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 팔다가 역사를 바꾸다
차와 커피를 파는 장사꾼이 역사책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드물다. 대개 "올해는 찻잎 작황이 좋지 않았다" 정도로 끝난다. 그런데 1732년 영국 요크에서 태어난 윌리엄 튜크(William Tuke, 1732~1822)는 찻잎을 팔다 말고 정신병원의 풍경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장부에는 이윤이 남지 않았을지 몰라도, 역사에는 이름이 길게 남았다.
튜크는 퀘이커 집안에서 자랐다. 퀘이커는 조지 폭스(1624~1691)가 시작한 신앙 모임으로,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신의 빛을 지녔다고 믿는다. 신분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믿음을 끝까지 밀고 가면 불편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정신이 아픈 사람 안에서는 그 빛이 꺼졌을까? 튜크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이 단순한 대답이 당시에는 꽤 과격했다.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
그때 영국의 정신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웠다. 런던의 베들레헴 병원은 18세기 중반까지 푼돈을 받고 구경꾼을 들였다. 환자를 놓고 입장료 장사를 한 셈이니, 요즘 말로 하면 동물원보다 고약한 동물원이다. 환자는 쇠사슬에 묶이고 매를 맞았다. 치료는 일단 묶어놓고 보는 일이었고, 차도가 없으면 더 단단히 묶었다.
영국 국왕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도 이 치료를 비켜가지 못했다. 1788년 무렵 병이 깊어지자 왕을 맡은 의사 프랜시스 윌리스(Francis Willis, 1718~1807)는 왕에게 구속복을 입혔다. 묶는 일에는 신분차별이 없었던 셈이니, 평등의 기묘한 사례라 하겠다.
한 여인의 죽음
튜크를 움직인 것은 1790년 요크 정신병원에서 숨진 한 퀘이커 여성이었다. 튜크는 병원을 찾아가 눈앞의 참상에 크게 놀랐다. 놀라는 데서 그치지 않은 것이 튜크의 별난 점이다. 1792년 봄 그는 퀘이커 모임에 호소해 정신이 아픈 사람을 사람답게 돌보자고 청했고, 돈을 모았다. 그렇게 1796년 요크 요양원(York Retreat)이 문을 열었다. 영국에서 처음 나온 이런 곳이었다.
방식은 단순했다. 쇠사슬을 풀었다. 쾌적한 터에 집을 짓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였다. 일할 거리를 주었다. 텃밭을 가꾸고 바느질을 하게 했다. 찻집 주인답게 환자와 직원이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도 마련했다. 다른 병원이 사슬을 짤랑거릴 때 이곳은 찻잔을 짤랑거렸으니, 소리부터 달랐다. 이를 '도덕적 치료'라 부른다. 환자를 평등한 인간으로 대하고 부드러움과 존중으로 다스리며, 사람 사이의 관계와 쓸모 있는 일과 좋은 환경을 약으로 삼는 방법이었다.
바다 건너의 동무, 서로 모르는 사이
같은 무렵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필리프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이 1793년께 파리의 병원에서 환자들의 사슬을 풀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채 같은 결론에 닿았다. 좋은 생각은 꼭 서로 알려주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터지는 모양이다. 나쁜 생각이 대개 같은 모임에서 함께 꾸며지는 것과 대조된다.
가문으로 이어진 불씨
튜크의 일은 집안 대대로 이어졌다. 아들 헨리 튜크(Henry Tuke, 1755~1814)는 요양원을 함께 세웠다. 손자 새뮤얼 튜크(Samuel Tuke, 1784~1857)는 1813년 『요양원 설명』(Description of the Retreat)을 써서 당시 정신병원의 학대를 고발하고 도덕적 치료의 원칙을 세상에 알렸다. 증손자 제임스 해크 튜크(James Hack Tuke, 1819~1896)는 요양원을 거들다가 아일랜드 대기근 구호에 힘을 쏟았다. 그의 아우 대니얼 해크 튜크(Daniel Hack Tuke, 1827~1895)는 1858년 『정신의학 편람』(A Manual of Psychological Medicine)을 함께 써서 이름난 의사가 되었다. 찻집 하나가 4대에 걸쳐 병원과 구호와 학문을 낳았으니 가업치고는 꽤 알찬 가업이다.
물론 요양원을 마냥 칭송할 수만은 없다. 후대 학자들은 도덕적 치료가 환자를 아이처럼 대하는 간섭이었고, 수치심과 규율로 사람을 길들였다고 비판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래도 사슬을 풀었는지 여부가 갈라놓은 선은 깊다. 요양원이 보여준 방향은 이후 정신질환자를 사람으로 대하는 흐름의 밑거름이 되었고, 환자와 함께 사는 치료 공동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국이 얻을 것, 사슬은 풀렸는가?
한국에는 튜크가 마주친 장면과 닮은 기록이 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부랑인'으로 몰린 사람들이 끌려가 갇히고 맞고 일했으며,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판단하는 쪽이 "저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았다. 낙인이 곧 자물쇠였다.
제도는 바뀌었다. 2016년 헌법재판소는 보호자 두 사람의 동의와 의사 한 사람의 진단만으로 사람을 강제로 입원시킬 수 있게 한 옛 정신보건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듬해 법이 고쳐졌다. 그러나 병원에 오래 머무는 기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을 크게 웃돈다는 지적은 여전히 나온다. 병원이 아니라 마을에서 돌보는 길은 아직 좁다. 자살률이 회원국 가운데 줄곧 윗자리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마음의 병을 숨기게 만드는 낙인은 크나큰 비용이다.
튜크에게서 챙길 것
첫째, 강제로 가두는 문턱을 더 높여야 한다. 둘째, 병원 중심에서 지역 중심으로 무게를 옮겨야 한다. 튜크의 요양원은 마을 바깥의 큰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작은 집이었다. 셋째, 민간의 선의에만 기대지 않고 공공이 돈과 감시를 책임져야 한다. 튜크는 퀘이커 모임의 돈으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나라가 마땅히 맡을 몫이다. 넷째, 환자와 가족이 직접 목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
마지막 하나는 말 습관이다. 정치판에서는 상대를 "미쳤다"고 몰아붙이는 일이 흔하다. 1980년 5월 광주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의 밤을 지나온 시민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 아픔을 정치의 욕설로 되받는 풍토는 낙인을 키울 뿐이다. 아픈 이를 손님으로 모시지 못하는 사회는 정치도 손님으로 모시지 못한다.
사슬은 눈에 보이는 쇠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과 제도로 옮겨갔을 뿐이다. 찻잔을 건네는 쪽이 사슬을 짤랑이는 쪽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튜크는 90평생으로 보여주었다. 형제복지원에서 스러진 이들에 대한 책임에도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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