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의 현상(기후재난)과 원인(온실가스), 책임 소재(고탄소 기업 및 선진국)는 이미 분명하다. 과학적인 해결 방안 또한 명확하다. 그러나 우리는 원인 제공자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도,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정책을 채택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와 미래세대에 전가되는 실정이다.
화석연료 기업의 사활을 건 로비, 정치인의 단기적 이해관계, 그리고 시장의 복잡한 이해 충돌은 구질서와의 단절을 가로막고 있다. 기성 화석연료 체제의 저항이 완고한 상황에서, 정작 기후 위기에 가장 취약한 이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다. 짧은 선거 주기 또한 장애물이다. 장기적 이익을 위해 현재의 비용을 부담하자는 제안은 선거 논리 속에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단기주의에 매몰된 선거 정치가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약속을 배반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그레이엄 스미스 교수는 "우리의 정치 시스템은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데 실패했고, 시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일갈한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에 있다.
일본 스기나미구, 아래로부터의 정치 혁명
정치에 실망하고 외면하는 대신, 기후 위기와 생태계 붕괴 같은 문제를 공동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회 공공성'과 '시민 참여'를 기치로 내건 일본 도쿄 스기나미구 키시모토 사토코 구청장의 행보는 지방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키시모토 사토코는 지난 2022년 4월,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2년 동안의 유럽 생활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의 진보적 싱크탱크 '트랜스내셔널 연구소(TNI)'에서 활동해 온 그녀는 팬데믹 기간 온라인 정치 토론을 통해 인지도를 쌓았다. 시민사회의 요청으로 귀국한 지 단 두 달 만에, 그녀는 도쿄 23개 자치구 중 일곱 번째로 큰 스기나미구의 구청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소중히 행사하고, 그 토대 위에서 각자가 존중받는 정치를 지향합니다. 갈등과 어려움을 대화로 해결하며 발밑에서부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 일본국 헌법의 이념을 따르겠습니다. 스기나미에서 살고, 일하고, 배우며 태어나 늙어가는 모든 이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모으고 토론하며 스기나미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2022년 선거 당시 키시모토 사토코의 공약 중 일부)
키시모토는 시민단체 '주민을 생각하는 스기나미 구청장을 만드는 모임'이 구민의 목소리를 담아 제안한 정책을 전폭 수용했다.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이 공약은 언론으로부터 '구민 매니페스토(People's Manifesto)'라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철저히 소통에 집중하며 투표율을 끌어올린 선거 캠페인 끝에, 그녀는 현직 구청장을 단 187표 차이로 제치고 승리했다.
기적 같은 당선 이후, 스기나미구는 지방자치 혁신의 실험장으로 떠올랐다. 키시모토 구청장은 자신의 도전을 '뮤니시팔리즘(Municipalism)'으로 정의한다. 뮤니시팔리즘이란 시민의 참여 범위를 선거 중심의 간접 민주주의를 넘어 지역 정치의 실질적인 결정 과정으로 확대하려는 운동이다. 그녀는 스기나미식 뮤니시팔리즘의 세 가지 기둥으로 공공성 회복, 참여 민주주의의 실현, 그리고 기후 위기와 젠더 이슈의 주류화를 제시했다.
특히 공약의 핵심인 '스기나미구 기후주민회의'는 민주주의 강화와 기후 위기 대응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기나미구는 주민 57만 명 중 무작위로 추출한 3,000명에게 안내장을 발송했으며, 희망자 199명 가운데 인구 통계적 특성을 고려해 최종 80명의 시민 위원을 선발했다. 기후주민회의는 '학습-숙의-제안'의 3단계로 총 6회 진행됐다. 여기서 도출된 주민 제안들은 스기나미구의 실행계획에 직접 반영돼, 예산 편성 및 구정 운영의 실질적인 근거가 됐다. 스기나미구의 실험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치 시스템의 재구성: 민주적 추첨과 숙의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기후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치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레이엄 스미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미래세대, 나아가 비인간 존재에게 영향을 미칠 결정에 직접 참여할 때 정치가 변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세계 각지에서 시도되는 '기후시민의회'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기후시민의회의 핵심은 민주적 추첨과 숙의에 있다. 먼저 시민의회는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기후·생태 위기 같은 긴급한 현안을 학습하고 권고안을 도출하도록 한다. 기존의 공적 참여 방식은 대개 정치적 자기 확신이 강한 특정 소수의 목소리에 편향되기 쉽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견해는 소외되곤 한다. 반면 민주적 추첨은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참여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실현하고 참여자의 다양성을 확보한다.
정치적 평등이 추첨을 통해 확보된다면, 그 다양성을 공적 지혜로 바꾸는 과정이 바로 숙의이다. 단순히 무작위로 선발된 집단을 모아둔다고 해서 저절로 최선의 답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정치가 '우리 편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계산에 매몰돼 있다면, 숙의는 상호 존중과 정당화에 기반한다. 숙의는 참여자들이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 전체에 무엇이 이로운가'라는 공동선의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도록 이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객관적 증거를 검토하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며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강화한다.
기후 위기 시대의 정치는 전문가나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 스기나미구의 사례처럼 시민들이 직접 정책의 주체로 나설 때, 우리는 비로소 구질서의 저항을 이겨내고 모두를 위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 그레이엄 스미스의 저작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최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최근 요약·번역한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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