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은 사람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한정된 인체 자원이다. 부족하다고 해서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으며, 질병 감염 위험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도 없는 재원이다. 혈액의 안전하면서 안정적인 공급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라는 점에서 혈액사업의 최종 책임은 국가가 져야 한다.
우리나라도 혈액사업의 명목상 주체는 국가다. 하지만 1981년 이후 정부는 대한적십자사에 혈액사업을 위탁해왔다. 그런 가운데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혈액사업 관리 업무가 정부 내에서도 분산돼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제대로된 관리, 감독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187개 세계적십자연맹 회원국 가운데 적십자사가 채혈부터 공급까지 혈액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11%(21개국)에 불과하다. 이런 '독점' 상황에서 2003년 수혈 감염 에이즈 발생, 2005년 에이즈 감염 혈액 수혈, B형 보균자 혈액 수혈, 2011년 청주혈액원 헌혈자 사망 사고, 부산 혈액원 혈액보관 사고, 2014년 혈소판 수혈로 인한 감염 후 패혈증 사망 사고, 2016-18년 적십자사 면역검사시스템, 혈액백 입찰 논란 등 사고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전체 수혈자의 70% 이상이 10-20대 수혈자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혈액 부족 사태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가 주도의 새로운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전문가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국가주도의 혈액원 설립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논의됐던 과제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국가 혈액사업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10일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 주최로 열린 "국가혈액관리,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차영주 중앙대학교 교수는 "적십자사 혈액사업 위주에서 국가 혈액 관리 체계로 전환 필요하다"면서 "국가 혈액 사업 컨트롤타워로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서 활동하는 전문기관 설립이 적절하다"며 재단법인 형태로 국가혈액안전관리원(가칭)을 설립을 제안했다.
국가혈액안전관리원(가칭)은 ▲상설기구로서 혈액관리위원회를 보좌하고 ▲공급혈액원의 혈액 수급 및 질 관리 정책 총괄 ▲의료기관과 연계해 수혈관리 수행 ▲미래수요대비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혈액.수혈 연구 지원 등을 맡아야 한다고 차 교수는 제안했다. 설립의 법적 근거는 혈액관리법을 일부 개정하여 마련하고 운영재원은 각 공급혈액원 당 운영분담금 징수 또는 헌혈환부적립금을 활용하자고 덧붙였다.
"유시민 장관 때 적십자사로부터 혈액사업 환수 결정했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황유성 한마음혈액원 원장은 2004년 국무조정실 혈액안전관리개선기획단에서 혈액안전개선종합대책이 마련됐으나, 10여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을 것에 대해 되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 원장은 "현 시점에서 보면 2004년 대책이 충분하지 않고 부분적이었으며, 안이하고 오류도 있었다"며 "또 그 대책을 진실하게 추진하고 지속적으로 평가, 수정, 보완, 확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던 적십자사 본사로부터 혈액사업 부문을 독립시켜 법인으로 반드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점에 모두가 공감했는데도 불구하고 적십자사 내부에 혈액사무총장을 두어 전문성을 확보 유지하는 안을 1안으로 제시했다. 일단 그렇게 하고 3년 후에 평가를 해서 흡족치 않으면 그때 가서 혈액관리법인을 분리, 독립시키는 것으로 권고했는데 1년도 안 지나서 적십자사는 혈액사무총장 신설안을 중지시켰고, 일반사업과의 인사 교류 중지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정부(노무현 정부 유시민 장관)는 한완상 당시 적십자사 총재와의 교감 하에 적십자사로부터 혈액사업을 환수하기로 결정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2007년 10월 국립혈액권리원을 설립하는 혈액관리법 개정안이 제출했으나, 보건복지위 소속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2008년 17대 국회 임기만료와 함께 자동폐기됐다."
"복지부, 전문성 없어서 적십자사를 관리.감독 못해"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는 "혈액사업이 국가가 해야하는 일이라는 경각심을 줘야 한다"며 정부의 순환근무제에 대해 문제를 지적했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적십자사에 위탁해서 운영하고 있고 복지부에서는 이를 담당하는 생명정책과가 있다. 그러나 생명정책과장은 해야할 열개 일 중 한개가 혈액사업이고, 그 아래 사무관 1명, 주무관 1명이 혈액사업의 실무를 맡는다. 이들이 2년마다 순환근무를 한다. 복지부 내에서 관리감독을 해야할 사람들이 혈액사업의 내용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 수가 없다. 혈액사업의 모든 내용, 자료 등이 적십자사 내부에서 만들어져 올라온다. 이처럼 국가가 혈액사업을 관리, 감독할 능력이 애초에 없기 때문에 관리가 안 된다. 국가가 혈액사업의 관리 책임자였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면 관리체계가 변경되야 한다."
서울대학교 박경운 교수는 "혈액사업의 목표는 제로 리스크"라면서 "과연 우리나라 국가체계는 이를 뒷받침할 시스템을 갖고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혈액 관리 리스크를 관리할 기구가 있나? 특히 알려지지 않은 리스크에 대해 관리되고 있는가"라며 현재 혈액관리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국립암센터 김영우 교수는 "혈액안전관리원 설립을 찬성하지만 재단이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국가가 해야 한다"며 "법적 근거도 현재 공급 위주의 혈액관리법이 아닌 환자 위주의 관련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명한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장은 "현재 정부 조직이 3곳으로 분산되어 관리하는 것을 통합한 컨트롤타워를 창설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며 "국무조정실 소속 정부기관으로 창설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현재 적십자사 업무와 관련해 면역시스템 입찰이나 혈액백 입찰에 논란이 있는데, 우리는 국가계약법과 교과서 나오는 방법에 입각해 입찰을 했다. 그런데 탈락한 업체들에서 문제를 제기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재단이 컨트롤타워일 경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겠냐"고 주장했다.
한편, 토론회 청중 중에서 적십자사 노조 관계자들이 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단체 관계자의 발언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면서 토론회 마지막은 고성이 오가는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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