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대단히 한국적인 장례식 장면이 등장한다. 답답한 삼형제 중에서도 가장 답답한 첫째는(박호산 역) 노모가 돌아가시면 썰렁할 장례식장을 미리 걱정해, 대기업에 다니는 둘째에게(이선균 역) 절대 회사 그만두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둘째가 상무로 승진하자, 화환 가득한 장례식장을 상상하는 첫째의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하다.
주인공 이지안(아이유 역)의 할머니 빈소를 찾은 첫째는,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어린 이지안을 위해 인생에서 가장 큰 턱을 쏜다. 청소 일을 하며 모아두었던 비상금을 털어 수십 개의 화환을 주문해 장례식장을 위엄있게 꾸민다. 그게, 그 어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참으로 속물적인데, 그래서 캐릭터가 더 잘 이해돼서 좋았다. 현실과 떨어진 이야기라고 할 수 없기에 더 애잔했다. 차라리 현금을 직접 주는 게 도움 되지 않냐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돈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며 주눅 들기만 했던 중년은 자신의 추락한 자존감을 가장 한국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며 뿌듯해한다. 외국인 친구가 이 장면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봐서 끙끙거렸던 기억이 있다.
문화란 그런 거다. 한국의 장례식장에서 저 꽃들의 도열이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어찌 한국 밖에서 알겠는가. 화환의 수가 죽음을 더 돋보이게 하고 상주가 어찌 살았는지를 증명하는 사회를 아무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옆 빈소보다 북적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옆 빈소만 북적거리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주의 감정이 인간 본성은 아닐 거다. "빈소가 썰렁하네", "자식이 어떻게 살았길래, 화환이 하나도 없냐"라는 말을 우리는 살면서 몇 번은 듣는다. 본인이 어느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뱉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신경 쓰인다.
이해관계 없는 결혼식이 가능한가?
결혼식은 더하다. 죽는 일자를 정하지 못하는 장례식과는 다르다. 뿌린 만큼 거두지 못할지도 모르는 게 죽음이지만, 축의금 회수는 살아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인생의 숙제다. 일시, 장소가 정확히 적힌 청첩장은 몇 달 전에 돌고 돈다. 그걸 받은 자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날 미리 아플 것 같다고 뻥을 치기도 어렵다.
어떻게든 티를 내야 한다. 갔으면 얼굴 도장 확실히 찍고, 방명록에 이름도 평소보다 더 또렷하게 적는다. 가지 못하면 어떻게든 갈 사람을 찾아 돈을 전달한다. 그런 수고를 대비해 청첩장엔 계좌번호가 친절히 적혀있다. 현금 없어도 괜찮다. 카드 결제도 가능한 세상이니까.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남은 건 얼마를 해야 하느냐는 거다. 돈 5만 원 내고 가족들까지 데리고 와서 밥 먹였다는 아무개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롱거리였는지 잘 알기에 금액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청첩장과 함께 오가는 "아이들 데리고 와서 밥 먹어"라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가는 큰일 난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직접 경험한 사람이라면 안다. 늦은 밤,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봉투에 적힌 이름과 금액을 확인하면서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는지를 말이다. 그 원시적 추임새 말이다. 이 사람 많이 넣었네, 그 친구는 왜 이것밖에 안 했지 등등. 최소한 그 입방아에 오르내리진 않을 금액을 넣어야 한다.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관계겠는가. 서로 별 이해관계가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회생활에서 맺어지는 관계는 그렇게 평이하지 않다. 권력이라고 꼬집어서 말을 안 할 뿐이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수직적으로 분류하는 강한 힘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없는 자는, 있는 자의 눈치를 본다. 그러니 시간을 내서 가야 한다.
있는 자는,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내서 그 사람이 왔는지를 확인한다. 그래서 이왕 결혼할 거면 아빠가 정년퇴직 전에 식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 흔했던 거다. 뭐, 엄마가 국회의원 임기 중에 하면 좋은 거랑 같은 말이다. 이왕이면, 상임위원장 타이틀이 있을 때가 더 기막힌 타이밍이지 않겠는가.
그 힘은 대단했다. 혼주는 양자역학을 공부한다고 딸의 결혼에 별 관심도 없었다는데 다 알고서 찾아온다. 국회의원, 그것도 상임위원장이 맺는 관계란 그런 거다. 오라 한 적 없어도 오고, 오지 말라 해도 온다. 혼주가 국회의원 아니었다면, 상임위원장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지 않을 사람들이 온다. 아주 많이. 봉투를 들고. 그 안에 얼마나 넣을지 고심은 깊었을 거다.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관계니까 말이다. 그래서 적당한 금액을 정한다고 끙끙거렸을 거다. 이런 결혼식, 정말 싫다.
나는 양자역학을 모르지만, 국회의원이 혼주인 결혼식 풍경을 상상하고 예측하는 게 양자역학보다 훨씬 쉽다는 것은 안다. 그러니, 양자역학 공부할 시간에 구체적으로 벌어질 일을 차단했어야 한다. 각오만 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을 거다.
꼼꼼하게 진두지휘했다면 돈의 유입되는 통로를 막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다. 절대 받지 않겠다는 문장을 청첩장에 넣고, 현장에서도 봉투 꺼낼까 말까하는 사람에게 "받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한 명만 있으면 될 일이다. 이런 결혼식, 정말 좋다.
살다 살다 받은 돈 목록 확인하며 돌려주는 혼주는 처음 보았다. 결과적으로 받지 않았으니 그만일까? 돈을 돌려주면, 시간을 내서 결혼식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봉투를 내고 방명록을 적었던 누군가의 행위와 그 돈의 금액이 지워진다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넣어서 확실하게 마음 표시를 할 걸 그랬냐면서 후회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을 바라보는 쪽에 과연 없을까?
너무 과한 기준일까?
왜 국회의원은 그래야 하느냐면서 따질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충분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국정감사에서 본인들 하나하나를 입법기관이라 칭하며, 증인과 참고인을 향해 마음껏 호통을 치는 사람이다.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다. 호통에 위엄이라도 있으면 좋겠으나, 이제는 아이들이 혹시나 그 장면을 볼까 봐 겁이 날 정도다. 그만큼 막무가내일 수 있는 건, 그만큼 권력을 지녀서다. 이 관계에서 돈이 오가는 게 어찌 상식적이겠는가. 이것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입법기관이라? 좀 우습다.
이런 결혼식, 정말 싫다. 이런 장례식, 정말 싫다. 온갖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혀서 괜한 걸 걱정하고 판단하고 또 품평의 대상이 되는 걸 그저 한국의 문화라면서 넘겨야 하는가. 변화는 많은 이들의 결심 없이는 불가능할 거다. 혼주가 될 사람의 각오도 중요하다. 특히, 국회의원 플러스 상임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혼주라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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