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눈물' 시대의 자화상 조혜정, 1976년 올림픽 영웅을 기리며

[이종성의 스포츠 읽기] 11시간 훈련과 화장실 쪽잠으로 이룬 '나는 작은 새' 영예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대회로 기억된다. 주경기장은 올림픽 개막일까지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은 탓에 몬트리얼은 올림픽이 끝난 뒤 30년이 지난 후에야 모든 부채를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몬트리얼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가 비약적 성장을 하는 데 중요한 서막이었다. 4년 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이 사격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자 한국 정부는 몬트리얼 올림픽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스포츠 남북 대결에서의 승리가 국가 안보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따냈다. 레슬링 양정모의 금메달과 함께 한국 선수단은 은메달 1개와 동메달 4개를 따내며 한국 스포츠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일본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가능하다"

이 때 한국이 따낸 메달 가운데 여자 배구 동메달도 있었다. 한국은 1964년 일본 여자배구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1972년 올림픽에서 일본 남자 배구가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배구를 올림픽 전략종목으로 키우려는 노력을 했다. 한국 선수들과 체격조건이 비슷한 일본 선수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해 볼만 하다라는 생각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한국 배구 중흥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1969년에 대한배구협회 회장에 선임된 이낙선이 있었다. 이낙선은 제2군 사령부 소령 신분으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시절 국세청장과 상공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국세청장 시절 무질서와 부패로 점철됐던 세정을 바로 잡아 2000억 원의 세원을 확보하는 공적으로 경제개발에 시동을 걸던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이낙선에게 대한배구협회장 자리가 맡겨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만큼 배구를 한국의 유망 종목으로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극한의 스파르타 훈련이 만든 올림픽 동메달

한국 여자 배구는 1973년 월드컵 여자 배구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 때 한국의 조혜정(1953~2024)은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이미 1970년 고교생으로 국가대표팀에 뽑혔던 조혜정은 단신(164cm)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서전트 점프 능력(68cm)으로 상대 코트 빈 곳을 노리는 정밀 타격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녀는 체공 시간(공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 네트 위에서 변화무쌍한 공격을 펼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나는 작은 새’란 별명을 얻게 됐다.

한국 여자 배구는 이 당시 세계 최강 일본 여자 실업 팀과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이낙선 대한배구협회장은 국내 스포츠 종목 단체 가운데는 이례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해 거액의 기금까지 조성했다.

국제무대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판단 속에서 한국 여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전지 훈련까지 실시했다. 이 전지 훈련에는 1964년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 놓은 스파르타 훈련의 대명사 다이마츠 히로후미 감독이 참여했다.

다이마츠 감독이 지휘하는 훈련은 혹독했다. 너무 지쳐 연습 중에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몰래 화장실로 숨는 선수가 있었을 정도였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화장실로 피신한 선수 중 한 명은 조혜정이었다. 5분 간 화장실에서 잠이 들었던 그녀는 나중에 "이 때가 내 평생 가장 단잠을 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숱한 어려움을 헤치며 몬트리얼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여자 배구 팀은 유니폼 속에 부적까지 넣었다. 단 하나의 올림픽 메달이라도 너무나 소중했던 한국 스포츠는 이들의 선전을 애타게 기원했다. 심지어 대한체육회 김택수 회장은 여자 배구 팀을 위해 블로킹 연습 때 볼까지 띄워주는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의 노력은 물론 주변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한국 여자 배구는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은 장신군단 헝가리를 제압했다. 선수들은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조혜정은 이 당시를 이렇게 회고 했다.

"꿈에 그리던 동메달이기도 했지만 지긋지긋한 지옥훈련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 올림픽에 출전한 조혜정 선수가 공격하는 모습 ⓒ대한배구협회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거울 '나는 작은 새' 조혜정

31일 71세의 나이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조혜정이 남긴 말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부분은 유난히 몬트리얼 올림픽을 앞두고 펼쳐졌던 스파르타 훈련과 관련된 게 많다.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표로 했던 여자 배구 대표팀은 하루 11시간의 강훈을 견뎌야 했다. 오전 6시30분에 운동화를 신으면 밤늦게 숙소에 돌아갈 때까지 벗지 못했던 셈이다.

한국은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쿠바를 세트 스코어 3-2로 누르고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일본에 0-3으로 완패했다. 일본은 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조혜정은 이 결과에 대해 “나중에 일본은 하루 13시간씩 연습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연습시간 2시간 차이가 금메달(일본)과 동메달(한국)로 나타난 셈이죠”라고 말했다.

이런 혹독한 지옥 훈련은 지금 같으면 불가능하다. 오히려 절대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선수 혹사나 인권 문제로 호된 사회적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스파르타 훈련은 1970년대 한국 사회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무대에서 알아주는 곳이 거의 없는 '듣보잡' 국가였으며 기술력과 자본력이 부족해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경제를 꾸려나가야 했다.

장시간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서민들의 땀과 눈물은 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단신임에도 불구하고 신기의 기량을 선보이며 한국 여자 배구를 이끌었던 ‘나는 작은 새’ 조혜정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거울이었다. 매일 11시간 훈련을 통해 다져진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코트에 몸을 던지며 땀을 쏟아야 했던 이들의 선전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1970년대 한국 사회는 핸디캡을 무릅쓰고 이변을 만들어야 했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여실히 보여줬던 조혜정과 1976년 여자 배구 대표팀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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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프레시안> 스포츠 전문기자 시절, 스포츠와 사회·문화·역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에 주목했던 언론인 출신 학자다. 이후 축구의 본고장 영국으로 건너가 드몽포트대학교에서 '남북한 축구사'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야구의 나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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