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마다 반복되는 뉴스가 있다. 밭에서 일하던 노인이 쓰러졌다는 소식,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가 숨졌다는 소식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7월 4일 충북 괴산에서 풀베기 작업을 하던 20대 베트남 노동자가 숨졌고, 7월 25일에는 전남 해남의 밭에서 일하던 30대 태국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특히, 태국 노동자는 한국에 입국한 지 사흘째로, 발견 당시 체온은 43도였고 그 지역에는 폭염경보가 내려져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유난히 더운 여름이라는 한 문장과 함께 뉴스에 오르고, 또 잊혀지길 반복한다. 알려져있다시피, 폭염은 자연현상이지만, 폭염으로 인한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얼마나 오래 열에 노출되는지, 노출을 피하거나 줄일 권한을 누가 갖는지, 노출을 줄였을 때 손실을 누가 감당하는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폭염 대응의 핵심 질문은 '어떻게 더위를 식힐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작업을 멈출 수 있으며, 멈출 조건을 누가 결정하는가'이다.
온열질환 취약지로서의 농촌
기온이라는 지표만 놓고 보면 농촌이라고 해서 더 더운 것은 아니다. 열섬 효과로 인해 도시가 더 덥다는 조사도 많다. 그런데 질병과 죽음의 분포는 기온의 분포를 따르지 않는다. 질병관리청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에 따르면 2026년 5월 15일부터 8월 4일까지 신고된 온열질환자 2441명 중 논밭에서 발생한 경우는 324명으로 13.3%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추정 사망자 21명 중 논밭에서 발생한 사망은 6명으로 28.6%를 차지했다. 논밭은 온열질환에 가장 취약한 곳 중 하나다.
취약성이란 햇볕 노출 정도 뿐만 아니라 민감성, 그리고 적응 역량과도 관련된다. 농촌에서는 노동 자체가 야외에서 이루어지므로 노출이 구조적이고, 인구의 상당수가 고령이거나 기저질환을 가져 민감도가 높으며, 응급의료 접근성이 낮아 적응역량도 떨어진다. 농촌에서 의원에 가기 위해 자가용으로 20~30분을 이동하는 것은 이미 일상이다. 이 외에도 주변에 신고해주거나 도와줄 사람이 있었는가, 이상 신호를 보고 작업을 중단시킬 사람이 있었는가와 관련한 요소들은 기상의 영역이 아니라 제도와 자원 배분의 영역에 있다.
멈출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2025년 7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체감온도 33도 이상 폭염작업에서 2시간마다 20분 이상 휴식을 주는 것이 권고가 아니라 사업주의 법적 의무가 되었다. 폭염을 노동안전의 문제로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그러나 이는 농촌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 이 의무는 사업주와 노동자라는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기 밭에서 일하는 농민은 이 법의 바깥에 있다. 논밭에서 발생하는 사망의 상당수가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
게다가 농촌에서 폭염 사고가 더 잦은 것은 농민이나 농장주가 무심해서가 아니다. 작업 중지에 드는 비용을 개별 농가가 전부 떠안는 구조 때문이다. 농장주가 계절노동자의 품을 사면 통상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일과가 정해진다. 한낮의 서너 시간을 비우고 새벽과 해질녘으로 노동을 쪼개려면 계약 자체를 다시 짜야 하는데, 현재의 인력 사무소와의 계약 구조 상에선 불가능하다. 품삯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농민 본인이 밭에 나서면, 이번에는 자영농의 폭염 노출이라는 형태로 위험이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실효성 있는 대책은 '멈출 수 있는 조건'을 개별 농가 너머에 만드는 일이다. 한낮을 비우고 새벽·저녁으로 나누는 분할 근무가 가능하도록 계절노동 계약 시간을 재설계하는 것, 그 재설계에 따르는 인건비, 냉방비 등 비용 부담을 공공이 분담하는 것, 폭염일에 작업을 멈춘 농가의 손실을 재해보험이나 직불금 체계 안에서 다루는 것 등을 상상해볼 수 있다. 최근 우리 연구소가 만난 한 농민은 "기본소득이 있으면 무리해서 일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의 요지는 액수 그 자체보다는 작업을 멈춰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에 있었을 것이다. 소득 보장은 그 조건의 한 예시일 뿐이다
누가 대책을 결정하는가
소득 보장이든 작업시간 재설계든, 이런 논의가 여전히 낯설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기후위기 대응이 개인의 각성과 기술적 해법으로 좁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탈정치화의 전형적 형태다. 콜린 헤이(Hay, 2007)를 빌리면 탈정치화는 세 수준에서 일어난다. 정부의 책무가 시장이나 국제기구 같은 다른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고, 다음으로 공적 영역의 문제가 사적 영역의 자기관리로 넘어가며, 마지막으로 정치의 문제가 필연과 운명의 영역, 즉 체념 또는 미래의 기술이 해결해주리라는 낙관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한국의 폭염 대응 대부분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온열질환 예방수칙 홍보, 마을 방송을 활용한 야외작업 자제 안내는 '위험을 아는 개인'을 만들어내지만 '멈출 수 있는 조건'은 만들지 않는다. 차광시설과 냉방설비, 스마트팜 보급처럼 기술적 적응으로 문제를 우회하는 방식도 넓은 의미의 탈정치화다. 무엇을 개발할 것인가는 활발히 논의되지만, 그동안 누가 지금 왜 한낮의 밭에 서 있는가는 질문에서 빠진다.
또 기술적 적응은 그 자체로 불평등을 만든다. 설비를 갖추려면 초기 자본과 기술 정보, 그것을 회수할 만한 경영 규모가 필요하고, 고령 소농과 임차농일수록 그 문턱을 넘기 어렵다. 적응할 수 있는 농가와 그러지 못한 농가가 갈리면서 기후 적응은 새로운 불평등을 생산해낸다.
그렇다면 무엇을 개발할 것인가만큼이나, 누가 그것에 접근하게 할 것인가가 함께 결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 결정의 자리에 농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폭염 대책을 논하는 대책위원회의 구성에서 농민과 계절노동자는 좀처럼 당사자로 호명되지 않는다. 폭염이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상수가 된 조건에서도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전하게 농사를 계속할 수 있게 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러려면 한낮의 밭에 지금 누가 서 있는지, 왜 서 있는지, 멈추면 무엇을 잃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대책을 만드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기온을 낮추는 기술과 기법을 찾는 일과, 폭염의 비용과 피해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나눌지 결정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기술과 연구개발의 몫이지만, 뒤의 것은 오직 정치의 몫이다.
참고문헌
Hay, C. (2007).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하상섭 역).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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