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실박물관과 고려자기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에 관한 일화가 또 있다. 이를 확인해 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의 무대인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과 고려자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1907년 7월 19일,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즉위한 후 순종은 11월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면서 박물관도 함께 설립되었다. 제실박물관은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을 본관으로, 그 외 통명전(通明殿) 등을 전시실로 사용했다. 설립 초기에는 왕족들의 공간이었다가 1909년 11월 1일부터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고, 1910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개관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왕가 박물관', '창경궁 박물관' 등으로 불리다가 1938년에는 덕수궁의 '이왕가 미술관'으로 통합되었다.
제실박물관은 1908년 1월부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량 발굴되었던 고려자기, 고려 공기류를 구입하고, 불상 등 조선제 여러 예술품을 매수"하면서 전시할 유물들을 본격적으로 끌어모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사랑(?)을 계기로 '고려자기 붐'이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에 고려시대 고분에서 도굴되고 있었던 많은 고려자기가 골동품 가게 등에 나와 있었고, 제실박물관도 이때 고려자기를 사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제실박물관은 1909년 11월에는 불상, 회화, 고려자기 등 약 86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고, 소장품 수는 계속 늘어 1912년 말에는 1만2230점, 1938년에는 1만8800여 점에 달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의 이왕가박물관 시절에는 보유하고 있던 고려자기 수가 점점 더 늘어났을 것이다. 다음 자료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개성 강화도 중심의 고려시대 고분은 근년에 가장 먼저 파괴되어 기만(幾萬)의 귀중한 고려자기를 기타 공예품과 함께 도굴해 갔다. 다행히 그 액을 면한 것은 거의 없다. 이러한 출토품은 우수한 것으로 오늘날 총독부박물관 특히 이왕가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다.
'기만'은 '수만'이라는 의미인데, 얼마나 많은 고려자기들이 도굴로 인해 일본인들 손에 들어갔는지, 그 중 '귀중한', '우수한' 것들이 이왕가박물관으로 흘러들어 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실박물관 시절을 시작으로 이왕가박물관 시절을 거치면서 수많은 고려자기들이 이왕가박물관에 속속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의 고려자기 일화
이제 제실박물관의 고려자기에 관한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 간의 '웃픈' 일화를 확인해 보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된 시기의 일이다. 이때 제실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고려자기를 처음 본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이를 필자 나름대로 각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실박물관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던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 고종 : (고려자기를 보며)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인데, 어디 산(産)이요?
· 이토 : 전하, 이것은 조선의 고려시대 것이옵니다.
· 고종 : 이런 물건은 조선에는 없는 것이요.
· 이토 : (침묵) .....
위의 일화는 아사카와 노리카타(浅川伯教)가 이왕가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긴 것인데, 스에마쓰는 "아시다시피 이 경우 출토품이라는 설명을 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 당시 고려자기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고려시대 고분에서 도굴해서 일본인들끼리 매매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대대로 조상들의 무덤을 함부로 파헤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 가운데 고려자기의 존재와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이와 같았으니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처음 보는 것인데, 어디서 나온 것이냐'고 물어본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고분을 도굴해서 고려자기가 나온 사실을 알고 있었을 이토 히로부미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고종의 말에 침묵하던 이토 히로부미는 속으로 '고려 무덤에서 나온 고려자기를 골동품 가게에서 사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나 원 참...'이라고 생각하며 뻘쭘해 하지 않았을까? 이는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 당시 한국 측이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를 돌려달라면서 예를 든 일화이기도 하다.
한편 이날 이토 히로부미가 제실박물관을 나올 때 고려자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것도 필자가 살짝 각색한 내용이다.
제실박물관을 걸어 나오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회계 담당자
· 이토 : 이렇게 훌륭한 고려자기들을 모았는데, 지금까지 값은 모두 얼마나 치렀는가?
· 회계 담당자 : 십만 엔이 조금 넘었사옵니다.
· 이토 : (회계 담당자를 칭찬하며) 그런 돈으로 이만큼 모았는가? 허허허.
이토 히로부미가 말한 '이만큼'이 고려자기의 양과 질을 어느 쪽을 의미하는 것인지, 둘 다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이만큼'의 고려자기를 사들이는 데 생각보다 돈이 들지 않았다는 점, 즉, 당시 고려자기의 시세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였기에 회계 담당자를 칭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제실박물관에서 고종과 고려자기 이야기를 나누다가 뻘쭘했을 이토 히로부미가 제실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던 고려자기의 가격을 듣고 기뻐하며 회계 담당자를 칭찬했다니,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에 대한 찐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화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미야게' 고려자기와 안중근 의사의 총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서 외국의 외교관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1905년 11월 17일에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통감부를 통해 조선의 외교도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외교를 결정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고려자기를 '오미야게'(おみやげ, 선물)로 주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22일자 기사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외교 교섭 상대에게 고려자기를 선물하려고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토씨가 금번 만주 시찰 중에 회견하는 내외인(內外人)에게 기념품으로 고려자기를 기증할 터인데, 해당 물품을 구매·송부하라는 소네 통감에게 전보가 있었고, 소네 통감은 즉시 일인 오오카에게 구매를 청하였다더라.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에서 만날 외국인에게 고려자기를 '오미야게'로 건네기 위해 제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이를 부탁을 했고, 소네 통감은 다시 오오카 쓰토무(大岡力) 경성일보 사장에게 부탁해서 고려자기를 만주로 보내려고 했다.
10월 22일이라는 신문 기사의 일자와 '만주 시찰'을 보고 머리 속을 스치는 무언가가 떠오르는가? 며칠 후인 10월 26일, 바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가 일어난 날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2월 21일부터 1909년 6월 13일까지 3년 6개월 동안 초대 통감을 맡으며 조선을 망국화의 벼랑 끝으로 떠밀고 있었다. 이후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주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 지역의 철도 부설 문제, 러일 전쟁 전후 처리 등의 현안을 러시아와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인들과의 회담에서 '오미야게'로 고려자기를 건네주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전에 '오미야게'로 사용할 고려자기를 이미 받았는지, 아니면 고려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서 오고 있는 고려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안중근 의사도 하얼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총리를 여러 차례 역임한 정치 거물이자 조선의 초대 통감을 지내며 조선의 명줄을 좌지우지했던 권력자였다. 따라서 일본인 정치가를 비롯한 일본 국내 고위급 인사는 물론이고, 외국의 외교관 등 고위급 인사들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오미야게'로 고려자기를 건네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손에 넣은 수많은 고려자기 중에 얼마나 많은 고려자기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그리고 일본을 위해 사용되었을까?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인생 역정은 '오미야게' 고려자기가 만주에 닿기를 기다리다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이 그의 가슴에 닿으며 막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오미야게' 고려자기와 안중근 의사의 총탄. 한일 양국의 굴곡진 근대사를 간단하게 함축할 수 있는 표현이지 않을까?
■ 참고문헌
이구열, 『한국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1996.
浅川伯教, 「朝鮮の美術工芸に就いて回顧」, 『朝鮮の回顧』, 近澤書店, 1945.
小宮三保松, 「序言」, 『李王家博物館 所蔵品 寫眞帖』, 1912.
関野貞, 『朝鮮の建築と芸術』, 岩波書店 1941.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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