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후 80일 된 아들을 입양했다. 아들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생모와 헤어졌다. 몇 가지 질병을 안고 있었고, 해외입양 대상 아동으로 분류되어 있던 상황에, 한 차례 파양까지 경험한 아이였다. 누군가에게는 통계 속 숫자였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 된 아이다. 시간은 흘렀고, 아이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다. 입양 이후 나는 입양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한국입양홍보회에서 인천지역대표와 운영위원을 맡아 활동했고, 입양가족들의 자조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입양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는 아름다운 제도라고 믿었다. 지금도 입양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고아원 출신 피해자들의 증언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시설에서 겪은 폭력과 차별, 그리고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실감을 이야기했다. 그 피해가 처음에는 개인의 불행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제도에나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마음 한구석에 작은 물음표가 생겼다. '그들은 왜 시설에 가게 된 것일까.' 그 질문은 의외로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접한 후, 나는 어느 시민언론에 고아수용시설 피해자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의 르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고아원 출신자들은 오히려 시설 생활의 아픈 기억보다 부모와 헤어진 이유를 더 궁금해 했다. 왜 자신이 가족과 떨어져야 했는지,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내가 만난 50여 명의 시설 출신자 중 ‘70 ~ 80년대엔 심지어 경찰과 공무원의 납치로 시설에 간 아이들, 사회정화와 부랑아 단속이라는 미명하에 끌려간 아이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독재정권하에 벌어진 국가폭력의 희생양들이었다. 지금의 고아원이 과거 국가의 비호아래, 가족이 있는 멀쩡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성장을 거듭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현재 시설 운영자들은 고아원운영을 바탕으로 큰 부를 축적하여 그 자산은 사학·부동산·종교 영역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나는 미혼모들도 만났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아이를 포기해야 했던 여성들, 사회적 편견과 가족의 압박 속에서 양육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를 키울 환경이 없어서 아이와 헤어졌다고 말한다. 어떤 미혼모는 아이가 좋은 가정으로 입양되길 원했지만 결국, 아동보호소를 거쳐 시설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민간입양기관 역시 복지라는 허울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나의 지인인 어느 부부는 시민운동 현장에서 만나 결혼했다. 노동과 인권,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었다. 교회에서는 신앙심 깊은 부부로 알려져 있었고, 난임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던 끝에 입양을 선택했다. 그러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신념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생후 6개월 만에 입양된 아이는 부부의 예상보다 더 많은 돌봄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부부는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한 능동적 참여에는 익숙했지만, 한 아이의 울음과 떼쓰기, 불안과 상처를 감당하는 일에는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시민운동가로서의 책임감과 신앙인의 헌신은 있었지만, 부모가 갖추어야 할 기다림과 수용의 마음은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1년 만에 파양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분리를 겪은 아이의 ‘재애착’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누구도 충분히 일러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는지 모른다. 부모 역할은 거창한 신념보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뎌야 하고, 반복되는 아이의 실수와 상처를 품어야 하는 ‘지독한 인내’도 필요하다. 입양은 사랑의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완성형 사랑의 증명은 아니다. 나에게 그 부부의 이야기는 입양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라,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책임인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각인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양은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제공한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아들 역시 가족 안에서 성장했고,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사실도 존재한다. 입양은 한 아이와 원가족의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입양 이후의 행복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사랑받으며 성장한 아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입양가족, 감동적인 가족 서사를 말할 때 사람들은 열광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예비입양부모들은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품에 안고 싶어 한다. 입양부모들에게는 새 가정을 얻은 순간부터 아이와의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아이가 부모와 헤어져야 했던 순간은 종종 이야기의 바깥에 남겨둔다. 입양부모들은 원가정이 무너진 과정을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그 출발점이 된 이별과 상실 또한 상대적으로 집중하지 못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부모와 아이를 떼어놓을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가난 때문에, 편견 때문에, 사회적 고립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아동보호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이에게 새로운 가정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원가정 안에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어야 한다.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보다 아이가 부모 곁에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아동복지의 출발점이다. 한부모라는 이유로, 미혼모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국가와 사회는 오래도록 부모에게 물어왔다. '정말 아이를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질문은 종종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당신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습니까?'
가난은 범죄가 아니다. 미혼 출산도 아동학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빈곤과 미혼모에 대한 편견을 제도 속에 은밀히 남겨두고 있다. 지원보다 분리를 먼저 검토하고, 양육을 돕기보다 포기를 설득하는 구조가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아이가 부모와 헤어지는 과정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생계비가 부족해 월세를 내지 못하고, 아이를 맡길 곳이 없고, 사회적 낙인 속에서 고립된 부모가 결국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국가가 내민 손이 양육 지원이 아니라 분리였다면, 그 아이는 정말 보호받은 것일까.
입양과 시설은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라 결과다. 원인은 그보다 앞선 곳에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원가정에서 함께 살지 못하는가. 왜 국가는 아이가 부모 곁에 남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충분한 자원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분리 이후의 보호 체계는 논의하면서도 분리 자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대한민국에는 지금도 250개 가까운 대규모 아동보호시설이 존재하며, 소규모 그룹홈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800여 곳의 시설에서 해마다 약 1만 2천 명의 아이들이 머물고 있다. 이 많은 시설의 존재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국가는 끊임없이 보호대상아동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입양인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으며,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 입양 후 새로운 가족을 만나 의사와 교수, 예술가등 전문직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된다. 그 이야기들은 분명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도 그들의 노력과 성취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들이 성공했으니, 분리의 과정도 옳았던 것일까. 세상은 종종 결과를 통해 과거를 정당화하려 한다.
르포 현장에서 만난 국내외 입양인과 시설 퇴소자들은 현재의 삶과 별개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고, 부모와 헤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 하며,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지 묻는다. 그 질문은 성공 여부와 무관하다. 문제는 성공담이 때로는 잘못된 제도의 면죄부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몇몇 빛나는 사례는 조명 받지만, 그 이면에서 가족과 강제로 분리된 경험, 정체성의 혼란, 평생 이어지는 상실감은 충분히 언급되지 않는다. 한 명의 성공한 입양인이 있다고 해서 원부모로부터의 분리 자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한 명의 성공한 시설 퇴소자가 있다고 해서 시설 중심 보호체계가 최선이었다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된다.
결과는 결과일 뿐이다. 국가와 사회가 평가받아야 할 지점은 누군가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아이가 가족과 헤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충분히 제공했는가에 있다. 아이의 성공은 축하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성공을 근거로 과거의 분리와 상실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성취는 존중하되,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까지 미화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결국 잘됐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그 아이는 정말 부모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져야 한다. 그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성공담은 감동의 기록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덮는 장막이 될 수 있다.
나는 입양을 부정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양을 경험한 부모 입장으로서, 입양이 가진 의미와 한계를 함께 바라보려는 것이다. 학대와 방임 등으로 고통 받는 아이에게 입양이 필요한 경우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입양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관련 운동을 전개하며 내가 도달한 결론은 단순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입양을 어떻게 늘릴 것이며 얼마나 빨리 아이 입양을 보낼 것인가가 아니다. 아이가 입양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내가 만난 수많은 미혼모와 시설출신자, 해외 입양인과 그들을 돕는 이야기는 오늘도 그 질문 앞에 비슷한 물음표를 남기고 있다. 그 물음표는 입양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아이가 부모와 헤어지기 전에 사회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입양부모로서, 그리고 한 명의 기록자로서 계속 마주하고 있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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