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갈수록 기후위기를 비롯한 복합위기가 더욱 심각하고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고, 이에 따라 여러 위기를 극복하거나 최소한 완화하려는 다양한 대책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대책들을 보면, 늘 빠짐없이 국가를 정책 집행의 주된 행위자 혹은 무대로 상정한다. 그럴 만도 하다. 기후급변 같은 현상은 그 규모나 양상이 너무나 거대하여 인간 사회의 여러 제도 중에서 '국가' 정도의 강력한 실체가 아니면, 대응이 아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국가는 문제 해결 수단이라기보다는 문제를 악화시키는 주역에 더 가깝다. 지금 인류의 기후 대응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합중국 정부다. 지구상에서 제일 막강한 국가가 위기 해결을 앞장서서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기민하고 효과적인 탈탄소 전환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국가기구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막고 핵발전에 올인한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며 등장한 이재명 정부-더불어민주당조차 핵발전 확대 논리를 추종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실망이나 환멸 또한 크다. 그리고 문명과 사회의 전환 과정에서 도대체 국가의 위상과 역할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국가는 과연 전환의 주역 혹은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한 세기 전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이 개혁 노선이냐 혁명 노선이냐를 따지면서 '국가'에 관해 치열한 논쟁했던 때를 연상시키는 질문이 복합위기 시대에 다시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 아래 복합위기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짚기 위해 연속세미나 '장기비상사회와 전환국가'를 기획했고, 그 첫 번째 세미나를 노회찬재단과 함께 2월 26일 '함께맞는비'포럼 제15차 토론의 형태로 공동개최했다. 20세기에 한때 '혁명국가'가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복지국가'가 등장했듯이 기후급변 등에 대처하면서 사회 전체의 전환을 책임지는 '전환국가'가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이런 '전환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현존 국가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지 등을 1년에 걸친 연속세미나를 통해 규명하려는 토론의 출발이었다.
장기비상사회와 전환국가
이날 첫 번째 발표는 생태환경 문제를 중심으로 국가를 연구해온 황진태 교수(동국대, 북한학과)의 '전략관계적 국가이론의 정치생태학적 의의와 한계'였다. '전략관계적 국가이론'이란 국가를 특정 계급의 단순한 도구로 여긴 좌파의 고전적 국가론을 극복하려 한 영국 정치학자 밥 제솝이 전개한 이론이다. 제솝은 국가를 계급 간 세력관계가 관통하고 응축되는 무대로 바라본 그리스 정치학자 니코스 풀란차스의 국가론을 계승, 발전시키려 했다. 그래서 헤게모니를 쟁취하려 하는 다양한 세력들의 '전략'적 행동이 교차하는 '관계'로서 국가에 접근하는 '전략관계적 국가이론'을 가다듬었다.
황진태 교수는 20세기 후반에 정리된 이런 국가론이 기후위기 같은 최근의 생태환경 문제에도 적실성을 지니는지 물으며 발표를 시작했다. 아직 전 세계적으로 생태환경 문제가 지금만큼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전이었던 1979년에 사망한 풀란차스는 이런 물음에 만족스럽게 답할 수 있는 분석을 남기지 못했다. 반면 동시대인이며 2010년대에도 그린뉴딜 등의 구체적 사례를 계속 검토한 제솝은 일정한 이론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황 교수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제솝이 그린뉴딜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경제적 상상'과 '생태적 상상'이라는 개념이다.
'상상'은 "외부 현실에 대한 순수한 재현이 아니다". "다수가 원하는 현실을 선택, 묘사하고 앞으로의 미래 방향을 예측하여 미래의 결정,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제솝은 자본주의에서는 "이윤 추구와 시장을 통한 축적을 중시하며 사회적 관계와 자연까지 상품화하는" '자본 중심적 상상'이 지배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경제적 상상'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칼 폴라니가 말한 '실체적 경제'를 지향하는, 즉 "인간의 삶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의 충족에 주목하며 비시장적 관계와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실질적 제공 중심 상상(substantial provisioning imaginary)'이다.
한편 '경제적 상상'과 구별되는 '생태적 상상'은 "인간 중심성을 넘어서 자연과의 관계를 중심에 두며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과 균형을 중시"한다. 제솝은 그린뉴딜이 '실질적 제공 중심 상상'과 '생태적 상상'이 결합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실질적 제공 중심 상상'을 통해 생존 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세력의 전략이 '생태적 상상'을 통해 전환을 추구하는 세력의 전략과 결합함으로써 국가가 기후위기 대응의 활발한 무대가 될 수 있다 봤던 것이다.
그러나 황 교수는 이런 접근법이 좋은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기후위기 등의 생태환경 문제가 더욱 진전된 현 상황에서는 결코 이 수준에 만족할 수만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제껏 제솝이 내놓은 개념이나 분석만으로는 '기후'나 '생물종' 같은 '자연/비인간'의 주체성 혹은 행위성을 충분히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풀란차스-제솝 식으로 국가를 "단일 행위자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이 경합하는 장"으로 바라봐야 한다면, 이제는 그 "다양한 세력들"의 자리에 '자연/비인간' 또한 포함시켜야 한다.
황 교수는 이를 한국의 국가기구가 자연과 관계를 맺어온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흔히 이명박 정부 들어 '4대 강'이 쟁점화됐다고 알고 있지만, 한반도 중남부를 흐르는 여러 강이 '4대 강'으로 정의, 정리된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시대부터 한국의 국가기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에 따라 '강'이라는 '자연/비인간'을 특정하게 규정하고 재현했다. '강'은 '4대 강' 개발 문제를 통해 비교적 최근 부각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를 관통하는 축적 전략, 헤게모니 전략의 중요한 요소로서 동원, 포섭됐던 것이다. 이제, 기후위기 시대에는 이런 기존 경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비인간'의 존재와 행위성이 국가에 투영되어야 한다.
'비인간' 행위자까지 품은 '전환국가'를 향해
두 번째 발표자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은 ''전환국가'를 탐색하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제목 아래, 전환국가의 문제의식을 좀 더 실천적인 차원에서 전개할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 소장은 다음 같은 발언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복합위기로 인한 장기비상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재인식이 절실하다. 짙은 녹색이든 옅은 녹색이든, 또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각각의 관점과 입장은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특정한 국가를 상정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국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는 시민, 공공기관, 기업, 지역의 역할과 기능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사회-자연-국가의 관계에 대한 심층 고찰과 '전환국가론'을 구상하는 이론과 실천을 통해 그 의미와 한계를 밝혀야 한다."
이 소장은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려는 최근의 여러 담론들을 소개하면서 그 중 하나로 '기후안보'론을 소개했다. "기후 변수에 의해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6차 보고서의 결론을 바탕으로 '기후안보'라는 표어 아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후안보는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안보이기 때문에 기후정의 입장과는 상충된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과 국가의 책임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참으로 다양한, 서로 충돌하기까지 하는 담론들이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후안보'론과 구별되는, 좀 더 긍정적인 가능성은 복지국가의 역사적 성과와 전환국가의 가능성을 이어보려는 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후위기 대응은 '파국과 회복' 식의 사회적 학습이라는 사후적 개입으로는 불가능하다. 실패 이전의 사전적 학습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기후위기 대응의 첫 동맹은 완화, 적응, 투자와 새로운 방식의 제안을 제기할 수 있는 집합적 능력을 의미한다. 이런 능력은 복지국가 및 그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회복탄력적 복지국가/사회투자 복지국가는 정의로운 전환에서 필수 요소다."
'녹색헌법'론도 전환국가를 탐색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간 녹색헌법을 제창한 이들은 21세기의 헌법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명중심주의를" 담고 "기본 권리와 기본 의무를 더 폭넓은 주체들에게로 확장하고 조화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려면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정치 제도, 자치 분권의 강화, 대화하고 합의하는 입법부, 민의에 따라 일하는 행정부, 민주성과 전문성을 높이는 사법부, 성장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전화된 경제 원칙 등"이 헌법에 명기되어야 한다.
이 소장은 이런 모든 시도의 핵심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미래지향적인 실험과 학습의 공간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전환정치'를 구성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존 대의민주주의가 이런 전환정치를 배양하기보다는 오히려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는 추첨 등을 통해 참여한 시민들의 숙의로 정책을 수립, 제안하는 '기후시민의회'를 전환정치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소장은 "기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입증된 기존의 인간중심적 법률 및 제도적 구조의 내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사물의 의회' 프로젝트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후시민의회를 비인간 행위자들까지 대표로 참여하는 '사물의 의회'로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비인간'이 국가를 관통하는 주요 세력 중 하나로 인식돼야 한다는 황진태 교수의 발표와 만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비인간을 권리 주체로 보는 접근법, 충분히 현실적일 수 있다
발표가 끝난 뒤에 1시간 가까이 토론이 있었다. 쉽지 않은 이론적 내용이 중심이 된 발표였음에도 상당히 활발하게 질의-응답과 토론이 이어졌다. 가령 한 온라인 참석자는 현실의 국가들이 기후위기의 규모와 속도에 맞는 전환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까지 하는 상황에서 국가를 둘러싼 이런 토론이나 모색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황진태 교수는 "발표문에서 다룬 제솝의 국가이론 등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국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국가를 우회할 수는 없다. 국가에 실망했다고 다른 행위자들로만 대안을 구성하려 해서는 생태환경 문제를 결코 제대로 다룰 수 없다. 풀란차스나 제솝이 강조하듯이, 국가를 자본이 아닌 '우리'가 활용하겠다는 태도로 접근해야만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국가를 분석하고 대안 전략을 모색하면서 '자연/비인간'을 행위자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문제제기에 관해서도 여러 질문과 의견이 나왔다. 김정진 변호사(노회찬재단 비전포럼 운영위원)는 최근 외국에서 강이나 숲 같은 '자연/비인간'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발표문의 문제제기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외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사법부도 설악산 케이블카를 둘러싼 판결 등에서 소송 당사자를 넓게 해석하는(지역 주민 등 포함)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이렇게 생태환경 문제를 놓고 '당사자'를 넓게 해석하는 분위기에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비인간 행위자를 권리의 주체로 보는 관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두 시간을 꼬박 채운 발표, 토론에도 불구하고 전환국가가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 취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고민거리로 남았다. 그러나 이날 토론회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기획한 연속 세미나의 '시작'이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이 고민거리를 풀어나갈 계획이다. 오랜 공백을 깨고 모처럼 다시 시작된, 사회변혁과 국가의 관계에 관한 진지한 토론에 계속 많은 관심과 참여가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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