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 자리조차 없애겠다고?"
교육부의 '혐오·차별 대응 가이드북'에서 성소수자 관련 사례만이 아니라 모든 용어까지 삭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성소수자부모들이 자녀의 커밍아웃 경험을 담은 책 <커밍아웃스토리-성소수자와 그 부모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하늘 씨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늘 씨는 게이인 아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다니던 성당의 아무도 없는 구석진 지정석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구석은 피난처이자 쉴 곳이었다. 교육부는 그 구석마저 없애겠다는 듯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유령 취급, 성소수자 존재 부정이다.
가이드북은 배재고 야구부의 5.18 민주화운동 조롱 사건 이후 학교 현장의 혐오·차별을 바꾸겠다는 목적으로 추진됐다. 그런데 어떻게 성소수자만을 뺄 수 있을까.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차별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성소수자 454명 중 71.1%가 교사로부터 혐오 표현을 들었고, 87.0%가 또래 학생으로부터 혐오 표현을 들었다. 이런 현실에서 혐오 대응이 되겠는가. 성소수자 혐오는 용인하겠다는 말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성소수자 배제가 문제되자 교육부는 '반대 민원' 때문이라는 변명을 냈다. 민원이 혐오를 방조하는 방패막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혐오·차별은 민원이 아니라 그저 혐오·차별일 뿐이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를 못하는 정부
다행히 시민사회 비판으로 가이드북 발표는 보류됐다. 교육부는 추가 검토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선 안 된다. 아직도 많은 공공기관, 국가기관에서 성소수자 혐오를 방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은 교육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성소수자 혐오 사례를 증언했다. 전교조 서울지부 중등남부지회에서 서울시교육청과 연수를 개설하려고 했는데, 서울시교육청에서 '젠더', 'LGBTQ',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용어가 사회적 합의가 안 된 사안이니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고 "편향성 논란"을 예방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립적 용어가 가능하기나 한가. 성소수자 존재를 지우라는 뜻이다. 정체성을 숨기게 하는 교육은 불평등과 편견, 혐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숨겨진 자들의 권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혐오 대응은 성소수자 인권 교육과 같이 가야 한다.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인식하는 시기에 성소수자 인권 교육은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숨지 않을 언덕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학우들의 정체성을 긍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성소수자는 낯선 존재가 아니라 친근한 존재이자 자신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학생 때부터 교육과정에서 연결의 경험을 한다면 성소수자 혐오에 대한 대응도 효과적일 수 있다.
성소수자 혐오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 혐오는 비단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소수자 혐오의 말과 행동이 넘친다. 그런 점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교육부만이 아니라 이재명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퇴진광장 덕에 들어설 수 있엇다. 당시 얼마나 많은 성소수자들이 광장에 있었는지는 발언과 깃발에서도 드러난다.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발언했고, 많은 무지개 깃발이 광장에 펄럭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연대의 광장에서 서로 낯선 존재들을 환대했던 경험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성과 환대, 공존의 민주주의는 인수하지 않는다니 답답할 뿐이다.
나는 특히 남태령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보여줬던 태도를 정부는 배워야 한다. 남태령에서 윤석열 퇴진을 걸고 서울로 행진하던 농민들의 트랙터가 가로막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가서 지켜줬다. 그때 한 농민이 "딸들아 고맙다"고 했더니, 그들은 "사실 저희 딸 아닌데요"라며 논바이너리 깃발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농민은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모르더라도 인정할 수 있고 배우려는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답이다.
공존과 다양성이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성소수자는 삭제하고 지역혐오만 반대한다는 것은 혐오·차별 대응이 아니라 혐오·차별 조장이다. 혐오·차별 대응의 첫발은 소수자에 대한 긍정임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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