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보정당의 대들보를 잃었다

[추모사] 고인은 갔지만 진보정치는 더 강하게 꽃피워야

노회찬 의원이 별세했습니다. 향년 62세.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헌신하다 검거된 뒤 법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하게 외쳤던 걸출한 노동운동가를, '삼성 X파일'을 앞장서 파헤치며 "이건희 회장은 검찰의 다이아몬드 회원이냐"고 일갈했던 진보정치인을 허망하게 잃었습니다.

대중적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스타 정치인이었으되, 고되고 외로웠을 고인의 생을 뒤늦게 돌아봅니다. 고인과 함께 진보정치의 외길을 걸어온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프레시안에 추모사를 보내왔습니다. 진보정치의 대들보를 잃은 슬픔을 넘어, 고인이 씨앗을 뿌린 진보정치를 꽃피워야 할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을 되새깁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

이게 웬 청천벽력입니까?

진보정당의 불모지대인 우리 땅에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싸워 온 외로운 진보투사 노회찬 의원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몇 달 전 내 정년퇴임 기념 출판기념식에 와 축하를 해주며 "조만간 따로 만나 한잔하시지요"라고 약속하고도 바쁜 일정으로 만나지 못했는데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되다니,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 이제 제4기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시기는 일제와 해방공간에서 조선공산당 등 민족해방운동과 결합한 좌파운동이 진행된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흐름은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처절하게 패배합니다. 두 번째 시기는 4.19 이후의 시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다양한 진보정당이 생겨나 선거에서 선전하고 원내에 진출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실험은 5.16 쿠데타에 의해 끝나고 맙니다. 세 번째 시기는 87년 민주화 이후의 시기로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통합진보당 사태로 끝나고 이제 새로운 시기(제 4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제 3기와 4기, 즉 87년 민주화 이후의 진보정당 운동은 노 의원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대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이 보수 야당을 지지할 때 일관되게 독자 후보와 진보정당을 지지하며 외로운 길을 걸어온 투사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노동자 계급의 독자 정당을 주장했고 87년 대선에서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본격적인 진보정당 운동인 '국민승리21'을 조직하고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이후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마지막 번호로 당선되어 '진보정치인 노회찬 시대'를 열었습니다.
지금도 2004년 총선의 개표방송을 밤새고 보던 감격이 떠오릅니다.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마지막 의석을 노 의원이 차지하느냐, 아니면 자민련의 김종필이 차지느냐가 결정되는 것이었는데 극적으로 노 의원이 마지막 의석을 차지할 때의 감격이란! 노 의원은 이 승리를 통해 4.19 이후 살아났던 진보정당을 무력으로 학살한 김종필에 대해 복수를 하고, 위기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온 그를 영원히 한국 정치에서 은퇴시켜 버렸습니다.

원내 진출 후 그는 탁월한 의정 활동과 촌철살인의 입담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진보정당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의 길은 외롭기만 했습니다. 보수의 벽에 부딪혀 2008년 총선 때 노원에서 출마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패배해 다시 낭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노 의원은 진보진영 내에서도 소수파였습니다. 한국 진보진영의 다수파가 민족문제를 중시하고 '친북적'이라는 평을 받는 '민족해방파(NL)'이었던 반면에 노 의원은 북유럽식의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소수파였습니다. (그 점에서 그는 나와 함께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였습니다. 즉 이제는 바뀌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주류가 반공세력이고 민주화세력이 비주류라면 자유주의세력이 비주류 내에서 주류고 진보세력은 '비주류의 비주류'였는데 그 진보세력에서도 주류는 NL이고 노 의원 등은 진보 속에서도 소수파인 비주류, 즉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였습니다) 그 결과 당내 이념 갈등 속에서 심상정 의원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의 시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당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인으로서 통합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절실히 실감하고 심상정 의원과 함께 자신들이 만든 진보신당을 탈당해 이정희의 민주노동당,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노원에서 승리해 다시 원내로 진출했지만 '삼성 X파일' 문건을 폭로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박탈당했습니다(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를 얼씨구나 하고 꿰찬 것이 바로 안철수였습니다). 게다가 노 의원은 통합진보정당 합류로 원내 진출에는 성공하지만 진보신당을 떠났다는 이유로 옛 동지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고 통진당 역시 내분으로 궤멸하고 말았습니다.

노 의원은 비극적으로 끝난 제 3기 진보정당의 실험 속에서 정의당을 추슬러 진보정당 운동 재건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정의당이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진보결집 플러스와 통합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발돋움하자(나 역시 국민모임을 통해 정의당에 합류하여 내 생애 처음으로 당적을 갖게 됐습니다.) 노동자 지역인 창원에 내려가 승리했습니다. 이후 정의당의 원내대표로 맹활약하던 중,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지 않고 후원금을 받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비극적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불모지에서 자신이 평생을 걸고 건설해온 진보정당과 진보정치 세력이 자신으로 인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진보정당이 도약을 시작하는 때에 그 핵심 지휘관을 잃어버리게 되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구체적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노 의원의 비극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조차도 돈을 필요로 하는 한국 정치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비극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금전만능의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진보정당조차도 돈을 필요로 하는 우리 정치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보정당의 큰 대들보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는 갔지만 그가 뿌리내려놓은 진보정치는 더욱 강하게 꽃 피워야 하고 또 꽃 피울 것입니다. 그에 대한 최고의 추모는 그가 꿈꾸었던 강하고 튼튼한 진보정당을 통해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부탁처럼 그의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강한 진보정당은 필요한 만큼 정의당은 계속 지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뛰어난 진보정치인이기 이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촌철살인의 정치평론가였고 첼로를 켜고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문학가였습니다.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이 '르네상스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소탕한 성격에다가 두주불사의 술꾼이었습니다.

그동안 노 의원과 나는 한국사회의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인 진보정치인과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쥬류'인 진보정치학자로 만나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술잔을 함께 했습니다. 사실 내가 노 의원보다 나이도 많고 선배인데 나를 두고 먼저 떠나다니,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의 뛰어난 재담과 소탈한 웃음, 르네상스적인 재능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노 의원, 잘 가세요. 그리고 머지않아 저 먼 나라에서 다시 만나 우리가 만나면 늘 즐겨 마시던 폭탄주 한잔합시다. 그때까지 하늘나라 진보정당 만들면서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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