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AI·데이터센터 등의 투자과정에서 금산분리를 풀어달라는 반도체 업계의 요구에 대해 "일리가 있다"고 동조하며 규제 완화를 시사했다.
이 대통령은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K-반도체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한참 전에 이야기한 것 중의 하나가 투자 자금에 관한 문제인데, 일리가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금산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며 "거의 다 된 것 같다"고도 밝혔다.
앞서 지난 10월 이 대통령은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AI 투자 규모가 워낙 커 재원 조달을 위해 독점 폐해를 차단하는 조건 아래 금산분리 완화도 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금산분리는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같은 산업자본이 은행 같은 금융회사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제한하는 원칙이다. 재벌의 금융 사금고화를 방지하고, 동양 증권 사태와 같이 기업 경영 악화가 금융권으로 확산되는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1982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도입됐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금산분리 원칙으로 금융조달에 제한을 가하는 이유는 독점 폐해를 막기 위해서인데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첨단 산업 분야는 사실 그 문제가 이미 지나가 버린 문제고, 어쩌면 산업 발전에 저해되는 요소"라며 "이미 제도적으로 준비는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기업에 대한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서는 시민단체 뿐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우려의견이 제기된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달 21일 기자간담회에서 반도체 기업이 인공지능 첨단 전략산업 육성을 이유로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하는 것은 "(재계의) 민원성 논의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아 상당히 불만"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주 위원장은 "첨단 전략 부문에 대한 투자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면 금산분리 완화를 고려할 수 있다"면서도 "현 상황에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려면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산분리 원칙을) 바꾸려면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변화가 가져올 부작용을 방지하는 방안,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금산분리를 꼭 완화해야 하는 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고 부연했다.
아울러 "(향후) 필요한 자금이 10년 동안 몇백조 원인데, 이게 어렵다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이 때문에 규제를 허무는 실수를 하면 안 된다"며 "대기업이 자꾸 규제 탓만 하는데, 투자하지 않는 게 더 문제다.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위원장은 지난달 25일에도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금산분리 원칙을 통해 재벌의 금융기관 사금고화와 대기업 경제력 집중, 총수일가 지배력 확장 문제가 더 심화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며 "원칙적인 고수까지는 아니지만 그 근간을 훼손하면 안 된다"며 금산분리 완화에 신중론을 거듭 피력했다.
시민단체 경제개혁연대는 전날 논평을 내고 "이번 규제 완화의 최대 수혜자는 SK 최태원 회장이기 때문에 사실상 'SK 최태원 특혜법안'으로 봐도 무방하다"며 "특정 재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규제의 근간을 훼손하려는 이재명 정부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지주회사 규제 완화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재 정부가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지분율 50% 및 금융리스업 허용은 당초 SK가 정부에 제출한 'SK하이닉스 희망 투자 모델'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회사가 규모를 키우기 위해 외부 투자를 받고 그 과정에서 지배주주의 지분율이 희석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SK 최태원 회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엔비디아(Nvidia)의 CEO 젠슨 황이 보유한 회사 지분은 4%가 되지 않으며, 네이버의 동일인 이해진 의장의 지분율은 3.73%에 불과하지만 회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수용한 SK의 구상은, SK하이닉스가 금융리스업 증손회사를 지분 50%를 출자해 설립하고, 동 증손회사가 공장을 지어 이를 통째로 SK하이닉스에 임대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며 "여기에 정부가 150조원 규모로 조성하기로 한 국민성장펀드(국민 세금이 들어간 민관 합동 투자펀드)의 자금 상당 부분을 투자한다면 투자의 적절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할 때마다 지주회사 관련 규제를 풀어준다면 지주회사 규제는 폐기 직전의 출자총액제한제도처럼 누더기가 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며 "특정 재벌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후진국형 경제구조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이번 지주회사 규제 완화 조치를 즉시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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