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기 두 달 전에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이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됐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표현이 일상화됐을 정도로, 원전은 상한가를 누리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고유가로 인해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국내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성사한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을 계기로 장밋빛 전망이 가득했었다. 이런 호황기에 또 하나의 날개를 원자력에 달아주었던 이슈가 바로 기후변화였다.
지구온난화로 대변되는 재앙은 그때나 지금이나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2015년 유엔이 파리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인류가 달성해야 하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파국을 향한 기후 시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탄소중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후임 윤석열 정부에 의해 잊혔으며, 현직 이재명 대통령의 기후 대응 의지는 아직도 모호한 상태다. 이러한 시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원자력에 대한 친환경 이미지가 구축했던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시간이 한참 흘러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서야 기후친화적 원자력에 관한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탈원전을 표방한 대통령이 처음으로 당선되면서, 원자력계는 충격에 휩싸였었다. 과학기술 및 산업계뿐만 아니라 관료집단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해 온 친원자력 집단에 대한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 지형이 격변한 것이다. 대학에서는 녹색원자력학생연대라는 결사체가 만들어졌으며, 원자력정책연대는 사단법인으로까지 진화했을 정도였다. 이들이 문재인 정부에 반대하며 내세운 근거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친환경 에너지로 원자력이 사실상 유일하다는 것이었다. 국제 사회에서 기후변화 이슈를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했던 원자력 르네상스 논의가 국내에서는 십 년이나 지나서야 전개되었던 셈이다.
이후 윤석열 정부는 월성 1호기 폐쇄가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집권에 성공했으며, 취임 이후로는 막대한 자금을 원자력계에 지원해 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원자력계는 기후변화 대응을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당시의 대통령도 탄소중립 목표를 계승하겠다고 표명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친원자력 집단들도 기후변화 정책과 무관하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비상계엄과 더불어서 정권이 다시 교체되고 말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원자력 정책도 기후 대응만큼이나 모호한 편이다. 대선 당시에도 '감(減)원전'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함으로써 반핵 또는 탈핵 논의를 비껴갔으며, 민주당이 어떤 정책을 지향하는지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집권 이후로도 신규 원전 건설에 15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새로 지을 후보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하기 때문에, 여전히 전략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는 불리한 위치에 놓인 원자력계에서 다시금 기후변화 대책이라는 주장을 쏟아낼 가능성이 있다. 매년 폭염과 혹한이 반복되고 자연재해가 늘어날 때마다, 원자핵공학과 교수들은 무탄소 에너지를 살려내야 한다고 되뇔 것이다. 그렇지만 기후변화는 지금의 경제·사회·도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에너지 공급원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IPCC라는 국제기구에서 정리했듯이 모든 시스템의 전면적 전환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구조와 저효율 에너지 수급 시스템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원전만 늘릴 경우에는, 지구온난화가 오히려 악화할 수도 있다.
이처럼 기후변화를 등에 지고 있는 원자력의 은밀한 유혹이 이어지는 가운데, 불리한 상황에서 반복되는 신파극 같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지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행사에서 한국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 추진 잠수함을 건설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세계대전 직후에 미국은 사실 원전보다 핵잠수함을 먼저 개발했었다. 왜냐하면 원자력에 의한 전기 생산은 상대적으로 시급하지 않았지만, 전후 냉전체계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군사력을 발휘하기 위한 잠수함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미국은 지구상의 어떤 분쟁지역에도 핵잠수함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핵잠수함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직 한반도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에 대응할 때는 대륙 간 핵잠수함이 아닌 디젤 잠수함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의 핵 추진 잠수함을 추적하려면 한국도 필요하다는 논리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했으며, 이는 미국을 도와줄 테니 허락해달라는 제안이었다. 통일 이후의 국제 패권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면, 휴전 상태의 남한에 핵잠수함은 당장 시급한 사안까지는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원자력의 유혹이 숨어있다.
미국에서는 원자핵공학과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다. 그렇지만 미국은 여전히 100개의 원전을 운영하는 세계 1위의 국가이다. 그렇기에 졸업생이 부족한 상태에서 원전을 담당하는 인력은 대학이 아니라 군대를 통해 공급되고 있다. 즉, 세계적 군사 대국인 미국은 핵 추진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을 구비하고 있으며, 이들 대형 전략 자산에서 원자로를 운전했던 인력들이 전역 이후에 원전 업체에 근무하는 고용 수급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한국도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신규 원전 건설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대학에서는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졸업생들이 매년 배출되고 있다. 이들이 핵잠수함을 설계․제작․운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업체에 취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대통령의 제안은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 원자력계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일지 모른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허락하는 듯싶더니, 이내 미국 내 조선소에서 만들라는 단서 조건을 달았다. 그렇다면 한국이 핵잠수함을 구매하고 소유할 수는 있겠지만, 국내 원자력 전공자들이 취업할 일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또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원자력 정책의 유혹은 기후변화와 핵잠수함에 은밀히 숨겨져 들어온다. 무궁화꽃에 또다시 속지 않으려면,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한다.
※ 관련 기사 : "실용주의 이재명 정부의 탄소중립 미래는?", <프레시안>, 202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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