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라는 사회적 기억의 빈틈
극우가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데 사용해 온 상징과 표현이 '일베놀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회 곳곳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스타벅스 탱크데이와 배재고 사태에서 보듯, 국가폭력이 대기업의 마케팅에 활용되고, 학생들이 스포츠 경기장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를 외치며 5.18을 희화화한 것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런 사건들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5.18을 민주주의 역사의 공동 기억으로 충분히 구축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빈틈이 극우의 정치적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18 정신을 이어받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고 그 성과로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가 열렸다. 이후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1997년 국가기념일 지정, 2002년 5.18 국립묘지 승격 등 제도적 변화가 이어졌다. 이는 5.18의 역사적 의미를 국가 차원에서 인정하고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과 노태우가 특별사면되고 전 대통령으로 복권된 것 또한 1997년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내세운 명분은 '국민대화합'과 '지역감정 해소'였다. 5.18에 대한 공동의 사회적 기억을 공고히 하기보다, 책임인정과 사과조차 없었던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을 광주에 대한 '보상'으로 거래한 것이다.
그 결과 5.18은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조사 보고서조차 없이 긴 세월을 보내야했다. 2010년대부터 전두환이 주장했던 북한군 개입설 등이 종편뉴스채널과 정치권을 중심으로 회자되었고, 온라인은 각종 음모론으로 뒤덮였다.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정부는 2019년에 5.18 민주화운동진상조사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고 2024년 종합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5.18에 대한 왜곡과 혼란을 해소하지 못했고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보고서 거부 입장을 밝혔다.
극우의 5.18정치 : 민주주의 역사 부정과 지역주의
이렇게 사회적 기억이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한 틈을 극우가 파고들었다. 5.18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5.18은 그 자체로 군사정권의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한국 민주주의 형성의 핵심 기억이다. 극우의 목적은 바로 이 기억의 의미를 흔드는 데 있다. 5.18의 의미가 흔들릴 때, 흔들리는 것은 5.18만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 논쟁이 아니다. 특정 세대의 특정 온라인 놀이문화의 문제만도 아니다. 극우의 5.18정치가 민주주의를 만들어왔던 공동의 역사를 흐트리고 국가폭력의 책임과 무게를 흐리고 있다.
극우의 5.18정치를 떠받쳐 온 오래된 도구는 역사부정과 지역주의다. 그 기원은 5.18 학살의 책임을 은폐하고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전두환 신군부가 구축한 통치 전략에 있다. 신군부는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들의 저항을 '광주'라는 지역의 '폭동'으로 가두었다.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를 함께 외치고 있던 보편자로서의 광주 시민들은 일반과 다른 '폭도'로 규정됐다. 신군부의 탄압에 끝까지 저항한 광주 시민들에 대해 전두환은 '북한군 2000명 남파'를 주장했고 이들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은 '질서 회복'으로 정당화됐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 지역 자체가 반공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마음껏 적대해도 되는 타자들의 공간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렇게 전국에서 넘쳐흐르던 민주화 요구와 지역마다 이어졌던 민중항쟁의 연결된 서사가 단절됐다. 광주의 고립은 곧 민주주의 기억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극우는 신군부의 북한군 개입설을 왜곡된 사진자료와 기록으로 뒷받침하는 거짓 서사로 확대했다. 이러한 역사부정이 여태까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5·18을 특정 지역의 경험으로 고립시켜 온 정치적 구조가 있다. 역사부정이 기억의 내용을 흔드는 시도라면, 지역주의는 애초에 그 기억의 주체를 제한한다. 극우에게 지역주의는 5·18을 민주주의의 공동 기억에서 떼어내고, 민주주의 자체의 역사적 정당성을 흔들며 자기 세력을 조직하는 데 여전히 효과적인 수단이다. 역사부정에 기반한 지역주의가 건재하는 한 극우의 5.18 호출은 계속된다.
민주주의 역사의 공동 기억을 단절시키는 통치 전략
5.18이 본래 역사적으로 위치하고 있던 지점을 살펴보면, 5.18이 광주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민주주의 역사라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맞서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치인과 학생운동 지도부를 대거 체포하고 대학을 폐쇄했다. 이때 군대를 투입하면서 모든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전국의 저항은 대부분 이 과정에서 제압되었지만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폭력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이 끝내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 날의 광주는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가 가장 끝까지 이어진 장소였다. 광주 시민들의 목숨을 건 항쟁에 직면한 전두환은 '북한군 남파주장'과 '빨갱이' 낙인을 활용해 광주를 분리해냈다.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를 군사력으로 진압하며 언론 통제도 자행했던 신군부가 광주와 호남을 낙인찍던 방식은 부마항쟁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민주화운동 참가자들에게도 감시와 해고, 취업 제한 등 장기적인 탄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도 쓰였다. 부마항쟁에 참여했던 부산·마산의 시민들 또한 '요시찰 인물'로 관리되며 부당해고와 취업 배제 등 '빨갱이'를 향한 일상적인 탄압을 겪었다. 국가폭력은 민주주의를 요구한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삶의 자리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계속됐다.
지역주의에 빼앗긴 민주주의의 기억
하지만 '북한군 개입설'이 특히 5.18에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광주와 호남이라는 '지역'에 '빨갱이'라는 적대와 죽음의 언어를 덧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는 5·18이 한국 민주주의의 공동 기억이 되는 것을 막아왔다. 물론 이 지역주의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영남과 호남 모두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그러나 불과 4년 뒤인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오늘날 익숙한 지역주의 구도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이 영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선택한 결과다. 이 선택은 국가 주도의 개발 자원 배분을 통해 제도화됐다. 이후 영남을 중심으로 지역과 정치권력과 자본이 결속하는 구조가 강화됐다. 특정 지역에 대한 우대와 배제, 그에 따른 지역 불균형을 통치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이후에도 한국 정치의 문법처럼 지속됐다.
이러한 실패의 배경 중 하나로 지역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 광주와 호남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구조적 차별을 겪어온 이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지역감정'이라는 표현 속에서 개인들의 적대로 번역됐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자원을 배분하고 정치적 충성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질서였다는 사실은 지워졌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 구조는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채 호남과 영남의 경쟁이라는 구도로 소비되었다. 5.18의 정치적 대표성을 자임한 민주당 역시 5.18이 가진 보편성을 충분히 확장하지 못한 채 5.18을 지역화하는 데 일조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광주도 용서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김영삼 대통령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대화합'을 내걸고 전두환·노태우 특별사면과 복권(전·노 사면)을 결정했다. 그러나 5.18 책임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과 없는 사면은 결코 이렇게 정당화될 수 없다. 이때 5·18이 빼앗긴 것은 단순히 처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공동 기억이었다.
다시 5.18의 기억을 공론장에 불러와야 할 때
5.18에 관한 당연한 사실이 모두의 기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건 꽤 곤혹스럽다. 그러나 우리에게 5.18이라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동의 기억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스타벅스에 이어 벌어진 배재고 사태가 그 증거다. 이것은 "요즘 애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5.18을 어떤 기억으로 만들어 왔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특정 세대의 무지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5.18을 어떤 사회적 기억으로 남길 것인가에 대한 공론장에서의 경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5·18에 대한 왜곡이 결국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토대를 흔드는 일임을 함께 이해하는 것, 광주와 호남을 향한 낙인이 내 친구와 가족, 그리고 나 자신이 겪는 차별과 다르지 않은 부정의임을 연결해 내는 것, 스타벅스와 배재고 사태가 퍼뜨린 것이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를 넘어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는 폭력과 통제의 언어였음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지역에 자본을 집중시키고 다른 지역을 주변화하던 박정희의 통치 전략이 지역을 살리는 해법이 아니라 또 다른 불평등을 낳아 왔음을 함께 직시하는 것, 권력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경쟁이 아니라 단절되어 있던 민중간의 연대를 공동의 기억으로 회복해야 한다. 이는 교사가 청소년을 훈육하는 것으로, 개개인을 처벌하는 것으로, 혹은 또다시 5.18이 민주당의 정치적 거래물이 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극우로부터 5.18을 구출하기 위한 출발점은 공론장이다. 청소년이 청소년과 5.18을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때,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시민들이 서로를 알아채고 뒤섞일 수있는 공론장 자체다. 민주주의 역사 부정과 지역주의가 뿌리내려 온 40여 년의 시간을, 극우의 사상이 일베놀이로 확산되어 온 10여 년의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을 요령이란 건 없다. 황폐한 공론장의 조건부터 다시 세우며 극우에 대항하는 언어를 모으고 퍼뜨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제이며, 동시에 극우와 같은 전략을 구사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는 난제다.
극우가 그어 놓은 경계를 따라 사람과 지역을 다시 갈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 자체를 흐트러뜨리는 일, 극우가 어지럽힌 공론장 위에 기꺼이 함께 자리하는 일,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히 타자화된 사람들과 지역들을 다시 공동의 역사 안에서 연결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5.18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민주주의의 몫이다. 극우가 그어 놓은 경계를 지우기 위한 지난하고 곤혹스러운 과정에 기꺼이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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