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변(around)에는 항상 성 소수자, 퀴어(queer)가 있습니다."
성 소수자는 잘 보이지 않는 존재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다.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비난받는다.
14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올해로 열아홉 번째다. 열아홉 해가 지날 동안 성 소수자들은 이 사회에서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이러한 의미를 담아 올해 축제 슬로건으로 '퀴어라운드(Queeround)'를 내걸었다. '당신의 주변(Around)에는 항상 우리 성 소수자(Queer)가 있다'는 뜻이다.
2018년에도 여전히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이웃들로부터 배척당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든, 혹은 성조기를 든 누군가로부터 조롱당하고 손가락질당했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서울 시청광장 맞은편의 덕수궁 앞에 모인 시민들은 "동성애는 다른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욕망'", "동성애는 에이즈의 원인"이라며 성 소수자 반대를 외쳤다.
혐오의 힘은 거대했다. 그러나 혐오에 맞서는 힘은 더욱 컸다. 성 소수자, 그리고 성 소수자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기 위해 더 많은 인파가 서울 시청광장을 메웠다.
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00년 50여 명으로 시작한 축제는 2015년엔 1만 5000명, 2016년 3만 명, 지난해는 5만 명이 함께하는 대형 행사로 발전했다. 강명진 조직위원장은 "올해 역시 지난해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은 개인의 당연한 욕구"라며 "더 이상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다는 성 소수자들의 의지가 행사 참여 확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슬로건 '퀴어라운드'는 '이제 퀴어(Queer)의 라운드(Round)가 시작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혐오에 맞서는 세력은 점점 더 힘을 키워가는 중이다.
'무지개 현수막' 건 인권위-미국 대사관
이날 축제에는 다양한 이들이 성 소수자의 이웃으로 참여했다. 조계종,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주노총, 한국여성민우회, 대학 내 성 소수자 동아리, 지역 커뮤니티 등 총 105개 단체가 시청 광장에 부스를 차렸다.
미국, 캐나나,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영국 등 13개국의 한국 주재 대사관들과 주한유럽연합(EU) 대표부 등 각국 정부기관도 참가했다. 캐나다 부스 운영진은 이날 부스 앞에서 SNS '인스타그램' 인증샷을 유도하는 포즈로 눈길을 끌었다.
미국 대사관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대사관 건물에 무지개 현수막을 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사관 측은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성 소수자의 기본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인권, 시민단체와 연대해 대사관 건물에 #LGBTI #프라이드 배너를 걸게 됐음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 기관 가운데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유일하게 참여했다. 인권위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광장에서 부스를 운영했다. 인권위는 부스에서 인권 타투 부착 등 이벤트를 열고 '국가인권위원회에 바란다' 게시판을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받았다. 시민들은 인권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스트잇에 적었다. "정부 부처 중 유일한 참가 부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힘써주세요", "인권위, 여기서 만나 반가워요. 우리 함께해요!" 등 인권위의 퀴어문화축제 참가를 반기는 의견이 다수였다.
인권위는 미국 대사관과 마찬가지로 서울 중구 청사에 성 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현수막을 걸었다. 인권위는 페이스북에 무지개 현수막 사진을 올리며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맞이하여 성 소수자 인권 증진과 혐오표현을 개선하기 위한 인권·시민사회단체에 지지와 연대의 의미로 국가인권위원회 청사에 #LGBTI #프라이드 무지개 배너를 걸었다"고 설명했다.
광장 한쪽에서는 '암스테르담 레인보우 드레스' 전시가 열렸다. 이 드레스는 동성애를 범죄로 간주해 구금 등의 처벌을 하는 80개국의 국기로 만들었으며 해당 국가에서 처벌법이 폐지되면 국기는 레인보우기로 바뀐다. 또, 50미터 길이의 대형 무지개 깃발을 광장에 펼치는 이벤트도 진행됐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퀴어퍼레이드는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됐다. 퀴어 퍼레이드는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도심을 누볐다. 퍼레이드는 서울광장에서 출발해 을지로입구, 종각, 종로2가, 명동을 거쳐 다시 서울광장 경로로 진행될 예정이다.
강 조직위원장은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고 사회에 드러내는 것, 즉 사회에 가시화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시화되지 않으면 잊히기 마련이고 누군가에겐 '나타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성 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퀴어문화축제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 성 소수자 반대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누구나 의지와 신념이 있지만 그것을 타인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선 안 된다"며 "내 생각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이의 생각도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청와대 "퀴어 축제, 청와대가 금지할 권한 없어"
행사 개회에 앞서 축제 자체가 무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지난달 14일,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퀴어문화축제 반대하는 청원글이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 그러나 청와대는 지난 13일 "서울광장 사용 여부는 청와대가 (사용을) 허가하거나, 금지하거나, 저희가 관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 측은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행사 내용에 문제의 소지가 있을 땐 서울시 조례에 따라 열린광장 운영 시민위원회(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돼 있다. 퀴어 행사의 경우에는 2016년, 지난해, 그리고 올해도 최근 위원회 심의를 거쳤다. 위원회에서는 퀴어 행사가 서울광장 사용에 있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서울시가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고, 이날 행사는 무사히 치러졌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