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이 ‘피지컬AI(Physical AI)’를 새로운 산업 키워드로 내세웠다. AI 기술을 로봇·센서·데이터와 결합해 제조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역 산업 구조를 혁신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북도는 “이제는 제조업의 재도약이 필요하다”며 농기계·자동차 부품·철강 등 주력 산업에 AI 기술을 입혀 새로운 르네상스를 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수식어가 지역의 현실과 맞물릴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속 가능한 실증, 인력 양성, 중앙정부 예산 의존도 등 전북형 산업정책의 고질적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 “다품종 소량생산에 강점”…피지컬AI, 전북 제조 DNA와 맞닿다
전북의 제조업은 늘 ‘영세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2022년 기준 전북의 GRDP(지역내총생산)는 61조 원으로 전국 12위에 머물렀고, 도내 제조업체 1만3600여 곳 중 96.7%가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이다.
종사자 14만여 명 가운데 84%가 전주·익산·군산·완주·김제에 몰려 있으며, 제조업체의 78%도 이 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전북도가 주목한 해법이 바로 ‘피지컬AI’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CES 2025에서 “피지컬AI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언급한 것처럼, 물리 세계와 디지털 기술을 결합해 생산 전 과정을 자동화·지능화하는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이다.
피지컬AI는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다. 로봇과 센서, 컴퓨터가 현실의 공정을 인식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작동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대량생산보다 다품종 소량생산과 유연한 공정에 특화된 전북의 산업 구조와 잘 맞물린다. 농업·기계·자동차·철강을 잇는 복합 산업 생태계가 피지컬AI 실증에 유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 완주·군산·익산·김제·전주 ‘AI 황금벨트’ 구상…2조 원 투입해 실증 생태계 구축
전북은 이제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완주·군산·익산·김제·전주를 하나의 ‘AI 제조 황금벨트’로 연결해, 부품 생산부터 완성차 조립, 농기계·특장차 검증까지 이어지는 '전주기 실증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군산에는 자율주행 상용차 실증단지, 완주에는 수소제품 인증센터, 새만금에는 지능형 농기계 실증단지가 들어서 있다. 전북도는 이들 거점을 AI 기술로 연계해, 생산·물류·검증이 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스마트 제조 체계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도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2조 원을 투입한다. ‘협업지능 피지컬AI 플랫폼 연구개발 사업’을 중심으로 전북대·KAIST·성균관대·현대차·네이버 등 산학연이 참여한다.
GPU 1000장이 구축된 고성능 컴퓨팅센터와 공동연구센터, 검·인증센터를 마련해 모빌리티·물류·푸드테크 등 주요 산업군의 실증을 병행할 예정이다.
이어 2단계에서는 전북대와 완주 이서면 일원에 ‘피지컬AI 로봇 스타트업 캠퍼스’를 세워 AI·로봇 인재를 양성하고 창업기업을 육성한다. 전북도는 이를 통해 전북을 대한민국의 ‘AI 제조 실험실’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 “밭에서 식탁까지”…농업과 제조업을 하나로 묶는 시도
전북형 피지컬AI의 가장 큰 특징은 농업과 제조업을 동시에 다룬다는 점이다.
전북은 전국 상용차의 97%를 생산하는 곳이자, 농기계 산업의 중심지다. 이 강점을 살려 ‘농업–기계–식품–물류’를 하나의 데이터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농기계가 밭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면, 그 데이터가 식품공장의 생산 계획으로 전달되고, 물류 시스템이 자동으로 출하 일정을 조정하는 구조다. ‘밭에서 식탁까지’의 전 과정을 하나의 인공지능 생태계로 잇는 셈이다.
이 모델이 완성되면 전북은 ‘농업 기반 지역의 첨단산업 전환’이라는 새로운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기술이 농업의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지역의 산업 저변을 넓히는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 “기술보다 중요한 건 지속성”…중앙 의존·인력 공백, 전북이 넘을 산
하지만 전북도가 내세우는 ‘르네상스’가 실제 산업 구조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속성이 중요하다. 전북의 다수 국책사업이 중앙정부의 예산 축소나 정책 변경으로 중단된 전례가 있고, AI·로봇 분야는 인력 부족이 여전히 심각하다.
2024년 기준 국내 AI산업의 인력 부족률은 14%를 넘었으며, 전북은 기술기업의 90% 이상이 여전히 스타트업 단계에 머물러 있다.
지역 산업 전문가들은 “피지컬AI는 첨단기술이 아니라 생태계 전략”이라며 “AI 기술을 새로 개발하는 것보다, 이를 지역 제조 현장에 녹여낼 중간 기술인력과 테크니션을 키우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 지역 연구자는 “AI를 만드는 일보다 더 어려운 건 AI를 현장에 녹여내는 일”이라며 “데이터를 이해하면서도 공정을 아는 현장형 인재를 키우지 않으면 이번에도 또 하나의 ‘시범사업’으로 끝날 수 있다”고 말했다.
◇ “산학연 협력, 이번엔 제대로 작동할까”
전북도는 피지컬AI 사업을 통해 전북대·완주·새만금·군산을 잇는 산학연 네트워크를 새롭게 재편할 계획이다.
연구와 산업, 행정을 하나로 묶어 AI 기술의 연구개발부터 실증, 상용화까지 이어지는 ‘전북형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과거 유사한 클러스터 계획들은 협력 구호에 비해 실질적 성과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관 간 칸막이, 미흡한 데이터 공유, 기술 이전의 한계 등이 지적돼왔다. AI 실증단지의 결과가 지역 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다.
피지컬AI 사업이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첫 사례가 되려면 행정이 주도하는 관리형 방식을 벗어나 산학연이 자율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한 대학 연구원은 “이제는 도가 방향만 제시하고, 현장 기업과 대학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며 “AI는 ‘사업’이 아니라 ‘생태계’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술은 빠르게, 지역은 느리게”…르네상스의 조건
신원식 전북도 미래첨단산업국장은 “전북은 농업과 제조업이 공존하는 독특한 산업 구조와 완성도 높은 제조 생태계를 갖고 있다”며 “이런 기반이 피지컬AI를 실증하고 확산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피지컬AI는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제조업의 체질을 바꾸고 지역 산업 전반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 동력”이라며 “나아가 인구감소와 고령화 같은 지역 사회 문제에도 새로운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기술의 속도와 지역의 변화 속도는 늘 같지 않다. AI가 공장을 바꾸더라도, 그 변화가 지역의 일자리와 산업 생태계로 확산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북도는 실증 사업과 인력 양성, 기업 지원을 병행하며 피지컬AI의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결국 이번 사업이 ‘기술의 혁신’을 넘어 지역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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