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에 주목한 괴짜 식물학자 "칭찬만으론 배가 고픕니다"

[인물로 본 세계사] 실패를 딛고 실리를 챙긴 윌리엄 커티스의 위대한 유산

마구간지기에게 배운 식물학, 주류학계에 던진 출사표

1746년 1월 11일, 영국 햄프셔의 작은 마을 알톤에서 태어난 윌리엄 커티스(William Curtis, 1746-1799)의 출발은 초라했다. 14살에 할아버지 밑에서 약재상 수습을 시작한 이 소년은 처방전보다 약초 자체의 생명력에 매료되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그는 정식 학자가 아닌 마구간지기에게서 식물 판별법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식물학은 귀족들이 라틴어로 성벽을 쌓고 그들만의 리그를 즐기던 전유물이었다. 이름 없는 약재상 도제가 마구간지기의 지식을 흡수해 학문의 바다로 뛰어든 것 자체가 이미 체제에 대한 통쾌한 반란이었다.

커티스는 25세가 되던 1771년, 곤충채집과 보존에 관한 지침서를 펴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현대분류학의 거장 칼 폰 린네의 저작을 영어로 번역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학벌과 배경을 중시하던 주류학자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첼시 약용식물원의 시연자로 일하며 실력을 쌓았다. 결국 그는 런던 람베스와 브롬턴에 자신만의 거대한 식물원을 세우기에 이른다. 6,000종이 넘는 식물을 직접 재배하고 관찰하며 얻은 데이터는 훗날 그가 펼칠 거대한 프로젝트의 밑거름이 되었다.

'런던의 잡초'라는 위대한 실패, 그리고 시대의 기록

커티스의 인생에서 가장 야심찼던 프로젝트는 바로 『런던 식물지(Flora Londinensis)』(1777~1798)였다. 런던 반경 16km 이내에서 자생하는 토착식물들을 집대성한 이 6권의 대작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한 예술적 정점이었다. 제임스 소어비, 시드넘 에드워즈와 같은 거장들이 수작업으로 채색한 432장의 동판화는 가히 식물학의 보석이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귀족들은 식민지에서 건너온 화려하고 이국적인 열대식물에만 눈독을 들였다. "우리 집 뒷마당에 널린 잡초를 왜 돈 주고 봐야 하느냐"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비평가들은 극찬했지만, 실제 구독자는 300여 명에 불과했다. 제작비는 천문학적이었고 재정적 참패는 예견된 일이었다. 20여 년을 바친 청춘의 기록이 파산의 위기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 실패를 '금자탑'으로 재정의 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팽창하며 자연이 파괴되던 시기, 커티스는 아스팔트와 벽돌 틈새에서 피어난 이름 없는 풀들을 기록함으로써 '도시 생물 다양성' 연구의 효시를 닦았다. 당대의 유행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본질적 가치에 주목한 그의 고집이 오늘날 인류에게 소중한 생태적 지도를 남긴 셈이다.

"칭찬 대신 푸딩을", 실용주의로 일궈낸 237년의 기적

재정적 타격을 입은 커티스는 좌절하는 대신 유쾌한 전략수정을 선택했다. "칭찬(Praise)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백과 함께, 그는 1787년 『식물 잡지(The Botanical Magazine)』를 창간했다. 이번에는 철저히 대중의 눈높이에 맞췄다. 정원가꾸기를 즐기는 신사 숙녀들을 위해 화려한 원예식물을 소개했고, 가격은 단 1실링으로 낮췄다. 작고 휴대하기 편한 크기에 상세한 재배법을 곁들인 이 잡지는 매달 3000부 이상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뜨렸다.

커티스는 생전에 "식물지는 내게 명예를 주었지만, 이 잡지는 내게 푸딩(실속)을 주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1799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잡지는 멈추지 않았다. 윌리엄 후커와 조지프 후커 등 큐 왕립식물원장들이 바통을 이어받았고, 월터 후드 피치와 마틸다 스미스 같은 불세출의 화가들이 수만 점의 정밀화를 그려 넣었다. 이 잡지는 놀랍게도 현재까지 2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끊김 없이 발행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학 정기간행물이자, 기후변화 연구의 핵심 사료가 된 이 잡지의 시작은 바로 한 '실패한 천재'의 유연한 사고방식이었다.

지금 한국사회를 향한 커티스의 다섯 가지 일침

윌리엄 커티스의 생애를 관통하는 정신은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거울에 비춰볼 때 더욱 선명해진다.

첫째, 실패를 '성공의 한 조각'으로 품는 배짱이 필요하다.

한국사회는 실패에 지나치게 가혹하다. 사업실패나 경력단절을 '낙오'로 규정하고 재기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커티스에게 『런던 식물지』의 상업적 실패는 『식물잡지』의 성공을 위한 가장 비싼 수업료였다. "칭찬도 좋지만 푸딩도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모든 도전자가 가져야 할 건강한 실용주의다.

둘째, '발밑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K-팝의 화려함과 초고층 빌딩의 야경에 환호하지만, 정작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골목길의 역사와 동네 어귀의 노거수(老巨樹)는 쉽게 허문다. 커티스가 런던의 잡초에 주목했듯, 우리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보관정신'이 살아나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만의 독창적인 '지역 특산물'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지식 민주주의'가 절실하다.

학계의 어려운 용어와 폐쇄적인 논문문화는 일반대중을 소외시킨다. 커티스는 라틴어 대신 영어를 선택했고, 전문가가 아닌 정원사들을 위해 글을 썼다. 공공재인 지식이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시민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

넷째, '빨리빨리'를 넘어선 '백년대계'의 지원이 필요하다.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한국의 연구풍토에서는 237년 된 잡지가 나올 수 없다. 정권의 향배에 따라 흔들리는 정책이 아니라, 수십 년을 내다보는 문화·학술 프로젝트에 대한 장기적 안목과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융합적 사고다.

커티스의 판화는 과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미학의 완전한 결합이었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서로의 영역을 무시하는 경직된 교육제도로는 제2의 커티스를 길러낼 수 없다. 기술에 감성을 입히고, 예술에 논리를 더하는 유연함이 21세기 경쟁력의 핵심이다.

우리 곁의 '윌리엄 커티스'를 응원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곳곳에는 커티스 같은 이들이 있다. 재개발 구역의 담장화를 기록하는 사진가, 소멸해가는 지역 사투리를 채집하는 청년, 전통시장의 낡은 요리법을 디지털로 옮기는 요리사들이다. 비록 그들이 지금 당장 정부의 훈장을 받거나 수억 원의 매출을 올리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이 기록하는 '우리시대의 잡초'는 훗날 어떤 보석보다 귀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윌리엄 커티스의 묘비명은 말한다. "자연이 꽃을 피우는 한, 그대의 작업은 기쁨을 주리니." 2지금 우리도 눈앞의 화려한 꽃송이만 쫓기보다, 발밑에 끈질기게 피어난 잡초의 생명력에 눈길을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누군가 당신의 열정을 두고 "그게 돈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커티스처럼 킬킬거리며 답해 주자.

"지금은 칭찬을 쌓고 있는 중이야. 곧 푸딩도 따라올 걸세!"

▲윌리엄 커티스 ⓒ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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