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입법의 현장에서 : '좋은 법'의 실천적 과제
지난 2023년, 저는 이 지면을 통해 ‘좋은 입법’을 설명드리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시 제가 강조했던 시의성, 창의성, 적절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원칙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힘'으로 작동하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소위 ‘정치 효능감’을 매일매일 체험하고 있지요. (☞ '국회 다니는 변호사' 연재 보기)
오늘부터 격주로 새롭게 시작하는 연재 '이재명 시대의 개혁입법' 시리즈는 바로 그 증명의 기록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억강부약(抑強扶弱)의 철학, 즉 강자의 부당한 횡포를 누르고 약자의 억울함을 돕는다는 정신이 어떻게 법제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상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세밀하게 짚어보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안, 일명 'K-디스커버리' 도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법은 2028. 2. 20.부터 시행됩니다.
'증거의 편재'라는 거대한 장벽
우리가 흔히 사법 정의를 말할 때 '법 앞의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결코 평평하지 않습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거대 기업과 일반 소비자가 맞붙는 민사 소송의 현장은 더욱 그렇습니다. 법률가들은 이를 '증거의 편재(偏在)'라고 부릅니다. 소송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정보와 증거가 한쪽(주로 강자)에만 쏠려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를 복기해 보십시오. 2002년 제조물책임법을 시행하며 소비자소송 등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기술적 전문성이 부족한 소비자를 위해 입증책임을 완화하거나 전환(소비자가 제조물의 결함, 피해사실, 그리고 그 인과관계를 느슨하게라도 입증하면, 반대로 그 피해사실의 인과관계가 없음을 기업이 증명해야 하는 것이죠)하는 장치를 마련했지요.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입증책임의 화살표를 돌려놓는다 해도, 그 화살이 꽂힐 '과녁'인 증거 자체가 기업 내부의 철옹성 안에 숨겨져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행 민사소송법에 '문서제출명령' 제도(민사소송법 제344조)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무적으로는 허점이 많습니다. 상대방이 해당 문서를 실제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청인이 입증해야 하며, 기업이 "영업비밀"이라거나 "폐기했다"고 주장하면 이를 강제할 뾰족한 수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결국 진실은 기업 내부의 품의서, 결심 문서, 이메일 기록 속에 갇힌 채 법정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법 체계가 오랫동안 외면해 온 '구조적 불공정'이었습니다.
상생협력법 개정, ‘K-디스커버리’의 서막을 열다
이재명 시대의 정부와 여당은 이 '구조적 불공정'을 시정하는 첫 단추로, 상생협력법 개정안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 핵심은 중소기업의 기술자료 유용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소송 전 단계부터 강력한 증거 확보 수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 식의 증거개시제도, 즉 'K-디스커버리'라 칭할 만 하지요. 이번 입법을 통해 도입된 세 가지 핵심 장치는 우리 법제도에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향후 이 제도는 하도급, 기술특허, 소비자소송 나아가 민사소송 전반에 걸쳐 점차 그 길을 열어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전문 조사가'라는 공적 조력자의 투입입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기술을 탈취당했다고 의심될 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뺏겼는지 구체적으로 특정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직접 나서서 어디서 기술이 베껴졌는지, 어떤 경로로 유용되었는지를 파악합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을 공공의 전문성으로 메우는 작업입니다.
둘째, 강력한 '자료 보전 명령' 제도의 도입입니다. 소송이 시작될 기미만 보여도 관련 자료를 세단기에 넣거나 하드디스크를 초기화하던 관행에 제동을 겁니다. 법원이 자료 보전을 명하면 기업은 이를 거부할 수 없으며, 만약 자료를 인멸할 경우 그에 따른 강력한 법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진실의 타임캡슐'을 확보하는 장치입니다.
셋째, '강제력 있는 사전 증언 제도(deposition)'의 도입입니다. 사건의 실체를 아는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말을 바꾸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 사전에 진술을 확보하고 이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허위 진술을 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법정 안팎에서 정직함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만드는 강력한 기제입니다. 미국에선 변호사들이 이러한 사전 증언 제도룰 이용해 사장될 우려가 있는 다수의 증거를 소송 전 확보합니다.
권리의 균형 : '비밀유지권'과 '비밀유지명령'이라는 방패
반대로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소송 과정에서 자신의 핵심 영업비밀이 경쟁사나 외부로 유출될까 봐 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디스커버리 제도가 남용되어 기업의 정당한 비밀까지 낱낱이 공개된다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불공정을 낳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개정안은 법원이 비밀유지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여, 소송 과정에서 취득한 비밀을 오직 해당 소송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제한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강력한 형사 처벌이 뒤따릅니다. 또한,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전략적 소통을 보호하는 비밀유지권(Attorney-Client Privilege)의 취지를 살려, 무분별한 '낚시(fishing)' 증거 신청으로부터 기업의 정당한 방어권을 보장합니다. 이처럼 '진실 발견'과 '영업비밀 보호'라는 두 가치의 팽팽한 균형을 잡는 것이야말로 선진적인 개혁 입법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 생태계의 패러다임 전환 : 정직이 곧 경쟁력인 사회
이번 상생협력법 처리는 단순히 기술 탈취 하나를 막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최근 우리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이사회의 충실 의무 확대), 배당 세제 개편 등과 궤를 같이하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입니다.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우리 자본시장과 산업 생태계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은 바로 '투명성'입니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안착된다면, 대기업은 더 이상 타인의 혁신을 손쉽게 가로채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기술을 사는 것이 소송에서 지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합리적 계산이 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중소기업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술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는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더 과감하게 혁신에 투자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이 입법의 효용성은 ‘정직한 사회로의 이행’에 있습니다. 양 당사자의 힘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하도급, 특허, 소비자 안전 등의 영역에서 증거의 한계를 시정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진정한 사법 정의입니다.
나아가며
정치는 갈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해 그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해소의 근거는 반드시 '진실'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기업 활동의 위축을 우려하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경영하고 정당하게 경쟁하는 기업에게 이 제도는 오히려 든든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반면, 타인의 고혈을 짜내어 이익을 취하던 낡은 관행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재명 시대의 개혁 입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격주로 이어질 이 연재를 통해, 우리 법이 어떻게 더 따뜻하고 공정해지고 있는지 그 변화의 세세한 조각들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가 누르기 방지법'을 통해 바라본 우리 자본시장의 공정성 회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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