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탓 동료·코치 660명 사망…우크라 선수 두 번 울리는 올림픽

추모 헬멧 탓 출전 금지에 전문가 "IOC, 문제 더 키워"…외신 "전쟁 피해국·소수자 출신 선수들 딜레마 빠뜨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스키 선수 드미트로 셰피우크는 4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날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 선수권대회 참가 중 "인근 도시들로 폭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그 뒤 2년간 스포츠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13일(현지시간) <AP> 통신은 "우크라이나 선수들에겐 여기까지 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싸움"이라고 짚었다.

힘겹게 도착한 올림픽 현장에서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또 다른 갈등과 마주했다. 올림픽에서 순간적으로 세계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는 순간을 이용해 조국의 어려움을 알릴 것인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경기에 집중할 것인가다. 셰피우크는 "우크라이나 영웅들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작은 쪽지를 장갑에 붙이는 방식을 택했다. <AP>는 이러한 소극적 표출 방식이 전쟁 피해를 입은 국가나 소수자 공동체 출신 선수들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적극적 표현을 결심할 경우 꿈이 송두리째 날아갈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러시아 침공에 희생된 동료 운동선수들의 이미지를 새긴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가려 한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는 12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 헤라스케비치는 헬멧이 추모의 의미라고 설명했지만 IOC는 이를 올림픽 경기장·시설 등에서 시위·정치적 선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올림픽 헌장을 위반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IOC는 성명에서 헤라스케비치가 "선수 표현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메시지 자체가 아닌 메시지 표현 "장소"가 문제의 핵심이었다고 밝혔다. IOC는 추모 완장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헤라스케비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조국이 탄도미사일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동료들에 추모를 표하고자 하는 선수를 막은 것은 보기 흉한 처사"라며 "IOC의 문제는 스포츠와 정치가 분리될 수 있다는 낡은 거짓말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12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헤라스케비치에 자유 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전면전이 벌어지는 동안 우크라이나 운동선수와 코치 660명이 러시아에 살해됐다. 이들 수백명은 다시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며 헤라스케비치의 헬멧에 새겨진 우크라이나 선수들의 초상은 "명예와 추모"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중립" 깃발 아래 러시아 선수들이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스포츠는 망각을 의미해선 안 되며 올림픽은 전쟁을 멈추는 데 기여해야 하고 침략자의 손에 놀아나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미 CNN 방송은 헤라스케비치를 지지하기 위해 코르티나 슬라이딩 센터에 모임 우크라이나인들이 젤렌스키 대통령 의견에 공감했다고 전했다. 전쟁 발발 5일째 되는 날 남편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피난한 이리나는 헤라스케비치의 헬멧이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가 여전히 전쟁 중이며 대가가 무엇인지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또 다른 우크라이나인 올하 셰르히나는 "우크라이나에 있어 그는 이미 승자"라고 밝혔다.

올림픽에서 정치적 표현을 빌미로 선수들이 실격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4년 파리올림픽 브레이킹 비걸 종목에 출전한 아프가니스탄 난민 마니자 탈라시가 예선전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해방하라"는 문구가 적힌 망토를 입었다는 이유로 실격됐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선 미국 육상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흑인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시상대에서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리는 상징적 행위, 이른바 '블랙 파워 살루트' 표현을 했다가 출전 정지를 당했다.

영국 몽포르대 스포츠사 전문가 헤더 디히터 교수 <AP>에 역사적으로 IOC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건을 더 크게 만드는 데 일조해 왔다며 "이번에도 (헤라스케비치의) 헬멧을 크게 찍은 사진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카를로스와 스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들은 침략국이나 IOC가 아닌 자국 대통령에 의해 표현의 자유 문제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지난달 미네소타주 이민 단속에서 연방요원에 의해 시민 2명이 사살된 뒤 미국 프리스타일 스키 국가대표 선수 헌터 헤스가 "지금 미국을 대표하는 데 대해 복잡한 심정이 든다"고 토로하자 지난 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헤스를 "패배자"라고 비난하면서다.

다음날 한국 이민자 출신 부모를 둔 미국 스노보드 국가대표 선수 클로이 김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패배자' 발언 관련 질문을 받고 "부모님이 이민자기 때문에 이번 일은 내게 매우 와닿는다"며 "이런 시기엔 우리가 하나로 뭉치고 서로를 지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동료 선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우리에겐 현재 상황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권리가 있고 사랑과 연민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이 더 많이 보였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여자 하프파이프 종목 3연패를 노렸던 클로이 김은 13일 한국 최가온 선수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은메달을 획득했다.

▲13일(현지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가 러시아 침공으로 숨진 동료들이 이미지가 새겨진 헬멧을 들고 밀라노 스포츠중재재판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터=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스키 선수 드미트로 셰피우크가 결승선 부근에서 "우크라이나 영웅들이 우리와 함께한다"고 적힌 쪽지를 들어 올렸다. ⓒAP=연합뉴스

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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