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는 말하고 주민은 듣는 토론, 민주적이지 않다

[복지국가SOCIETY] 불통의 한국사회, 대화와 소통의 길은?

지역 주민과 활동가를 대상으로 소통역량 교육을 진행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교육이 시작되자마자 누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조금 빨리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자발적으로 신청한 자리가 아니거나, 바쁜 일상 속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참여한 경우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아무리 좋은 강의라도 마음의 여유 없이 참여하면 교육은 '배움'보다 '해야 하는 일'이 되기 쉽다. 주민 대상 교육과 공론장의 가장 큰 과제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왜 참여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참여가 살아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지역사회 공론장과 민주주의가 마주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은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민주적이지 않은 현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가르치는 일'로 이해한다. 전문가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주민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은 단순 전달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사람들은 설명만으로 배우지 않는다.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질문하고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배움이 일어난다. 하지만 실제 주민참여 현장의 많은 교육과 토론회는 여전히 전달 중심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전문가는 말하고 주민은 듣는다. 질문 시간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 주민의 경험과 생각은 배움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한 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주제로 진행된 강의에 참여했을 때 대부분의 시간은 설명으로 채워졌고, 학습자의 참여는 마지막 몇 분의 질문 시간 정도에 머물렀다. 내용은 민주주의였지만 과정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단순히 제도에 있지 않다. 사람에 대한 존중, 상호 신뢰, 자유로운 표현, 공존의 경험이 민주주의의 토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교육 역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고 이견이 안전하게 드러날 수 있으며 모두가 동등하게 발언하고 서로의 경험을 경청할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된다.

'듣는 자리'에서 '함께 생각하는 자리'로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개념을 배우는 것은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다. 그래서 강의는 여전히 중요하다. 좋은 강의는 새로운 언어와 관점을 열어준다. 그러나 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강의는 쉽게 학습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지만 막상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경험을 우리는 자주 한다. 그래서 주민과 함께하는 교육과 공론장에는 '잘 들은 것 같은 경험'보다 직접 말하고 질문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

주민이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지역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강의장보다 상호작용의 장이 필요하다. 즉 대화의 목표를 함께 정하고 서로의 경험을 경청하며 질문과 이견에 열려 있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의견을 나누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민주적 대화의 경험은 단순 학습을 넘어 공동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함께 탐색하는 숙의의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왜 지금 우리 사회에 공론장이 필요한가?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돌봄, 기후위기, 지역소멸, 교육, 세대 갈등, 주민 갈등 등등. 이런 문제들은 어느 한 기관이나 전문가가 혼자 해결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숙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민주적 공론장이다. 공론장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다. 서로 다른 시민들이 공공의 문제를 함께 이해하고 방향을 만들어가는 민주적 상호작용의 공간이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포럼, 토론회, 설명회, 패널토론이 공론장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숙의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미 결론이 정해진 정책 설명회, 의견수렴 형식만 갖춘 공청회, 전문가 중심 발언 구조, 주민을 '참석자'로만 대하는 방식 등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주민은 점점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을 경험하게 된다. 형식은 민주적이지만 실제 경험은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너무 익숙한 '패널토론'은 원래 민주적 대화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이었다. 1932년 교육철학자 해리 오버스트리트는 사람들이 민주적 토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고 보았다. 그래서 몇몇 패널이 먼저 서로 질문하고 경청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패널토론(panel discussion)' 방식을 제안했다.

즉 패널토론의 본래 목적은 사람들에게 민주적 대화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패널토론은 다시 일방적 발표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사회자는 시간을 통제하고, 전문가들은 차례로 발언하며, 청중은 듣기만 한다. 질문 시간은 마지막 몇 분에 형식적으로 배치된다. 민주적 대화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이 오히려 민주적 상호작용을 막는 형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행사형 공론장'에서 '숙의형 공론장'으로 전환해야 한다. 앞으로 지역사회 공론장은 단순한 행사 운영이 아니라 민주적 상호작용의 구조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정해진 결론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결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공론장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와 과정이 필요하다.

숙의형 공론장을 위한 조건들

1. 정책 결정 이전 단계부터 주민 참여 보장

주민은 완성된 정책을 전달받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정의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기획 단계부터 주민 참여. "선발표 후토론"보다 "공동 문제발견". 숙의 과정의 투명한 공개가 필요하다.

2. 전문가 중심이 아니라 주민 중심의 구조

지역 문제는 주민이 가장 오래 경험하고 가장 깊이 알고 있다. 따라서 공론장은 주민 경험, 생활의 언어, 실제 삶의 문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민들이 더 깊이 생각하고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어야 한다.

3. 민주적 대화 역량을 학습하는 과정 만들기

민주적 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 질문, 갈등 다루기, 숙의는 훈련이 필요한 역량이다. 그래서 지역사회에는 대화기술 워크숍, 소그룹 대화 구조, 퍼실리테이터 양성, 작은 마을 공론장 같은 과정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민주적으로 대화하는 문화와 경험이 있어야 지속될 수 있다. 민주적인 대화가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든다. 민주적 대화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서로 배우고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 속에서 공동의 성장이 일어난다. 따라서 민주적 대화를 기반으로 숙의적 공론장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공론장의 대화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상호 존중, 공동 사고, 집단 학습, 공동 책임을 경험하게 한다. 결국 공론장을 다시 설계한다는 것은 단순히 회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지역사회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몇 사람만 말하는 토론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생각하는 구조, 정해진 답을 전달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방향을 만드는 과정, 전문가 중심이 아니라 주민이 주체가 되는 대화가 절실하다.

이런 민주적 대화의 경험이 쌓일 때 비로소 주민자치와 공동체 민주주의도 실제 힘을 갖게 된다. 민주주의는 결국 투표 이전에 민주적 대화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 꽃'이라는 지방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고, 지방선거 이후에 숙의형 공론장인 '시민의회'를 적극 도입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 정민규 씨는 공론장을 활성화시키는 퍼실리테이터로 지역의 주민자치와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민주시민교육을 주된 활동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 학교에서 시민의회를 도입하기 위한 청소년시민의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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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픽사베이(pix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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