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년 전 맹자가 오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출근한다면?

[인물로 본 세계사] 성선설의 사나이, 역성혁명을 허하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살아 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한국정치판에서 가장 절실하게 소환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이 노인이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어질게 살아라"는 다소 온건한 권고를 남겼다면,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 백성을 못 살게 굴면 갈아치워도 된다"고 공개적으로 외쳤다. 전국시대 제후들이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씰룩거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맹자의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다.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쩌우청(鄒城) 일대인 추(鄒)나라 출신으로,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기원전 483?~기원전 402?)의 문하에서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어머니 장씨가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다만 이 미담은 전한(前漢) 시대 유향(劉向, 기원전 77?~기원전 6?)이 쓴 《열녀전(列女傳)》에 처음 등장할 뿐, 당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훗날 덧붙여진 교훈 서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어머니 신화는 2천 년 전에도 유통됐다.

성선설, 사람은 원래 착하다, 그러니 변명하지 마라

맹자 사상의 핵심은 성선설이다. "사람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맞서 순자(荀子, 기원전 298?~기원전 238?)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을 내세웠고, 고자(告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중간노선을 택했다. 성선이냐 성악이냐 논쟁은 2천 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인류는 이 질문에 답을 내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는 네 가지 마음의 실마리, 즉 사단(四端)이 모든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달려가 붙잡는다. 이 자연스러운 반응이 바로 인간본성의 선함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악인이 왜 이리 많은가? 맹자의 답은 명쾌하다. 물욕과 탐욕이 그 착한 본성을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빠진 게 아니라, 나쁜 환경이 사람을 망가뜨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현대 한국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매년 대학 입시철이면 온 나라가 들썩인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수준이고, 출생률은 세계최저를 경신한다. 어린 학생들은 새벽 두 시까지 학원에 앉아 있다. 맹자가 이 광경을 본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착하게 태어난 아이들을 저렇게 몰아붙이는 환경이야말로 성선을 짓밟는 폭력이라고 했을 법하다.

민본주의, 백성이 가장 귀하고, 임금은 가장 가볍다

맹자 사상의 두 번째 핵심은 민본주의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민위귀(民爲貴), 사직차지(社稷次之), 군위경(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나라와 땅의 신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 조선왕조 5백 년 내내 선비들이 이 구절을 입으로는 외우면서 실제로는 왕권강화에 복무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빼어난 아이러니다.

맹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여 민심을 잃으면 그를 몰아내는 혁명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한다. 왕조가 바뀌어도 되는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발끈했다. 황제자리에 오른 그가 맹자를 읽다가 이 구절에서 벽에다 책을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맹자의 역성혁명 관련 구절들을 삭제한 이른바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검열의 원조를 찾는다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 뒤 조선에서는 성리학자들이 맹자를 교과서로 삼았다. 하지만 역성혁명론은 살짝 봉인해두었다. 군주에게 불편한 대목은 덮고, 충효와 질서만 강조했다. 맹자가 이를 보았다면 "이건 내 책이 아니오"라고 했을 것이다.

왕도정치, 어진 정치가 패도를 이긴다

맹자는 전국시대 각국을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역설했다. 무력과 이익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패도(霸道)가 아니라, 덕과 인의(仁義)로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진정한 통치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양혜왕(梁惠王, 기원전 370?~기원전 319?)을 만나러 가서도 첫 마디에 이익 이야기를 꺼내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만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하지만 맹자는 굽히지 않았다. 백성이 굶주리는데 곳간을 열지 않으면 정치가 아니고, 세금으로 백성을 쥐어짜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게 그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 유세는 대부분 외면당했다. 당시 제후들은 부국강병, 즉 빠른 시간 안에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드는 데 몰두했다. 법가(法家) 사상가들이 유행했고, 상앙(商鞅, 기원전 390?~기원전 338)이나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기원전 233?) 같은 인물들이 더 환영받았다. 맹자는 결국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함께 책을 정리하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한 현자의 전형적인 말년이다.

역사에 미친 영향, 당나라에서 뒤늦게 재발견되다

맹자가 사후에 제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당(唐)나라의 한유(韓愈, 768~824)가 그를 재발견하면서부터다. 한유는 불교와 도교에 밀려난 유학을 다시 세우면서 맹자를 공자의 정통계승자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송(宋)나라 주희(朱熹, 1130~1200)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묶어 사서(四書)로 확립하면서 맹자는 공식교과서가 되었다. 공자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나서야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뒤늦은 명예회복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조선에서 성리학이 국시(國是)로 채택되면서 맹자는 필독서가 되었다. 과거시험을 보려면 맹자를 통째로 외워야 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맹자를 읽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꿈꿨고,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도 공고히 했다. 이처럼 좋은 사상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맹자 본인은 이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맹자를 읽는다는 것

오늘 한국에서 맹자를 읽는 일은 단순한 고전 탐독이 아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을 향해 곧장 날아든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

먹고살 기반이 없으면 도덕심도 유지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청년들이 집을 살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미래를 그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도덕과 시민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맹자식으로 보면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먼저 살 수 있게 해야 착하게 살 수 있다.

"임금이 잘못을 거듭 저질러도 간언을 듣지 않으면 갈아치울 수 있다."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론이 오늘날의 탄핵제도와 닮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권력은 백성의 뜻에서 나오며, 백성의 뜻을 저버린 권력은 정당성을 잃는다. 2016년과 2024년,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은 어쩌면 2300년 전 맹자가 예언한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이익만 밝히면 아래도 이익만 좇는다."

정치지도자들이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좇는 모습을 보일 때, 그 사회전체가 이익경쟁의 장으로 변한다는 경고다. 부동산투기, 주식 불법거래, 친족 특혜채용, 뉴스를 펼치면 맹자가 2천 년 전에 이미 걱정했던 장면들이 현재형으로 펼쳐진다.

맹자가 지금 여의도에 나타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한동안 말없이 국회 중계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역시 환경 탓이구먼."

▲맹자ⓒ 필자 제공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 추나라의 유학자로, 공자의 사상을 계승·발전시켜 성선설과 민본주의를 확립했다. 그의 언행을 담은 책 《맹자》는 사서(四書) 중 하나로 동아시아 정치·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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