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진실을, 본인의 부끄러움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다시! 리영희] 내 친구 리영희를 만나는 책, <역정(歷程)>

마음에 어른이 없었던 시절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인천 배다리에 있는 작은 헌책방에서 리영희의 책 <역정> 이 꽂혀 있기에 구입해서 그날로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스물일곱 살 무렵의 나는 세상의 거창한 구호들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홀로 남겨진 듯한 지독한 환멸의 잔해들을 곱씹으며, 세상의 이면과 인간의 뿌리를 더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교 시절 뒤늦게 알게 된 광주의 진실 이후, 내가 믿었던 어른들의 세계는 이미 한 번 무너졌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투사들이 권력의 현관 앞에서 방문객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어른'이라는 존재를 마음에서 게워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7년 여 간 연애하던 이와 헤어졌고, 대학을 졸업하고 잘 다니던 광고회사마저 그만두고 인천의 작은 문화재단에서 이제 창간하지 막 3년여가 된 잡지 <황해문화>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리영희는 나의 선배 세대들에게는 '사상의 은사'였다지만, 내게 그는 은사라는 거창한 말보다 조금 특별한 '친구'로 다가왔다.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생이고, 나는 1970년생인데 이런 나이 차이를 넘어 그를 친구처럼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읽은 리영희의 첫 책이 <역정-나의 청년시대>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가 잃어버렸던 인간(민중)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방황하는 청춘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존재였다. 책 속의 리영희를 실제로 만난 것은 1999년 8월의 일이었다.

<황해문화>를 발간하고 있는 새얼문화재단은 1986년부터 매월 둘째 주마다 '아침대화'라는 조찬강연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 당시 한양대 대학원 대우교수였던 그를 모시고 '남·북문제의 이해를 위한 기초인식;이란 주제의 강연을 청해 들었다.

강연을 마친 리영희는 하얗게 센 머리에 약간은 불편한 걸음으로 우리 사무실을 방문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당신은 지방에서 발간되는, 당시만 하더라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에 가까운 잡지에서 일하는 젊은 편집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툭 치며 한마디를 건넸다.

"누가 이렇게 좋은 잡지를 만드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듬직한 청년이었구먼"

칭찬에 배고팠던 탓일까? 인정에 목말랐던 것일까? 나에게 그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의 편에 서서 외롭게 걷는 자들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마지막 격려도 아니었다. 당신은 이듬해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 몇 번인가 친필 팩스를 보내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감열식 팩스용지에 적힌 친필 글들을 사진을 찍거나 복사라도 해서 보관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쉽게 생각한다. 비록 물질적 흔적은 남아있지 않아도 그는 내 마음이 부대끼거나 흔들릴 때마다 꺼내 보게 되는 가장 정직한 척도였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사상의 은사'라 부르지만, 나는 당신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어 질투 나는 친구'라 부르고 싶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신의 문장이 찬란하게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글과 주장에 항상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의 사상과 글을 지탱하는 당신의 삶이 단 한 순간도 거짓 위에 서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다"는 고백이 존경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라면, 나는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두렵다. 당신처럼 감옥을 드나들며, 번번이 해직당하고, 민중의 어둠을 질타하면서도, 권력의 칼날 앞에서 진실을 말할 자신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덧 내년이면 나 역시도 지역의 한 매체에서 일한 지 만 30년이 되지만, 이 환멸의 시대에 당신 같은 어른이 앞서 걸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다시 '권력'을 감시하고, 민중의 어둠을 일깨우고, '사람'을 공부하며 세상의 이면을 더듬어 볼 용기를 얻는다. 그때 당신이 어깨를 쳐주었던, 그 '청년'은 이제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정> 에서 만난, 시간을 건너온 벗

▲ <역정>, 리영희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사람들은 여전히 리영희 당신을 '사상의 은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이라 부른다. 1970~80년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같은 책들로 인해 많은 젊은이들이 당신의 사상적 세례를 받았다.1)

아홉 번의 연행과 다섯 번의 수감 등 옥고를 치르면서도 꺾이지 않았던 당신의 지조는 시대를 밝힌 등불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조금 다르게 만났다. 당신이 내게 처음 말을 건넨 책은 그 유명한 저작들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집필한 유일한 자전적 에세이, <역정(歷程): 나의 청년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당신은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내가 그 책을 처음 만났을 무렵, 책 속의 당신은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뜨거운 청년이었다. 우연찮게도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나는 그 책에서 시대를 호령하던 거인의 모습이 아닌, 고뇌하고 방황하며 진실을 찾아 헤맸던 한 젊은이의 역정을 보았다.

당신은 <역정> 서문에서 당신의 책을 읽고 삶이 바뀐 젊은이들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으로 그들에게 "나의 삶과 살아온 과정" 역시 고백해야 할 "도의적 의무"를 느꼈다고 적었다. 권력의 탄압으로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마천이나 백범 김구 선생처럼 자신의 생애에 대한 지적 종지부를 찍는 심정으로 쓴 글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원고를 완성하지도 못했다. 1983년, 글을 쓰던 중에 또다시 연행되어 갔고, 당신의 자전은 1963년, 젊은 시절에서 멈춰버렸다.

나는 멈춰버린 그 페이지들 속에서 당신을 만났다.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자서전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욱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상의 거목이기 이전에, 비록 나와는 다른 시대였지만, 그 고민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청년이었다.

당신이 남긴 저작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당신을 존경하지만, 나는 <역정> 속의 당신을 '친근한 벗'으로 기억한다. 시대를 초월해 책 속에서 비슷한 연배에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어주는 시간을 함께 건넌 친구였다. 당신의 불완전함 속에서 나는 완전한 인간미를 보았고, 그것이 바로 당신의 진면목이라 생각한다.

'지식의 최전선'에서 함께 길을 묻다

어떤 이들은 당신이 중국을 미화했다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곤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이 <대화>에서 고백했듯, 그것은 이념적 선호가 아니라 '병적인 편견'과 '제로 상태의 무지'에 빠진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진실을 비추려 했던 지독한 분투였다는 것을.

당신이 <조선일보> 외신부장이던 1967년, 문화대혁명을 대담할 지식인이 전국에 세 명뿐이었다는 일화2)는 지금 들어도 참담하고 서글픈 코미디 같다. 그런데 당신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난 2025년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30여 년을 잡지쟁이로 살아온 나는 당신의 그 탄식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냉전의 금기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취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들어앉았다. 깊이 있는 지역학 연구는 설 자리를 잃었고, 교수들은 논문 편수라는 수치에 매몰되어 세계를 읽는 거대 담론을 포기했다.

현장의 데이터보다 외신을 2차 가공하는 이른바 '데스크 연구'가 판을 치는 지금, 독자적인 시각으로 세계정세를 꿰뚫으려 했던 당신의 그 고독한 분투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새삼 절감한다.

누군가는 당신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이 고리타분한 계몽서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이 책은 여전히 책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뛰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그 속엔 실수 없는 성인(聖人)의 위대한 삶이 아니라, 고뇌하고 부딪히며 어른이 되어가는 진짜 청춘의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의 포화 속에서 통역장교로 복무하며 '의식의 눈'을 뜨던 당신의 청년 시절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온다. 지리산 자락에서, 그리고 거창과 국민방위군 사건의 참상 속에서 당신이 목격한 것은 국가라는 이름의 부도덕이었다. 애국이라는 명분에 가린 추악한 진실을 보며, 당신은 안락한 길 대신 가시밭 같은 지식인의 길을 택했다.

그의 청춘은 전쟁이란 비참함 속에 있었고, 완벽하지 않은 한 인간이었기에 그 속에서 분투해야만 했다. 시대적 한계 안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실을 길어 올리려 했던 그 정직함, 그리고 현장을 발로 뛰며 체득한 그 날카로운 통찰과 자기 자신조차 도마 위에 올려놓은 한 마리 생선처럼 냉정하게 바라보던 그 시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지성이 기술로 전락하고 담론이 사라진 오늘, 나는 여전히 <역정> 속의 청년 리영희를 불러내어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말이다. 당신은 대답 대신 그 특유의 미소로 내 어깨를 툭 치며, 세상을 너의 눈으로 보라, 사람을 찾아 배우라, 다시 펜을 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총구보다 강한 인간의 존엄을 배운 나의 벗

사람들은 당신의 글이 '공학도처럼 정밀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그 서늘한 논리보다, 당신의 영혼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인간만사 새옹지마교' 신도의 마음을 더 사랑했다.

1950년 겨울, 남원으로 작전회의를 하러 떠나던 길에 당신 대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당신의 새 겨울 파카를 입혀 보냈던 박 중위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을 때, 피로 물든 그 순백의 라이너를 보며 당신은 깨달았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날 박 중위가 앉아있던 자리가 바로 당신의 자리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의 지성이 그토록 엄밀했던 이유는, 어쩌면 대신 죽어간 이들의 몫까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지점은 권력의 어둠에 맞서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분투했던 위대한 업적보다 당신이 스스로 드러낸 '부끄러운 치부'였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술에 취해, 거절하는 여인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위세를 부렸던 그 젊은 날의 과오를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역정> 에 기록했다.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라던 그 여인의 일갈 앞에, 권총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던 젊은 장교 리영희. 자신의 부끄러움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기록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당신이 평생 추구했던 '진실'의 참모습이었다.

당신은 우리처럼 흔들리고, 실수하고, 때론 비겁해지기도 했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비겁함조차 기록의 제단 위에 올려놓고 성찰했다. 그런 정직함이 있었기에 당신의 글은 수만 권의 책보다 무거웠고, 한 시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이나 충성심은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 당신의 가슴엔 약한 자를 짓밟는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분노가 있었다. 사병을 괴롭히는 장교의 횡포에 항의하고, 민간인을 억압하는 군대의 거드럭거림에 맞섰던 그 기개는, 이론이 아니라 전쟁터의 흙먼지 속에서 배운 살아있는 정의였다.

완성되지 못한 당신의 <역정>을 다시 덮으며 생각한다. 당신처럼 살 자신은 여전히 내게 없지만, 적어도 내 부끄러움을 당신처럼 정직하게 마주하며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것이 내가 저멀리 높이 솟아있는 리영희라는 큰 산을 벗처럼 여기며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너의 눈으로 보라던 함께 우는 지성

<역정> 의 마지막 무렵에 와서 나는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이문동 소나무 동산 밑, 부모님과 창호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혼을 보내던 스물아홉의 당신. 밤마다 아내를 밖으로 꼬여내려다 "싫어요, 망칙하게"라는 거절에 아내가 밉살스러웠다고 투덜대는 대목에서, 당신은 '사상의 은사'이기 이전에 얼마나 피 끓는 청년이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루소 정도가 아니라면, 누가 이토록 민망하고도 정직한 속살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이런 대목에서 도리어 그의 진면목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사소한 욕망조차 숨기지 않고 대면하는 그 '정직함'이야말로, 당신이 평생 권력의 거대한 거짓에 맞설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사모님 윤영자 여사와 따님 이미정 리영희재단 이사의 인터뷰를 읽으며, 어떻게 하면 나도 가족에게 저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에게 당신은 야속할 만큼 꿈에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이었지만, 떠나보낸 뒤에 보니 그 자리가 너무 커서 못 해준 것만 생각난다는 고백에서, 나는 두 부부가 얼마나 얼마나 진실된 사랑을 주고받았는지를 본다.

특히 딸에게조차 '아버지'라는 관계적 틀이 아닌, 모든 이에게 똑같이 엄격하고 따뜻했던 '인간 동료'였다는, 그냥 자기 친구 대하듯 했다는 이야기 속의 모습은 내가 책 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음을, 당신의 글과 가장 내밀했던 가족과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게 한다.

리영희는 평생 중국의 문호 루쉰을 스승으로 모셨다. "광명 속에 앉아 암흑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암흑 속에서 암흑을 대상화한다"던 그 태도 말이다. 그는 민중에게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는 값싼 위로를 경계했다. 대신, 얼룩진 민중의 못남까지 가혹하게 드러내며 그들과 함께 몸부림치는 길을 택했다. 그 서늘한 지성의 밑바닥엔 동생 명희를 허망하게 보냈던 눈물겨운 상처가 고여 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전염병에 걸렸다는 오해로 무지몽매한 마을 사람들에게 천대받으며 죽어간 동생의 비극은, 당신으로 하여금 '값싼 동정'이 아닌 '현장의 진실'에 목숨을 걸게 만들었다. 민중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울고 괴로워해야 할 실존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가족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대가를 치르며 체득한 것이다.

기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당신이 걸어온 길은 결코 자전(自傳) 한 권에 다 담길 수 없는 거대한 격류였다. 하지만 <역정> 을 통해 만난 청년 리영희는, 오늘을 사는 나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는 네 부끄러움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느냐", "너는 암흑 속에서 그들과 함께 괴로워하느냐"라고 말이다.

비록, 당신은 가고 없지만 당신이 남긴 이 '지독한 정직함'은 여전히 내 서가 뒤편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 대신 평생토록 단 하나의 요청을 했을 뿐이다. "너 자신의 눈으로 보라!" 이것이 내가 당신이라는 벗에게서 배운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며, 당신이 우리에게 남긴 영원한 유언일 것이다.

듬직한 청년이라 불러주던 당신의 그 손길을 기억하며, 나 또한 현장의 진실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정직한 잡지쟁이'로 남고 싶다. 당신의 삶이 곧 나의 일부가 되었음을, 고마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 필자 주석

1) 리영희는 1970~1980년대에 걸쳐 한국 사회에 '사상의 은사'라 불릴 만큼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삶은 아홉 차례의 연행, 다섯 번의 구치소 수감, 세 번의 재판, 언론계에서 한 번, 두 차례에 걸친 교수 해직 등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 결과, 리영희의 저작들은 1980년대 초반 중앙정보부가 실시한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을 다룬 조사에서, 운동권에 대표적 영향을 준 30권의 책 가운데 <전환시대의 논리>가 1위, <8억인과의 대화>가 2위, <우상과 이성>이 5위에 꼽혔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9년 <교수신문> 조사에서도 <전환시대의 논리>가 3위를 차지했다. 김원(2012), <리영희의 공화국」, <역사문제연구>(27), 63~107쪽.

2) 리영희·임헌영,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2005, 437쪽.

리영희재단 홈페이지

리영희재단 뉴스레터 구독신청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