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처음 발행된 웹진 <연극in>은 지난 12년 동안 한국 연극계와 공연예술계를 대표해온 상징적인 저널이었다. 그러나 서울문화재단 대표와 경영진이 바뀐 지금,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일방적 진단을 받고 폐간 절차를 밟고 있다. 웹진 <연극in> 폐간 대책위원회는 기고를 통해 공연예술의 언어와 기억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편집자
"이제 연극을 그만둬야 할까 봐요."
지난 7월 <연극in> 잠정휴간 소식에 선정 작가에서 미게재 작가 된 여섯 명이 모였다. 공모에 선정되고 게재를 기다린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연극판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동료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인 것 같다며 '이제 연극을 그만둬야 하는가 싶다'고 말했다. 절망을 말하는 동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함께 있어 주는 일 뿐이었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살아남아야 하는 것일까.
고추장 시장보다 작은 연극 시장
2016년, 한 공공기관에서 한국 연극 시장이 고추장 시장보다 작다는 통계를 냈다. 무려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간한 공연예술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연극 시장 규모는 티켓판매액 기준 774억여 원이다.
그렇다면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사람들은 이제 고추장을 먹는 것보다 연극을 더 많이 볼까? 동일한 기관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연극분야 티켓판매 규모는 734억 원가량으로 오히려 10년 전보다 줄어들었다. K소스 열풍에 고추장 시장의 규모가 1647억 원으로 성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연극 '시장'은 여전히 고추장 시장보다 작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문화강국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음악, 영화, 드라마 등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문화예술 분야에 의지를 갖춘 정부의 출범을 예술계에 속한 누구든 반기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정부가 내세우는 '문화산업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국력을 키운다'는 말이 예술인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유효한가 되묻고 싶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한 구호가 반복되는듯한 기시감은 착각일까.
10년 전 박근혜 정부 초기에도 재정 확충, 문화 한국의 위상 제고, '한국스타일' 세계화를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비전이 문화예술 정책으로 제시된 바 있었다. 정책이 제시되면, 산업의 논리에 따라 예술지원의 규모는 늘어나고, 국제교류는 증가하며, 익숙한 단어들이 앞 글자 K를 달고 새롭게 나타나 위용을 과시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연극 시장은 10년 전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예술은 산업으로 적혀 국위선양의 수단으로만 취급받아도 괜찮은 것일까? 몇몇 '잘 되는 작품'을 중점적으로 키우면 자연스레 문화예술 산업 전반이 성장하고, 이른바 낙수효과로 인해 여타 장르들의 동반성장이 따라온다는 10년 전의 문화예술 정책은 2025년에도 유효할까?
연극 담론의 종말
<연극in>은 서울문화재단 산하 서울연극센터가 웹진의 형태로 발간하는 일종의 연극 평론지었다. 2012년 6월 창간되어 10여 년 간 공연 리뷰와 인터뷰, 희곡 등에 지면을 제공하며 유의미한 담론들을 형성해왔다. 작가들이 희곡을 투고했던 이유도, <연극in>을 단순한 공모 지면이 아닌 '지금 여기'의 연극이 머무는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기록은 현재를 통해 연극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더군다나 <연극in>의 일방적인 폐간 사태는 연극평론이 기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면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한 폐간이 아니라 시대적 징후다.
사태의 심각성에 공감하며 2000명 이상이 서명했다. 이 숫자는 연극 종사자와 관객 규모를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숫자다. 예술인복지재단에 등록된 연극예술인이 2025년 8월 기준 2만 명가량이므로, 해당 사안은 연극계 내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고 지켜보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평론가만이 소리 내어 외칠 뿐, 한국연극의 대다수 평론가가 여전히 <연극in> 폐간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기이하다. <연극in>의 폐간이 담론 전체의 종말은 아니다. 그러나 연극 평론지가 <연극in> 폐간이라는 동시대를 다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말의 전조다.
평론의 부재는 담론의 공백을 낳는다. 기록되지 않은 연극들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갈 수 없어 현재에 머물다 사라진다. 작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연극 평론의 종말은 곧 담론의 종말이요 연극 그 자체의 종말인 셈이다.
서울문화재단은 <연극in>을 폐간한 후, 올해 7월 중순에 스파크(SPAC, Seoul Portal for Approved and Curated), 즉 '지원사업 선정작을 기반으로'한 '선정작 정보 포털'을 열었다. 정보와 기록은 같은가? 연극이 제도가 선택한 서사로만 남는다면, 제도가 원하지 않는 연극은 현재만 남긴 채 사라져야 하는가?
<연극in>의 공공성
<연극in>의 폐간은 단지 희곡이 게재되지 못한 작가와 리뷰 필자들, 즉 소수의 피해가 아니다. <연극in>의 공공재적 성격을 드러내는 확실한 지표들이 존재한다.
지난해 서울문화재단이 진행한 <연극in> 설문조사를 살펴보면, 설문에 응한 70~80%가 '주요활동장르' 및 '연극에서의 수행 역할'에 '해당 없음'으로 표기했다. 이는 자신을 특정한 분야 예술가나 연극 분야 종사자로 정의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직접적으로 직업을 묻는 문항에도 일반시민으로 답한 비율이 37.2%이다. 나머지 항목인 학생, 창작자, 문화예술 관련기관 종사자 중에 가장 높은 수치다.
이는 <연극in>을 구독하는 3명 중 1명이 시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콘텐츠 만족도 또한 10명 중 8명이 만족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충분한 공공성과 그간의 성과를 드러내는 여러 지표가 있음에도 <연극in>의 예산이 삭제됐다는 것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서울문화재단이 시민 대신에 다른 것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정의 배후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언명과 실행의 간극
서울문화재단 송형종 대표는 지난 1월 임명된 후 '서울어텀페스타'를 위해 각종 사업의 통폐합을 진행했다. <연극in> 폐간도 그 연속성 상에 있다. 문화예술생태계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12년 동안 재단이 직접 조성한 하나의 예술생태를 깨트린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서울문화재단 9기 전략을 경청, 소통, 혁신을 과제로 내세웠으면서도 <연극in>을 복간해달라는 예술가들의 목소리에는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해 급작스런 인사 이동 등을 강행하는 기관장의 행동 또한 모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기준과 연속성 없는 서울문화재단의 결정으로, 산하 기관인 서울연극센터는 2024년 배정된 <연극in> 예산의 일부를 불용상태로 처리했고 결국 시민과 약속한 정책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2025년에 이미 배정된 <연극in> 예산 또한 현장과의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삭제됐다.
송형종 대표는 현장 예술가를 만났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희곡이 실리지 못한 작가와 약속된 원고가 남은 리뷰 필진들은 예산 전용에 관해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연극센터는 지난 4월 29일에 <연극in>을 삭제한 예산안에 대표 이사의 최종 결재를 이미 받았으면서도, 6월이 되어서야 미게재 작가와 리뷰 필자와의 간담회를 열었다. 6월에 열린 간담회 자리에서조차 더 이상 예산이 없는 <연극in>의 하반기 복간 가능성을 거론하며 현장과의 신뢰관계를 저버리기도 했다.
예술정책의 손바닥 뒤집기
제도와 정책을 말하는 정치인의 약속은 언제나 희망차다. 그러나 정치권의 임명으로 예술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예술정책의 방향성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융성'을 말한 박근혜 정부의 검열사태가 그랬고, 윤석열 정부 당시 예술강사 예산 삭감이 그렇다.
윤석열 정부가 늘봄학교 정책을 강조하자, 문체부가 2024년 학교예술강사 예산을 0원으로 삭감했던 계엄 이전의 일을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현장과 교육을 병행하는 예술가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정책 결정 이후 예술강사의 자리는 극우성향의 '리박스쿨' 강사로 대체됐다. 이해할 수 없는 정책 결정의 표면 안쪽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다.
이번 <연극in>의 문제는 단편적인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예술계 안에서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기관장에 따라 급변하는 정책으로 인해 예술가도, 기관의 실무자도 애써 심은 것을 뽑고 또 새로 심기 바쁘다.
심고 키우는 것 없이 관리자가 바뀔 때마다 땅의 개간을 반복하기에 예술은 결국 불안정한 토양이 된다. 예술에 시간이 필요 하다는 사실은 굳이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예술인 권리보장법 제 5조 4항에는 "국가기관 등은 예술인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시행하는 경우 정책 결정과정에 예술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라며 예술인의 정책 참여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묻고 싶다. 정책을 만드는 것은 누구여야 할까?
예술정책은 더 이상 손바닥 뒤집기 식으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현장에서 마주하는 예술가와 기관의 실무자, 그리고 시민이 함께 논의해야 할 공공의 과제다. 한 사람의 전횡을 견제하고 공공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이사회·감사·상위 기관의 감독·노조·시민참여 등의 제도가 이미 갖추어져있다면, 다시금 그 효용을 점검해야할 때다.
예술은 시혜가 아니라 권리이며, 정책은 그 권리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어야 한다. 생태계는 외부의 힘보다는 내부의 힘으로 건강해진다. <연극in>을 만들고, <연극in>을 썼으며, <연극in>을 읽었던 우리는 모두 <연극in>의 복간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그 힘을 되찾을 때, 비로소 연극은 단단한 토양 위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