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를 신청하면서 기록의 필요성을 절감해 생애사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아픔과 고통뿐 아니라 개인의 꿈과 행복에 대해 묻는 인터뷰를 했고, 재해경위서, 진술서가 아닌 삶을 담은 글을 적었습니다. 올 한 해 2월부터 한 명씩 총 11명의 삶을 구술기록으로 전해드립니다.
지금도 꿈을 꿔요. 이제 꿈속에서 계속 되뇌는 게 있어요. '내가 여기 왜 왔지? 아팠던 곳인데 다시 아프면 어쩌지?' 아직도 그게 남아 있는 거죠. 트라우마가. 그러니까 딱 봤을 때 전체가 반도체 분위기가 딱 나면 답답해요. 꿈속에서도. 엄청나게 답답하면서 나를 압박해 와요. 근데 그 꿈속에서도 돈을 벌어야 되는데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갈 곳이 없어서 내가 여기 또 왔구나. 여기서 다시 아프면 어쩌지.' 그 꿈에서도 계속 그랬던 기억이 나요. 반도체가 저한테 기쁨으로 있지는 않아요. 아픈 게 진행 중이니까.
내가 돌봐야 할 대상
학교 다닐 때는 워낙 집안이 잘 살지 못하다 보니까 그냥 돌봐야 되는. 그러니까 제가 돌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장이라는 느낌을 많이 느끼면서 살았죠. 어머님 같은 경우도 아버님과 오랫동안 같이 안 사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 되셨고. 그러다 보니까 엄마 혼자 자식 둘을 키워야 되니까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엄마는 내가 나중에 크면 돌봐 드려야 될 대상이고, 조금 가여운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고, 동생도 내 동생이다 보니까 돌봐야 될 대상으로만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성인이 되면 많이 돌봐 줘야 될 사람들이다라는.
최유선은 1977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전북 익산, 당시 이리에서 엄마,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맏이이기에 심부름을 하고 동생을 챙기는 것은 유선의 몫이었다.
어렸을 때는 집에 남자가 없다 보니까 연탄 같은 거 나를 때도 막 리어카 같은 걸로 제가 나르고, 엄마가 어디 갈 데 있으면 자전거로 맨날 태워다 드리고. 그러니까 내 기억에 중학교 때는 앞에는 남동생, 뒤에는 엄마 이렇게 자전거를 맨날 타고, 엄마 출퇴근할 때도 태워다 드리고, 동생 어디 갈 때도 맨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앞뒤로. 그게 자가용이었죠. 자전거가. 그때는 그랬던 것 같아요. 거기다가 쌀도 싣고 심부름, 마트 같은 데 가면 그런 것도 사가지고 그랬던 것 같아요.
유선은 '우리 부모님이 돈이 있는지 없는지' 아이들이 자연히 알게 된다고 말했다. 어린 유선은 눈치를 보며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말을 안 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았다. 그럼에도 욕망이 터져 나왔던 순간도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집 형편에는 절대로 이걸 해 줄 수 없는 걸 알아. 내 친구가 서울을 갔다 왔어요. 친척네 집에 갔다 옷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쁜 옷을 딱 사 입고 왔는데, 그날은 제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엄마한테 땡꼬집이라 그러죠. '누구는 누구는 이렇게 해서 옷을 사 입었는데 왜 나는 못 사 줘' 이러면서 그냥 알면서도, 그걸 못 사 줄 줄 알면서도 땡깡을 부리는 거예요. 그 어린 마음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엄마도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렇죠? 근데 그때는 그랬어요. 우리 엄마는 열심히 사는데 왜 우리 집은 항상 뭔가가 부족해야 되지. 왜냐하면 쌀도 없을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가지고 막 고민을 많이 할 때가 있었어요.
보통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
솔직히 제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 못했어요. 항상 주변에서 친인척들이 하는 말씀이, 특히 외가 쪽 하시는 말씀이 "엄마가 고생을 그만큼 하니 네가 희생을 해라."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죠. "여자는 많이 배워 봐야… 별로 그렇게 많이 배우지 않아도 된다." 그 얘기를 항상 듣고 자랐던 것 같아요.
유선은 맏딸로 가족을 위한 희생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이는 '여자는 많이 배워 봐야 소용이 없다'는 여성 혐오적인 편견과 결합되었다. 유선의 또래가 대학에 진학하던 1990년대 후반의 대학 진학률을 살펴보면 남성의 진학률이 여성의 진학률보다 5% 포인트가량 더 높았다. 오늘날 여성의 진학률이 남성보다 더 높은 것과 상이하게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는 대학을 되게 가고 싶어가지고 엄마 몰래 대학을 간다고 했는데 저희 담임 선생님도 알았어요. 저희 집이 굉장히 어렵다는 거를. 또 엄마랑 그 선생님이랑 아시는 사이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엄마가) 원서 들어간 걸 안 거예요. 대학 들어가려고 했던. 그러니까 난리가 난 거예요 집에서. 그때 엄청나게 많이 혼났어요. "네가 지금 대학을 갈 수 있는 그런 게 아닌지 뻔히 알면서 왜 자꾸 고집을 하냐." 친인척들도 저를 다 설득을 하는 거예요. "엄마를 도와줘야지 네가 그렇게 가 버리면 엄마가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 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냥 그랬던 것 같아. 그냥 자연스럽게 나라는 존재가 이 집이 우선은 살아야, 좀 먹고 살아야 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생각을 했지, 내 꿈을 펼친다 이런 거는 아예 생각도 못 했던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 남들도 다 가듯이 고등학교 나오면 대학 가고, 대학 가면은 때가 되면 취업을 하고, 시집을 가고 이런 형식으로 가고 싶었지. 그게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막 엄청난 무슨 꿈이 있거나 이런 게 아니라, 좀 멋지게 살고 싶었어요, 나름. 캠퍼스도 좀 걷고 싶었고.
마음이 떠 있었던 일
엄마와 주변 친척들의 강경한 주장에 유선은 본인의 꿈은 뒤로 미룬 채 집을 우선 먹여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5년 12월부터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저는 솔직히 되게 낯설었어요. 엄청나게. 적응하는 게 조금 힘들었어요. 근데 어떻게 해요? 적응해야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좀 많이 했었어요. 다니면서도.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이 있다 보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외로웠죠. 많이 외로웠어요. 거기를 다니면서도 그냥 학교 가고 싶은 생각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래가지고 학원도 많이 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나거든요. 이것저것도 많이 배워보고. 그래서 굉장히 외로움을 많이 느꼈어요. 거기서 아예 그 일이 내 일이다 생각하고 일을 하면 되는데,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인 거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보니까 거기에서 오는 외로움이 컸죠.
유선은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일을 할 때도 반도체의 원리나 특정 작업을 하는 이유를 이해했더라면 더 재미를 느꼈을 테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하는 반복 작업은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솔직히 반도체라고 말은 듣긴 하지만, 저희가 볼 적에는 동그란 원판에 그냥 칩이 있는 정도지 뭐 거기에서 엄청난 메리트를 느끼거나 그런 게 없으니까. 그냥 화학용품 쏴가지고 두께가 얼마네 얼마네 그 수치만 보는 거지, 어느 정도는 깎아야 되고, 어느 정도는 문제가 생기고, 오염도가 생기고 이 정도만. 솔직히 재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뭔가를 좀 알고 그 일을 했으면 더 재미를 느꼈을 텐데, 해야 되는 공정이니까 하는 거고,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하는 거라 재미를 못 느꼈던 것 같아요.
엄마한테 '이제 그만 다니고 싶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그러고 다시 다른 데 취업을 가면 안 되겠냐'는 얘기를 넌지시 꺼냈지만 당시 엄마도 실직을 한 상황이라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 이름은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가명 처리했습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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