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주의'라는 진단명은 없다

[기고] 진단이 여는 대중의 언어

의사들은 진료실에서 '발열'을 두려워하는 환자를 자주 만나곤 한다. "열만 떨어뜨리면 다 괜찮아지겠죠?"

그러나 발열은 병이 아니다. 병이 있다는 신호이고, 해열제만 쓰면 일시적으로 상태는 나아지지만 원인은 그대로 남는다. 때로는 열을 억지로 낮추는 것이 오히려 경과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학벌주의'도 마찬가지다. 특정 대학 이름만으로 능력을 판정하는 관행, 의사결정 과정의 불투명성, 지적 성취에 대한 사회적 불신,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구조적 의존성, 과열된 사교육 시장. 이 모든 것은 증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 증상에 대해 전문가들이 내놓는 처방은 대개 대증치료였다. 서울대를 비롯한 유명 대학의 정규직 교수들이 '학벌주의 완화'를 위해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정책을 제시한다. 그러면 수험생 커뮤니티에서는 "그럴 거면 모든 대학 이름을 서울대로 바꾸면 되겠네"라는 조롱이 돌아온다. 특정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와 대중 사이에서 같은 패턴이 오랜 시간 반복되어 왔을 뿐이다.

이 상황을 많은 전문가와 언론이 '청년이 극우가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익명의 군중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어도, 그 가운데 누구라도 유명 대학의 그 교수들보다 학벌주의의 수혜를 더 많이 누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다.

수혜를 더 많이 받은 쪽이 덜 받은 쪽을 향해 "극우적이다", "학벌주의를 옹호한다"고 공격하는 꼴이다. 대증치료만을 반복해온 의사가, 낫지 않는 환자를 보며 '환자가 과격해졌다'고 기록하는 셈이다.

진료 과정에서 환자의 모든 불만이 정당할 수는 없어도, 환자가 납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의사의 책임이다. 입증 책임은 전문가에게 있다. 비전문가가 납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전문가의 실패다. 이는 전문성을 내세워 사회적 권위를 얻는 분야라면 어디서든 적용된다.

대중은 "해열제만으로는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반복되는 불편과 부조리라는 '어떤 병의 흔적'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이 증상의 원인을 설명할 진단명이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대증치료가 반복될 때, 대중의 조롱은 판단이 실패한 결과가 아니다. 판단을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는 현실의 누적에 수반된 증상일 뿐이다.

기원도 진행 과정도 다른 별개의 병들을 "학벌주의"라는 말로 봉합해버린 것은, 발열과 기침과 오한을 묶어 "감기주의"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병은 남고, 말만 커진다.

'학벌주의'라는 말이 정확한 진단명인지 묻는다면, 의사라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증상은 맞다. 그러나 진단명은 아니다.

초기 학벌주의, 보여주기식 정당화가 숨기는 병기의 진행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학벌주의'부터 정의하자. 학벌주의란, 특정 유명 대학을 나왔다는 표식 하나만으로 실제 역량이나 기여와 무관하게 채용, 승진, 사회적 인정의 기준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불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서울대라는 단일한 표식이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서울대 졸업생 집단이 균질하게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학벌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일 수는 있어도, 오히려 덜 위험한 상태인 면이 있다.

집단적 교육문화, 학번과 공채와 고시기수에 따른 연공서열, 비교적 예측 가능한 커리어 경로가 일반적이던 시대에 "유명 대학 출신"이라는 표식은 실제로 어느 정도 균질한 경험과 궤적을 함축했다. 이 문화와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오늘날 '학벌'을 둘러싼 현상 전부를 초기 학벌주의의 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 초기 학벌주의는 가장 단순하고 벌거벗은 형태의 권력이었다. 표식이 인격이나 도덕성이나 역량을 입증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중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서울대 나왔다고? 그래서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표식과 실체 사이에 간극이 남아 있었고, 그 틈 안에서 대중은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초기 학벌주의는 비민주적일 수 있어도 '읽히는 권력'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병명은 무엇인가. 공적 기여와 무관하게 정당화되고 재생산되는 특권적 엘리티즘. 이것이 병명이다. 학벌주의는 이 병의 초기 형태였고, 수혜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실패했기에 비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병의 진화다. 표식은 교묘해지고, 정당화는 정교해지고, 대중의 판단 여지는 줄어드는 방향으로 이행한 것이다. 이 진화의 궤적을 추적할 진단 프로토콜을 제안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병명이 있으면 병기(staging)를 설정할 수 있다. 초기 학벌주의에서 고도화된 엘리트주의로의 이행을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보았듯, 초기 학벌주의 시기에는 "서울대 나왔으면 뭐하나, 하는 짓 보소"라는 대중의 판단이 작동할 여지가 있었다. 고도화된 엘리트주의는 이 간극을 봉합한다. 그 핵심에 보여주기식 정당화가 있다.

공적 기여란 무엇인가. 학력이나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대신, 지적 담론에 보탬이 되고, 공공의 이익에 실제로 기여하여, 시민들이 '이 사람이 있어서 사회가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를 통한 사회적 인정 자체는 민주사회에서 부당하지 않다. 문제는, 그 실질이 없거나 형식에 불과한데도 기여가 있는 것처럼 정당화되는 구조다.

보여주기식 정당화란, 표식이 실체를, 보여주기가 실제 기여를 대체하는 통로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대표적이다.

비판하려는 것은 스토리텔링 자체가 아니다. 현실의 스토리텔링에는 기억, 고난, 순간성처럼 자기 경험에서 우러난 감정과 도의적 고민이 있다. 재현할 수는 있되 꾸며낼 수는 없는 차원이 있다. 그런데 생기부, 포트폴리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와 아무 상관 없다. 관료적 형식의 뼈대 위에 감정을 억지로 덧칠한 문서에 가깝다. 교사도 좋아하지 않고, 대학도 좋아하지 않고, 학생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데 멈추지 않는, '이름만 스토리텔링'인 반(反)스토리 구조다.

자기소개서와 학교생활기록부에 적힌 서사들을 떠올려 보자. 생명과학 수업에서 생태계 단원을 배운 뒤 기후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환경 동아리를 만들어 캠페인을 주도했다는 이야기. 지역사회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는 어떤 학생의 서사는, 이제는 너무나 흔하다.

이는 독서와 탐구가 연결되고, 탐구가 실천으로 이어지고, 실천이 성장으로 귀결되는 완결된 스토리처럼 보인다. 이런 보여주기는 겉보기 표식과 배움의 실체 사이의 간극을 거짓으로 봉합하는 의례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의 실제 역량이나 기여와 상관없는 정당화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면 "노력하는 학생을 왜 깎아내리느냐"는 비난이 돌아온다. "스토리도 있고, 활동도 했고, 서사도 완결됐는데 뭘 더 따지냐"는 말과 함께 "반지성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대중이 판단하고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점점 좁아진다.

증상이 가리는 병의 기전

이 이행의 과정을 의학적 진단의 틀로 풀어보면 하나의 역설이 드러난다.

어떤 병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병인(etiology). 그 병이 왜 생기는가. 둘째, 임상경과(clinical course). 그 병이 어떤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가. 셋째, 예후(prognosis). 치료하면 어떻게 되고,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셋을 모르면 증상만 보게 된다. 그리고 증상만을 본 사람은 판단을 완전히 반대로 하게 된다.

매독이 이 역설을 가장 잘 보여준다. 매독의 병인은 스피로헤타라는 나선형 세균이다. 임상경과는 1기, 2기, 잠복기, 3기로 진행된다. 예후는 분명하다. 치료하면 완치되고, 치료하지 않으면 심장과 혈관, 뇌와 척수를 침범해 치명적 합병증으로 이어진다.

이 셋을 모르는 사람에게 매독은 어떻게 보이는가.

치료하지 않은 환자를 보자. 1기 궤양은 몇 주 뒤 저절로 사라진다. 환자는 나았다고 생각한다. 2기의 전신 발진과 림프절 종창도 저절로 사라진다. 또 나았다고 생각한다. 수년간 증상 없는 잠복기가 이어지면 병은 완전히 치유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병원체는 체내에서 심장, 혈관, 뇌, 척수로 침투하고 있다. 3기에 이르면 대동맥이 터지거나 뇌가 손상되는 치명적 합병증이 나타난다.

반대로, 치료받는 환자를 보자.

매독의 표준 치료제는 페니실린이다. 1940년대 이래 거의 유일하게 효과적인 치료제이며, 제대로 투여하면 거의 항상 완치된다. 그런데 페니실린을 투여하면 세균이 죽으면서 방출하는 독소 때문에 환자는 고열, 오한, 근육통을 겪는다. 치료 전보다 상태가 나빠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매독 치료에서 거의 항상 일어나는 반응이다. 치료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증상만을 본 사람은 이 현상을 반대로 해석하게 된다. 치료하지 않으면 증상이 사라지고, 치료하면 악화된다. 기전을 모르는 사람은 증상을 그저 방치할 뿐이다. 이 구조가 학벌주의를 둘러싼 현실의 우리 교육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자.

유명 대학 졸업만으로는 취업이나 영향력을 보장받기 어려워지자 "서울대도 다 똑같지는 않네"라는 말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이를 학벌주의가 약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1기 궤양이 사라졌을 때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유명 대학이라는 단일한 표식의 효력이 약해진 자리를, 더 미세하고 추적하기 어려운 변수들이 채우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배경, 출신 중고교와 지역, 교수 추천서를 얻을 수 있는 관계망, 가족 배경이 작동하는 인턴십 경험. 엘리트 사회 내부의 권력 구조는 더 복잡하게 분화되고, 추천과 후견의 연결고리는 더 은밀해졌다.

초기 인턴이나 연구실 이력에서 미세해 보이는 차등이, 이후 경력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격차로 이어지는 정성평가 중심의 선발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해도, 추천서를 알아볼 수 있는 부모가 있는지, 교육특구나 유명 고교 출신인지에 따라 이후 진로의 질이 갈린다. 서클과 추천서가 작동하는 영미권에서 이는 이미 상식에 가깝다. 같은 학위란 같은 기회를 뜻하지 않는다.

학벌주의라는 도덕적 이분법으로만 현실을 이해한다면, 서울대 졸업장의 가치가 떨어졌으니 학벌주의가 완화되는 중이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학적 진단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병이 나아진 것이 아닌, 병기가 넘어간 것이다. 학벌이라는 대중의 눈에 잘 보이는 표식이 약해진 자리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적 네트워크와 문화자본이 채운 것이다.

진단명이 없으면, 완화나 잠복기로의 이행 여부를 구분하기 어렵다. 오히려 보이지 않기에 더 위험하다.

진단 없는 사회, 은폐된 엘리트주의

대중은 보이는 권력만을 견제할 수 있다. 고도화된 엘리트주의는 보여주기식 정당화를 거쳤기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들여다볼 언어도 없다.

이것이 병기의 문제다. 암에도 1기, 2기, 3기, 4기가 있다. 1기에서는 한 곳에 머물러 있어 제거가 가능하다. 4기에서는 온몸에 퍼져 치료가 어렵다.

이 틀로 병기를 구분하면 이렇다. 1기는 단순 학벌주의다. 표식만 있고 정당화가 없다. 견제가 가능하다. 2기는 학벌에 스펙이 붙기 시작하는 단계다. 3기는 학벌이 소멸된 것처럼 보이지만, 보여주기식 정당화, 서사, 교양이라는 새로운 표식이 등장하는 단계다. 견제가 어려워진다. 4기는 완전한 상징권력화 단계다. '선한 영향력'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견제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한국에서 '학벌주의'라는 말은 발열, 두통, 불면 같은 증상 목록일 뿐이다. 그 증상이 어떤 기저질환에서 비롯되었는지, 병이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말해주는 체계는 없다. "학벌주의는 나쁘다"라는 명제만 있으면 1기도, 2기도, 3기도 전부 똑같이 나쁘다. 완전한 해소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고, 점진적 개선이나 단계적 이행은 의미를 잃는다.

어떤 의사가 "저는 발열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단이 아니다. 발열은 기전의 결과이며, 몸이 보내는 신호다. 그 신호를 없애려는 의학은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

"학벌주의는 나쁘다"는 말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기수제와 연공서열, 고시 엘리트의 독점이 노골적으로 작동하던 시기에 그것에 반대하는 운동은 필요했다. 사법개혁 등 초기 학벌주의가 실제로 문제가 되는 분야에서는 지금도 비판의 유효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언어가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있는지가 문제다. '학벌주의는 나쁘다'는 말은 듣기에 옳고 단호하며 도덕적으로 안전하다. 그런데 여기서 구조적 역설이 생긴다. '학벌주의'라는 말은 대중이 자신의 감각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언어다. 그 언어를 정의할 권한을 특정 집단이 독점하는 순간, 대중은 말 자체를 빼앗기게 된다.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주창한다. 예일 로스쿨이 US News 랭킹 참여를 거부한다. 언론은 '역시 무언가 다르다'는 찬사를 보낸다. 위계를 해체하겠다는 선언이 위계의 꼭대기에서 발화될 때, 그것은 비판처럼 보일 뿐 특권을 재확인하는 절차에 불과다.

무엇이 학벌주의인지를 정의하는 권한, 어떤 정책이 완화에 기여하는지를 판정하는 권한까지 같은 집단에 쏠리면, 남는 것은 이중의 독점이다. 구조의 수혜와 구조 비판의 언어를 동시에 점유하는 독점. 질환을 정의하고 치료를 결정하는 권한이 특정 집단에 넘어가는 의료화와 다르지 않다.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고위 공직, 교육 담론을 주도하는 위원회와 자문기구를 구성하는 이들의 분포와 출신을 살펴보면 독점에 가까운 편중이 보인다. 이 편중은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그들의 국가 차원의 장기과제와 달리, '학벌주의 완화'를 내세우는 이들이 자신들의 권한으로 가장 쉽게 시정할 수 있을 법한 문제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등장하는 얼굴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유명 대학 졸업생 집단이 균질하지 않게 보일수록, 엘리트 네트워크가 폐쇄적이고 불투명하게 작동하는 양상은 오히려 더 쉽게 사회 전반으로 퍼졌다. '학벌주의 완화'가 아니라, 초기 학벌주의에서 고도화된 엘리트주의로의 이행이다. 그리고 이 이행을 포착할 틀이 아직 없다.

틀이 없으면 불만은 분석이 아니라 분노의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망칠 기회조차 얻어본 적 없는 이들, 구조에 대한 감각을 언어화할 수단을 갖지 못한 이들이 '극우'라는 라벨 아래 혐오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물론 그들의 분노가 혐오로 흘러간 지점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혐오 역시, 증상인 면이 있다. 분석의 언어를 박탈당한 자리에서 감각이 가장 먼저 찾아가는 출구가 분노이고, 분노가 틀 없이 표출될 때 혐오의 형태를 띠는 것은 개인의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책임을 그들에게 온전히 돌리는 일은, 병원균 대신 발열을 퇴치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단의 틀이 없는 사회에서 증상은 곧 죄가 되고, 죄의 판정은 진단권을 가진 쪽의 몫이 된다. 그 '비판적 지식인'들의 행위 뒤에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결과까지 불분명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구조의 수혜자가 이를 비판하는 언어까지 독점하고, 그 바깥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낙인을 붙이는 일이 반복될 때, 의도와 무관하게 하나의 결과만은 분명해진다. 견제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견제의 언어가 사라진 사회에서 권력은 더 이상 권력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합적 문제, 단선적 대응

교육 현장의 문제를 논하는 강연장이나 토론회에서, 교사나 연구자 등 교육 전문가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다. 학벌주의의 완전한 해소로 직접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제안을 꺼내면,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형태는 비슷한 반문이 돌아온다.

"그건 그냥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둔 채 평가를 더 정확하게 하자는 말 아닌가요?"

그러나 앞서 구분했듯이, 공적 기여를 통해 인정받는 것과 공적 기여 없이 표식만으로 인정받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민주사회의 정상적인 작동 방식이다. 후자가 엘리티즘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 글에서 병인을 '공적 기여와 무관한 정당화'로 정의했고, 임상경과를 '표식의 고도화'로 추적했으며, 치료하지 않으면 견제 불가능한 상태로 넘어간다는 예후도 제시했다.

앞서의 매독은 단일 치료제로 보통 완치되는 매우 예외적인 질병이다. 대부분의 질병에서 환자는 주사 한 번에 병이 낫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복합적 처방은 근본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떤 진단이나 대안이든 결국은 결과로 평가받을 뿐이다.

고령 암 환자의 경우, 기대여명이나 치료의 부작용을 고려하여 적극적 개입 대신 경과 관찰을 택하는 일도 적지 않다.

어떤 접근이 '더 근본적'이고 어떤 접근이 '덜 근본적'인지를 따지는 일은 현대 의학이 직면한 복합적 질환들 앞에서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의 엘리티즘의 양상은 대부분의 질병보다 복잡하다.

그런데 또 다른 반응이 돌아온다. 학생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하면, "제가 보는 건 제도나 교육과정이라서, 학생들의 말이 그 틀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런 문제제기를 문서화하기 어렵다는 말도 따라온다.

의사들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교과서와 가이드라인이 있더라도 그것은 참고할 수 있는 요소일 뿐이다. 같은 진단명이라도 환자의 연령, 기저질환, 생활환경, 본인과 가족이 적극적 치료를 원하는지에 따라 개입의 방향이 정반대가 될 수 있다. 환자를 직접 만나보지 않고, 조직검사 결과와 영상, 혈액검사 수치만 보고 수술을 결정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것은 진료가 아니다.

환자가 호소하는 내용이 기존 진단 체계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환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 체계의 한계다. 문서화하기 어렵다면 문서화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환자가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이지, 가이드라인이 있고 환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 있고 교육과정과 교육제도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진단의 단위를 포착하려면 결국 환자를 만나야 한다. 학생도 다르지 않다.

《수능 해킹》(문호진·단요 지음, 창비 펴냄)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의 증언을 들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병인을 정의할 수 있었고, 경과를 추적할 수 있었으며, 예후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학생이 표식을 위한 무의미한 노력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실제 공적 가치에 기여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교육이 이 병의 경과를 되돌릴 수 있는 경로라는 판단은 그 과정에서 나왔다.

그러나 도덕주의의 이분법 안에서는 병기라는 개념이 없으니 "지금 몇 기인가"라는 질문이, 나아가 진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은 엘리트주의 2기입니다, 3기 잠복기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대입전형의 요소들을 보다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라고 처방하면, "줄세우기식 교육의 부활 아니냐, 학벌 없는 세상 외에는 임시방편일 뿐이다"라는 지적만이 돌아온다. 그것은 의학도, 사회과학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서울대 교수들조차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외친다. 오랫동안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온 이들이 갑작스레 학벌 타파의 언어를 선점하는 장면이다. 의도는 따져보기 어렵고, 선의로 제안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어떠했든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수십 년간 '시험 줄세우기 타파', '학벌주의 타파'를 외치며 추진한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지표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나빠져왔다. 엘리트 재생산 기제는 더 불투명해졌고, 지역에 따른 수능 성적의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사교육비는 계속 늘어났다.

이쯤 되면 진단을 다시 봐야 한다. 아니, 애초에 '진단'이라는 절차 자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있었는지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학벌주의와 사교육은 흔히 원인도 알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지옥에서 온 문제'처럼 다뤄져 왔다. 그러나 이 두 현상 역시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패턴일 뿐이다. 대입이라는 특수한 제도가 주는 압박감에 가려져 '예외적' 문제처럼 보였던 면이 클 뿐이다.

어떤 사회현상에든 원인과 결과가 있다. 현장에서 관찰되는 정책의 결과가 지속적으로 나빠졌다면, 그 원인을 구성하는 당국의 개입에 대한 평가 역시 당연히 그 방향을 향해야 한다.

지금은 의도를 논할 때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지표들이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나빠져왔고, 학생들이 겪는 고통은 실재한다. 평가는 냉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냉엄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분석 틀이다. 문제를 어떤 층위에서 볼 것인지, 어떤 변화를 경과로 기록할 것인지, 어떤 개입이 어떤 지점을 건드렸는지를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진단 프로토콜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단이 여는 대중의 언어

학벌주의라는 진단명은 없다. 이 글이 제안하는 것은, 대중이 감지한 증상에 진단명을 붙이고 경과를 추적할 수 있는 프로토콜이다.

오늘의 교실에서는 같은 양상만이 반복되고 있다. "학벌주의 완화"라는 취지만으로 개입이 정당화되어 현장에 적용된다. 효과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고, '현장이 취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존 정책이 무한정 정당화된다.

진단 프로토콜이 있으면 달라진다. 현장의 상태를 진단하고, 병기를 설정하고, 개입 후 변화를 다시 점검하여 병기를 재설정하고, 정책의 효과를 평가하여 다음 개입을 조정한다. 4기로 이행했다면 정책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2기로 회귀했다면 프로토콜에 맞춰 대응을 이어가면 된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모든 개입을 "학벌주의 완화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검증 없이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이 개입으로 인해 병이 2기에서 3기로 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입학사정관제 도입 후 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더 불투명해졌는가? 대중이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늘었는가, 줄었는가? 이런 질문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진단 프로토콜을 도입한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이 저절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해결책이든 적용 이후의 효과를 확인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선순환을 되살리려면, 우리는 증상과 병의 정의, 즉 진단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나빠지는 길이 있다면 회복되는 길도 있다. 진단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도 물을 수 있다.

우리는 평가 대신 다시 교육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기록을 통한 성장 스토리의 누적' 같은 더 정교한 평가라는 환상이 교육을 질식시키고 있다. 보여주기식 정당화를 평가하는 데 매달리는 대신, 교육 자체가 공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차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평가는 그 다음 문제일 뿐이다.

예컨대 고분자 탄소화합물에 대해 배운 내용을 억지로 기후운동과 연결해 스토리를 만드는 대신, 연산 과정의 충실성과 지적 과정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그 학생이 훗날 공학자가 되었을 때, 그가 설계한 구조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그것이 진짜 공적 기여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사회적 기업 캠페인 구상' 같은 보여주기식 활동 대신, 학생이 실제로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을 쓰도록 격려하는 편이 낫다. 학생이 졸업 이후 시민으로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주체가 되도록 교육이 도와야 한다.

우리는 학벌이나 스토리텔링이라는 위장된 표식으로 수행되는 겉보기 교육이 아닌, 발달의 과정 그 자체가 공적 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교육의 실질을 회복해야 한다. 진단 프로토콜은 우리 사회가 이 경로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표식 만들기로 빠지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도구여야 한다.

대중은 오랫동안 정확히 보아왔다. 그러나 '공적 기여와 무관하게 정당화되고 재생산되는 특권적 엘리티즘'을 분석할 공유된 틀이 없어서, 기술할 말 대신 '말할 수 없는 분노'만 남았던 것이다.

의사가 발열 자체를 없애려 하는 대신 발열의 기원부터 찾는 것처럼, 교육에 대해서도 같은 일이 가능하다 믿는다. 이 글에서 제안한 진단 프로토콜은 완전하지 않다. 병명의 정의도, 병기의 구분도,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적용도 더 정밀해질 수 있고 더 정밀해져야 한다.

이 글에서 든 '학벌주의'라는 개념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우리는 사교육 창궐, 교사의 소진, 학부모의 민원 같은 증상 뒤에 숨은 병을 더 정밀하게 찾아내야만 한다. 결국 이 글의 목적은 완결된 분석이 아니라, 그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토콜의 필요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환자가 납득하지 못하면 의사가 책임을 진다. 대중이 납득하지 못하면 전문가가 책임져야 한다. 전문성을 주장하는 자가 설명과 입증의 책임을 진다는 것. 이는 누군가가 스스로를 전문직으로 정의하는 순간부터 지켜야 하는 사회적 계약이다.

그것이 환자를 존중하는 방식이고, 대중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서울대 홈페이지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