판 당사자'가 아닌 외교부가 재판에 개입할 수 있도록 관련 규칙까지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15년 2월 민사소송규칙에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공익 관련 사항에 관하여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일본 전범기업들을 대리하던 김앤장은 2016년 10월 '대한민국 외교부'에 의견서를 요청했고, 외교부는 그해 1월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피해자들이 한국 내 일본 기업들 재산을 압류하는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요지다.
외교부는 "한일관계의 근간이 되어온 협정의 해석이 뒤흔들릴 경우 우리나라의 대외적 신인도 손상을 불러올 것이며, 일본 기업들의 한국 투자와 비즈니스에 장애가 되고 한일 간 경제관계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며 경제적 관점의 부정적 의견도 제시했다. 이어 "한국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로 인식되고 과거사 문제에서 갖고 있던 도덕적 우월성까지 잃게 될 것"이라고도 밝혔다.
"우리 외교부, 일본 지부 노릇하고 있었다"
이 사건의 원고이자 강제징용 피해자 측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부와 외교부, 김앤장의 추악한 유착"이라며 충격과 분노를 드러냈다.
이들은 2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에 의해 짓밟힌 청춘에 대한 권리 구제를 평생 동안 기다리던 피해자들의 염원을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한 사법부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아니"라며 사법부를 규탄했다. 이어 "더욱이 이 재판을 두고 사법부와 재판을 거래한 외교부는 어느 나라 외교부인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한심하고 슬프고 참담하다. 외교부는 우리나라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의 지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며 "내가 무엇 때문에 일본을 상대로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30년 동안 투쟁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피해자들은 △사법부는 강제동원 소송에 부당하게 개입한 것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새로운 재판부를 구성하여 신속하고 공정한 심리를 진행하여 판결할 것, △외교부는 사법부, 김앤장과 결탁하여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재판 거래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것, △검찰은 강제동원 소송을 둘러싸고 재판 거래를 실행한 전 법원행정처 심의관 박찬익, 재판에 개입한 대법관 등 사법부 관계자, 외교부 관계자, 김앤장, 그리고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할 것, △국회는 강제징용 소송에 대한 사법부와 외교부의 재판 거래에 대해 국정조사를 실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같이 강제 징용 사건의 재판 거래 의혹이 번지는 가운데, 대법원은 이날 접수 5년 만에 해당 사건을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심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5년 간 침묵하다가 재판 거래 의혹 문건이 발견된 후에야 이같은 결정이 내려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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