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그럴 수밖에 없었네

[프레시안 books]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존경할 만한 남자 어른이 없다"는 고민을 오랜 시간 해 왔다. 직업인으로서의 역량이나 재력이 출중한 남자 어른이야 많고 많다. 하지만 한발 나아가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자기 잘못에 온전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격적으로 닮고 싶은 남자 어른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유년 시절에는 몇몇 남자 어른들을 동경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젊은 정치인, 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학자, 전에 없던 퍼포먼스를 선보인 아이돌 그룹 등이 그 대상이었다. 하지만 남자 어른들은 권력을 손에 쥐자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저질렀고, 사과는커녕 책임을 회피하려 애썼다. 이 암울한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3·8 국제 여자의날을 맞아 손에 잡은 이예지 작가의 인터뷰집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은 그래서 인상 깊었다. 동경할 만한 남자 어른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데, 여자들은 동경도 아니고 사랑한 여자가 최소 열다섯 명이나 있다니!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은 무엇이 다르길래 사랑받을까. 읽어보니 곧장 납득했다. 단지 빼어난 역량을 선보여 개인의 영달을 얻는 걸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용기를 심어주는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 매력적이고 새로운 여자 캐릭터가 나온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는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정서경 작가의 고민이 녹아 있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배우 탕웨이가 연기한 이주 여자 '서래'가 불쌍하지 않고 힘 있는 모습이었던 이유다.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교보문고

"서래가 매 맞는 피해자로 나타날 때 사람들은 서래를 안다고 생각할 거예요. '저 여자는 불쌍한 여자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에 반박하고 싶었죠. '나는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불쌍한 여자가 아니에요'라고. '철썩'(서현우)에게 폭행당하지만 그의 엄마를 생각해서 딱 10분만 맞아준 후 포크로 그를 찍어버리죠. (…) 남편도 처음엔 한국에서 살기 위해 참아줬지만, 선을 넘으니까 죽여요. 저는 서래를 힘이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어요."(<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20-21p)

<NUDE>, <TOMBOY> 등 한국 아이돌 기준으로는 다소 파격적인 여자상을 가사에 녹여낸 걸그룹 'i-dle'(아이들)의 노래들은 '걸그룹'에 한정되지 않으려는 가수 전소연의 아이디어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저는 저희에게 걸그룹이라는, '걸'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을 의식하고 그에 한정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제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아요. 인간으로서 나에 대해 당당하고 싶고, 타인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이들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것을 다 누렸으면 싶고요."(<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149p)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는 여자들 앞에는 그들에게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선배 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들보다 앞서 파격적인 이미지를 선보인 걸그룹 '2NE1'의 리더 씨엘은 유년 시절 개성 강한 '언니' 예술가들을 동경한 결과 독보적인 여자 가수로 거듭났다.

"여자 래퍼들과 뮤지션들, 미시 엘리엇, 로린 힐, 릴 킴, 에리카 바두 등등. 개성이 강한 언니들을 좋아했어요. 자기가 누구인지 음악과 춤, 패션으로 보여주는 아티스트들. 가수가 되는 건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그녀들에게 푹 빠졌죠. 어릴 땐 춤을 더 좋아했지만, 결국 랩과 노래를 해야 저런 퍼포먼스를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수를 꿈꾸게 된 거예요."(<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243-244p)

앞서가는 여자들은 자신을 비롯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여자들을 위해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몸소 뚫어내려 한다. 안경을 쓰고 브리핑을 해 화제를 모았던 강지영 아나운서는 중년 여성 아나운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이예지 작가의 푸념에 "내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여자 아나운서는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가정을 꾸리는 것도 큰 축복이고 존중받을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현실이죠. 그리고 여성 아나운서들은 젊어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나이 들면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고, 시청자의 니즈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지만 그 현실을 극복해 보고 싶습니다."(<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273p)

▲배인규 신남성연대 대표가 26일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탄핵 찬성 측 피켓을 뺏어 찢은 뒤 씹어 먹고 있다.ⓒ신남성연대 유튜브 갈무리

책을 덮고 다시 남성 사회를 생각해 본다. 여자들이 두려움과 편견을 깨부수며 서로를 지탱하는 동안 남자들은 뭘 하고 있나. 남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겠다며 등장한 '신남성연대'와 유사 유튜버들은 왜 고작 여성들을 혐오하고 군부독재를 시도한 윤석열 정권을 옹호하는 일밖에 하지 못했나.

언젠가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의 남자 판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성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남자들을 억압하는 남성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주어진 권력을 폭력이 아닌 소외된 남자들에게 사용해 가능성과 용기를 주는 문화가 남성 사회에도 자리 잡기를 바랄 뿐이다.

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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