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1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윤석열 정부에서 활용했던 체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실세인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깊게 관여하기 위해 구성한 현재의 NSC 체제가 이재명 정부에서 지속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제기다.
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한반도평화포럼이 '정부출범 6개월, 남북관계 원로 특별좌담-이재명 정부 통일외교안보정책 : 평가와 전망'을 주제로 개최한 좌담회에 참석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현재의 NSC 체제를 반드시 고쳐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NSC 구조가 문제다. NSC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4월 27일 '통일외교안보정책자문회의'로 발족됐다. 당시 차관급 인사는 참여하지 못했고 외교안보수석만 있었는데 지금은 (차관급 인사인) 국가안보실 차장이 참석한다"며 "이들이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장관 등 장관급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발언하고 투표하는 것이 말이 되나. 이건 미국에도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 당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NSC에서 발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라며 "이걸 이재명 정부가 계승하는 것이 말이 되나? 차장이 안보실 쥐고 흔들기 위해 만든 것 같은데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이전 정부에서 차관급 인사의 NSC 참석을 살펴보면 노무현 정부의 경우 국가안보보좌관을 겸임하는 NSC 사무처장이 참석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NSC 사무처를 폐지하고 외교안보수석을 중심으로 외교·안보 정책을 조정했기 때문에 외교안보수석이 참석했다.
NSC에 국가안보실 1차장이 참석한 것은 국가안보실이 만들어진 박근혜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문재인 정부 때도 국가안보실 1차장이 참석했는데, 윤석열 정부 때는 국가안보실 1,2차장이 모두 NSC에 참석하면서 참석 인사의 폭을 넓혔다.
이재명 정부 들어오면서 국가안보실은 3차장 체제로 개편됐는데, 육사 출신인 1차장과 정통 외교관 출신인 2,3차장 모두 NSC 상임위원회의 정식 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재명 정부의 NSC가 남북관계의 진전보다는 한미동맹 등을 더 중시하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정책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주장이다.
그는 "대통령이 9.19 남북 군사합의 복원을 대통령이 이야기했으면 참모들은 당연히 어떻게 실행할지를 연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최고 정책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말은, 특히 대통령 연설문은 곧 정책인데 대통령 말이 이행이 안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해 '바늘구멍조차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9.19 복원이 바로 이 바늘구멍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참모들은 뭐하는 것인가? 그러고도 월급 받나? 정무직 공무원이 이러면 안된다. 대통령 말을 이행하지 않는 참모가 왜 필요한가?"라고 쏘아 붙였다.
이날 좌담회에서 발표를 맡은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역시 "NSC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지, 부처 이기주의는 없었는지, 쟁점에 대한 대통령 결단에 도움을 줬는지, 부담을 주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라고 꼬집었다.
양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를, 이재명 대통령은 평화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는 '관세'가 경제고 밥이지만 평화우선주의는 '평화'가 경제고 밥"이라며 "분단 국가이면서 통상 국가인 대한민국에는 평화가 핵심이다. 평화를 뒤로 하고 억제나 미국을 앞세우면 역사의 냉혹한 평가가 있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재명 대통령이 내놓는 담론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정책 실행을 보면 한미동맹을 더 중시한다"라며 "국내 정치를 위한 발언과 대통령 개인 생각의 괴리가 있는데 이거 대통령이 정리해야 한다. 과거 방식대로 한미 동맹이 잘돼야 남북관계가 풀린다고 생각하면 과거와 유사한 상황이 또 관성처럼 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현 정부는 정책과 메시지 사이에 상당한 모순이나 충돌 현상이 있는 것 같다"라며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밝혔던 이른바 'END 이니셔티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END'는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등 각각 단어의 머릿글자를 모은 것으로, 지난 9월 23일(현지시간)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 대화로 한반도에서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END)하고, '평화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 교수는 "얼마 전 유럽에서 강연을 했는데 북한이나 한반도 전공한 분들이 강의를 듣고는 한국 정부의 숨은 의도는 북한 체제를 바꾸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 하더라"라며 "정부가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적대관계 종식'을 의미했는데 북이나 제3자는 '북 체제 종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건 좀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라고 조언했다.
문 교수는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통령께서 '피스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의견을 내놨다.
그는 "스스로 '페이스메이커'를 하겠다는 것은 경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건 안된다. 조금 더 세밀하게 검토했다면 이 용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참신한 용어를 내놓는 건 좋지만"이라며 북핵 및 한반도 문제에서 남한이 제3자처럼 빠져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장관은 "페이스메이커 역할은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때까지만 하면 되는 것"이라며 "트럼프와 김정은이 깔아 놓은 아스팔트 위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면 된다. '페이스메이커'는 '선(先) 북미, 후(後) 남북'관계로 가도 괜찮다는 의사를 보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의견을 내놨다.
문 교수는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한 조정 정도로는 북한이 남한과 대화 테이블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남북 간 바늘구멍을 뚫으려면 적대적 두 국가에 대한 해법이 나와야 한다. 결국 헌법 3, 4조 문제"라고 말했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로 돼 있는데, '두 국가'를 선언한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이 이 부분을 정리하지 않으면 대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문 교수는 "남한은 진보든 보수든 결국 북한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고 있더라, 그래서 북이 남쪽과 상종 안하겠다는 것"이라며 "유엔헌장과 국제법은 영토를 존중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 것인데 이걸 명료히 하자는 것으로, 남쪽에서 헌법 3조 개정 논의를 시작하면 북이 (대화에)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두 국가론에 대한 우리의 입장, 전략적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북에서는 전술적 움직임이라고 보고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 교수는 미국에서 북미 관계를 실질적으로 처리할 실무자들이 부재하다는 점도 북미 간 대화 또는 접촉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 정부의) 국무부나 국방부는 바이든 (정부 때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무부는 (내년 4월) 트럼프가 중국을 방문해도 정상회담은 안 된다고 볼 것이다. NSC나 국무부에 팀이 없다"라며 "(미국이 북한과) 막후 접촉해서 뭔가를 가져오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국무부가 해야 하는데 받쳐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정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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