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둘러싸고 여론의 공분이 확산하는 가운데, 전국 대학가에서도 대자보 게시가 연이어지고 있다. 대학생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엄중한 처벌, 선관위 개혁을 포함한 근본적인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했다.
7일 오전 기준, 전국 187개 대학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초래한 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는 성명을 게시했다. 지난 4일 서울 경희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참정권 침해 규탄' 대자보를 시작으로 4일째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총학생회뿐 아니라 단과대 학생회, 소모임, 개인 등도 참여하고 있다.
관련 대자보를 취합해 공개한 한 사이트에 따르면, 지금까지 272개의 대자보가 전국 캠퍼스에 게시됐다. 이 사이트는 대자보의 요구 사항을 분석한 결과, 재발 방지 대책 요구가 전체의 65%로 가장 높고, 선관위·당국 규탄이 52%, 진상규명이 40%, 책임자 처벌 및 사퇴와 공식사과가 32%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17% 가량은 선거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재선거·재투표를 요구한 비율은 6%로 파악됐다.
가장 빈번히 쓰인 핵심어는 민주주의, 참정권, 신뢰 및 공정성, 헌법, 주권, 한 표 및 투표권 등이었다.
지난 4일 대자보를 처음 게시한 경희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는 "이 사태를 헌법 제24조에 명시된 '국민의 참정권'을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짓밟은 중대한 민주주의 훼손 사태로 규정한다"며 "우리는 묻는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선거에서 투표용지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국가기관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들은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참정권 침해 사태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지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비롯한 책임자 전원은 즉각 사퇴하라"며 "중선관위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들의 피해를 복구하고, 선거의 정당성을 회복할 수 있는 실효적 대책을 즉각 마련하며, 이번 참정권 박탈 사태에 대해 철저한 진상 조사를 실시하고, 확고한 재발 방지 대책을 제도화하라"고 요구했다.
이 밖에도 "종이 한 장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국가를 규탄한다"(대구가톨릭대학교)거나, "항쟁으로 얻은 권리, 행정으로 무너지다"(한성대학교), "신뢰가 무너진 곳에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개혁을 촉구한다"(한신대학교), "국가 선거관리의 근간이 무너졌다. 우리는 이 참담한 행정 실패를 묵과할 수 없다"(동서대학교) 등의 제목의 대자보 게시가 이어졌다.
일부 대학에선 시국 선언문이 발표됐다. 부산교육대학교는 5일 "절차가 파산한 민주주의,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며 "민주 시민 교육의 토대를 무너뜨린 선관위의 직무 유기를 준엄히 심판하라"고 요구했다.
6일 시국 선언문을 낸 한국농수산대학교는 "우리는 귀농·귀어·귀촌의 길을 선택한 청년으로서, 지역 농정과 지방자치의 방향이 우리 삶에 직결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투표소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그 마음에는 내가 살아갈 지역과 농촌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투표소에서 용지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한 사람의 권리가 가로막힌 일"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선거 관리에서 투표용지를 갖추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책무는 없다. 그 기본을 지키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잘못"이라며 "책임을 맡았으면 준비를 다해야 하고, 결과에 대해 떳떳이 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원칙"이라고 밝혔다.
개인 명의의 대자보도 늘고 있다. 부산대 철학과 학생 5인은 "절차를 잊은 집단에게 민주주의는 없다"의 제목의 대자보를 학내에 붙였고, 충북대학교 사학과 학생 33인은 "참정권의 박탈,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고 밝혔다.
한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은 5일 "기차는 갔더라도, 개는 짖는다"며 "사퇴는 책임의 끝이 아니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 대표자만의 실책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고 선관위 개혁을 요구했다. 한 서울대 수리과학부 학생은 6일 "선관위가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보호받고 위원들이 헌법상 신분보장까지 받는 이유는 위원들이 대단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위원들이 지켜야 했을, 그리고 지켜져야 했을 국민의 선거권이 신성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정치적 선언이 잇따르며, 이번 사태가 시민의 정치참여권을 보장하는 대안 제시로 확대돼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기 시작했다.
수도권 15개 대학 인권 소모임 단체들은 6일 "우리는 더 민주적인 사회를 원한다"는 공동성명을 내고 "이전에는 참정권 박탈이 없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며 "이미 사회적 소수자들은 유권자 선택에서부터 기표에 이르기까지 투표의 전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지난 30일 고양시에서는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거동이 어려운 유권자가 투표를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고 밝혔다.
또 "지난 총선 때는 투표소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이용자가 들어가지 못했다는 신고가 잇따랐다"며 "수입감소와 배차 불이익의 압박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과, 법적 성별이 드러나거나 모욕을 당할 것을 우려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주권은 단지 투표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그 뿌리는 시민들의 목소리"라며 "정치에서 누락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우리의 삶에서 시작한 대안을 고민하자"고 밝혔다.
일각의 '부정선거' 주장에 대해 이들은 "행정 실패와 부실 관리는 중대한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곧 부정선거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며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과 책임 추궁은 필요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정치적 적대와 음모론은 민주주의를 강화하지 못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불신을 키우며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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