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표적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전쟁에서 가장 먼저 폭격해야 할 곳은 활주로와 레이더 기지, 탄약고, 지휘소, 발전소 같은 곳이었다. 지금 그 목록에 새로운 시설들이 추가되고 있다. 반도체 공장과 초대형 데이터센터, AI 컴퓨팅 클러스터다.
미국·이란 전쟁은 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4월 6일, 테헤란의 샤리프 공과대학교가 미군과 이스라엘군의 폭격을 받았다. 미국은 민간시설인 교육기관이 공격 대상이 된 것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 마수드 타지리시 샤리프 공대 총장이 힌트를 줬다. 이 대학은 지난 2년간 페르시아어로 인공지능 모델 학습을 진행해 왔고 수백 개의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고 했다.
이란은 미국이 '프로젝트 메이븐'이라는 AI 시스템을 이용해 공격에 나서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아랍 에미리트(UAE)에 있는 AWS 데이터 센터를 공격했다. 관련해 미국의 인공지능(AI) 의존 시스템의 위험성과 함께, 군이 상업용 클라우드 인프라에 의존하는 취약점을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이버 공격대가 모바일 앱과 데이터 인프라를 표적으로 삼았을 때, 이란 역시 미국의 데이터 센터 타격 계획을 세웠다. 이제 데이터센터의 민군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클라우드와 AI 연산능력이 군사 작전에 이용되는 순간, 데이터센터 등 AI 관련 시설은 상대국의 눈에 전략시설이 된다.
한국에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가 지난 6월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의 세 축은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다. 정부 스스로 이것을 대한민국이 AI 시대의 산업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국가전략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면서 입지 문제, 에너지 수급 문제, 환경 문제 등을 주로 언급하는데, 하나가 빠져 있다. 안보 문제다. 한국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수백조 원을 들여 구축할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는 '국가의 미래 먹거리'인 동시에, 전쟁 위협이 고조될 경우 '안보 불안 요소'에 극도로 취약해 질 수 있다. 고대로부터 평화는 '먹거리'를 안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AI 전략에는 방공망과 사이버보안, 시설 분산과 비상전력 체계뿐 아니라 한 가지가 더 포함돼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 자체가 발생할 확률을 낮추는 전략이다. 평화정책과 산업정책을 별개의 문제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는 이제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반도체 생산라인과 AI 데이터센터를 지키는 문제인데다, 나아가 수천조 원의 장기투자가 지정학적 위험 때문에 좌초하지 않도록 만드는 경제 안보 정책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걸 남북 문제에서 활요해보자. 이젠 한반도 긴장 완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AI에 투자하려면 평화에도 투자해야 한다'
마침 한반도에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훈련이 절반 가량 취소됐다. 이례적인 정도가 아니라, 생전 겪어 보지 못한 초유의 일이다. 지구 상에서 한미연합훈련을 사실상 중도 취소할 수 있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 일이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는 이 결정을 설명하며 김정은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그는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고, 심지어 한미연합훈련이 김정은에게 "모욕적"일 것이라는 표현까지 했다. 이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트럼프가 참모들에게 이르면 올가을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11월 중국 APEC을 계기로 한 만남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북한의 반응도 이례적이다. 지난해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한 빈도, 수위 등에 비춰보면, 이미 예고된 올해 을지프리덤실드(UFS)에 대한 비난 수준은 확연히 줄어든 게 느껴진다. 이런 모든 정황을 놓고 보면 북미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트럼프 행정부가 정상외교를 재개할 공간을 만들고 있으며 북한 역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충분히 합리적이다.
그런데 정치적 맥락을 거세하고 관성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트럼프의 조치에 대해 "한미동맹의 파탄"이라고 규정했다. 누가 보면 한미연합훈련 축소를 획책한 사람이 이재명 대통령인 줄 알 것 같다. '윤어게인'을 외치던 손현보 목사가 트럼프와 만났을 때 환호하던 사람들이 지금 다시 인지부조화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새다. 이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관성적인 '한미동맹 파탄'이나 '위장 평화쇼' 같은 낡은 프레임이다.
그러나 '낡은 프레임'일지라도 경계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 유일하게 귀담아 들을만한 것이 '한국 패싱'에 대한 우려인데,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필요하다. '국민적 지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프레임을 내놓고 국민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평화를 '진보의 가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산을 지키는 정책'으로 설명하면 어떨까.
2018년 판문점 정상회담 직후 한 여론조사에서는 회담 결과에 대한 긍정 평가가 88.7%에 달했다. 외교는 대통령 혼자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국내 정치적 지지가 강한 정부는 외교협상에서도 움직일 공간이 커진다. 반대로 국내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담론이 극단적으로 양분돼 있다면 미국 역시 한국 정부가 합의를 지속적으로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재명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은 평화의 언어를 확대하는 일이다. 긍정적 프레임을 확산시키자는 것이다. 과거처럼 평화를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관성적 언어로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용인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키기 위해 평화가 필요하다', '호남과 영남에 들어설 AI 데이터센터를 지키기 위해 평화가 필요하다', '수천조 원의 기업투자가 지정학적 위험 프리미엄 때문에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평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적극 펼치면 좋을 것 같다.
전쟁위험이 높아지면 방위비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보험료가 오르고 금융비용이 증가하고 글로벌 기업의 투자 판단이 달라진다. 실제 이란의 데이터센터 공격 이후 중동의 AI 투자에 대해서도 보험료와 지정학적 위험 프리미엄 상승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위해서라도 평화는 필요하다는 논리를 통해 국민을 설득한다면, 오로지 북한과 '적대적 대결'로만 정치적 생명을 운위하려는 사람의 프레임을 꺾을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패싱'당할 일 없도록,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페이스메이커'가 되기 위해 국민을 설득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먹고살 산업을 지키는 것이 평화이고, 안보라는 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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