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Z세대 혁명' 다시 읽기…혁명의 유산, 누가 네팔의 미래를 훔친 걸까?

[다시! 리영희] 잿더미 위의 공화국, 네팔 봉기가 부순 것과 남긴 것

2025년 9월 8일 오전 9시에 시작된 네팔 시위는 다음 날 오후 2시 42분 K.P 샤르마 올리 총리가 사임하면서 끝났다. 물론 여진과 약탈은 이튿날까지 이어졌지만, 적어도 정권을 붕괴시켰다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걸린 시간은 29시간 42분. 수실라 까르끼 임시 총리의 선서까지 본다면 107시간, 약 나흘하고 열한 시간 만에 기존 정권이 붕괴하고 임시 총리 취임까지 사건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발화점은 올리 정부의 전격적인 SNS 차단이었지만 그 위에 얹힌 장작은 부패와 불평등, 그리고 세습 특권에 대한 젠지 세대의 누적된 분노였다.

네팔에서 SNS의 위상은 한국 등 일세계에서 보이는 자기애 과시와 여흥이 아닌 생계 수단에 가깝다. 네팔은 인구의 10%가량인 약 350만 명이 해외 취업 중으로 이들의 본국 송금액이 국가 총생산의 30~35%에 달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흔히 네팔 하면 관광업을 떠올릴 수 있는데 총생산 대비 관광업 비중은 약 6.7~8%, 관광업으로 인한 고용도 7.7%가량이니 네팔 제일의 산업은 해외 인력 송출업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SNS의 접속 차단은 대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는 해외 근무 가족들과의 연락 두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DM으로 이루어지는 호텔, 레스토랑 예약 업무의 중단, 해외 취업자에 대한 줌을 이용한 면접 시스템 이용 불가 같은 광범위한 문제를 야기시키며 네팔 경제 전반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기화될 경우 많은 네팔 국민들이 생계에 치명적 타격을 입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SNS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수반하기 마련이다. 네팔에서는 SNS 차단이 있기 전, 정치인과 관료들이 자신들의 가족에게 비공식적 방법으로 특혜를 제공하는 족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었다. 네팔에서는 이런 식으로 '아빠 찬스' 특혜를 받는 고위 정치인과 관료들의 자녀들은 네포키즈(Nepokids)라고 부르던 중이었다.

9월 8일 재난 지원 사업을 주로 하던 하미 네팔(Hami Nepal)을 위시한 몇몇 NGO들이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은 그때까지 네팔 당국에 의해 차단되지 않은 온라인 플랫폼인 디스코드에 서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집회 당시 외칠 구호 선정, 경찰 진압에 대한 대응 가이드 등을 배포했다. '무슨 무슨 투쟁위' 같은 공식 지도부는 없었다. 디스코드에는 다양한 시위 의견이 올라왔고, 시민들은 그 안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가장 많은 호응 의견이 올라오면 그게 채택되는 안건이 됐다.

오전 9시, 우리나라의 정부종합청사 격인 싱하 두르바르 광장에서 시위가 열렸다. 시위 규모는 생각 외로 크지 않아 수만 명 수준이었다. 카트만두의 인구는 320만이다.

싱하 두르바르 광장은 청와대가 있던 시절 광화문 광장 같은 곳이다. 싱하 두르바르 안에 총리 공관, 거의 모든 정부 부처, 네팔 연방 의회가 모두 붙어 있다. 즉 한국의 과거 청와대보다 상징성이 더 큰 곳이다.

그러니 시위는 일부에 의한 경찰 저지선 돌파 시도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 대열 간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사후 네팔 경찰의 변명에 의하면 이날 네팔 경찰은 비살상 무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찰에 따르면 수년에 걸쳐 비살상 무기 구입을 정부에 요청했지만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처음엔 최루탄과 물대포를 썼지만 얼마 안 가 경찰 저지선이 붕괴하자 실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총성은 모든 걸 바꿨다.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시대, 현장의 처참함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네팔 정부의 SNS 금지 방침에도 불구하고 틱톡과 같은 일부 SNS는 정부 정책 협조를 약속하며 제외 대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분노한 시민들은 경찰 저지선을 붕괴시키고 정부종합청사로 난입해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디스코드에는 정치인들의 집 주소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좌표가 찍힌 그곳으로 모여들었고, 주요 정치인의 집에도 방화가 시작됐다.

네팔 정부는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 발포당일인 9월 8일 내무부 장관이 유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다음날 정부는 SNS 금지 정책을 철회했으나, 수많은 시신을 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SNS의 금지·재개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9월 9일 오후 2시 45분 총리인 K.P 샤르마 올리가 사임을 발표했다.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대통령이 사임한 K.P 샤르마 올리에게 혼란을 수습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임시 총리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혼란은 9월 12일 전 대법원장 수실라 까르끼가 시위대와 군부, 대통령의 추인을 받아 임시 총리에 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파괴

29시간 만에 정권이 붕괴됐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29시간 만에 벌어진 파괴 행위 또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싱하 두르바르에 속한 연방 의회, 총리실, 각 정부 부처의 반절가량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됐다. 화재는 종이로 된 모든 자료를 태워버린다. 디지털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복구 시도라도 해볼 수 있지만 종이는 끝이다. 9월 9일 화재로 대법원도 함께 불에 탔는데, 네팔의 고질적인 부정부패 수사 자료와 오랜 시간 축적해놓은 재판 자료들도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시위대의 가장 큰 요구 중 하나는 부정부패 일소였는데, 그 부정부패를 수사할 증거들이 모두 사라진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폭력 사태는 수도인 카트만두뿐이 아니었다. 전국 753개 지방 정부 중 300개가 불에 탔고, 인구 밀집 지역인 카트만두 계곡 일대에 있던 218개의 경찰서 중 112곳이 전소, 98곳이 화재 피해를 입었다. 한국 언론에도 보도됐지만 전국에서 약 1만4000여 명의 죄수가 교정 시설에서 탈옥, 현재까지도 6000여 명이 도주 중이며, 봉기 당시 총기 1200여 정과 탄약 10만 발이 탈취, 현재까지 행방이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폭력은 국가 공권력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최소 37곳의 보건 시설도 전소됐고, 이 중 백신을 보관하는 콜드체인 시설 13곳도 불에 탔다. 이로 인해 네팔의 영유아 의무 접종이 일부 불가능해졌다. 1인당 GDP가 US$1,193에 불과한 네팔의 보건소 시설은 유니세프 자금으로, 골드체인 시설은 일본 ODA로 건설됐기 때문에 자력으로 재건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마오이스트-왕국군과의 내전 기간에도 보건 시설이 공격당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네팔 사회의 충격은 더 크다.

이외에도 전국 약 60개의 은행이 공격을 받아 ATM의 현금이 모두 강탈됐고, 싱하 두르바르 안의 네팔 국경 은행에서만 금 18kg이 탈취당했으며, 전국 체인 마트인 바트 바테니의 매장 28곳 중 21곳이 약탈 대상이 됐다.

이게 불과 수십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다. 이로 인한 피해액은 대략 3조 네팔 루피로 추산되는데, 이는 네팔 연간 GDP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다.

▲ 네팔 카트만두에서 "Z세대"가 대규모 반부패 시위를 주도한 지 한 달 후인 10월 10일(현지시간) 불타고 파손된 의회 건물벽에 '헌법을 수호하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AP=연합뉴스

사민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마오이스트

이번 분노를 달군 상징은 네포키즈라 불리던 혁명 1세대 정치 엘리트 자녀들이 SNS에서 보여준 노골적인 플렉스였다. 청년들은 '우리가 해외로 떠나거나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목숨을 거는 동안 누군가는 부모 잘 만나 SNS 속에서 부를 과시한다'고 느꼈다. 이는 확실히 분노의 트리거로 작동했다. 관련한 해시태그와 밈이 증폭 장치가 되면서 '부패와 특권' 프레임이 정서적 동력이 됐다.

네팔의 원래 국명은 KINGDOM OF NEPAL, 즉 네팔 왕국이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최초로 탄생한 게 2008년이다. 공화국이 탄생하기 전 네팔은 마오이스트의 봉기로 인한 10년 내전을 겪었다. 당시만 해도 입헌 군주국이었던 네팔 왕국의 주요 정당 중 하나가 네팔 국민회의, 그리고 네팔 공산당 마르크스 레닌(이후 네팔 공산당 ML)이다. 네팔 국민회의는 당시 1당으로 네팔 왕국군을 지휘해 마오이스트와 맞섰고, 원내에 있던 네팔 공산당 ML도 마오이스트에 대해 극좌적 모험주의라며 적대시했다.

전황은 왕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얼마 전까지 농민이었던 반군에게 왕립군이 패배했고, 내전 말기로 가면 카트만두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를 제외한 네팔의 전 국토가 반군에게 떨어졌다.

2005년 왕은 무능한 정치인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치안 회복과 반군 극복을 이유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의회가 해산됐고, 전제 정치가 부활됐다.

이 일을 계기로 네팔 내 모든 정치 세력이 왕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국왕과의 대결, 즉 민주주의 회복을 선언했다. 이들이 왕과 맞설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마오이스트들이 제공했다. 2005년 11월 네팔의 주요 정치 세력들은 12항 합의를 발표한다. 주체는 크게 둘, 왕정에 맞서는 네팔 7개 정당 연합 그리고 마오이스트들이었다. 마오이스트가 정치 세력이자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 인정받았고, 토벌군을 지휘하던 구 여당 네팔 국민회의와 반군인 마오이스트가 군주제 타도라는 전선 속에 동지가 됐다.

이들의 합의는 총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 입헌 군주제 종식. 이 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입헌 군주정을 지지하던 네팔 국민회의의 양보가 있었다.

2. 헌법 제정 회의 소집

3. 마오이스트 무장 투쟁 종식, 마오이스트 정치 참여 수용, 좌파 블록이지만 입장을 달리했던 네팔 공산당 ML이 유일한 좌파 합법 세력이라는 독점적 위치를 마오이스트와 나누는 쪽으로 양보한 결과다.

4. 평화적 시위와 시민 불복종 운동 병행. 이 건에 대해서는 마오이스트가 무장 투쟁 포기로 양보를, 네팔 국민회의가 마오이스트에 대한 입장을 기존 테러 집단에서 정치 주체로 인정하며 양보했다.

여파는 엄청났다. 합의 직전 마오이스트들은 네팔의 75개 구 중 68개 주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 효과 또한 상당했다. 2006년 4월 록탄트라 안돌란, 번역하자면 민주주의 운동이 재개되면서 19일간에 걸친 총파업과 수십만 명이 참여한 카트만두 시위 끝에 갸넨드라 국왕은 항복을 선언, 2002년 본인이 해산시킨 의회를 복원시켰다.

복원된 의회는 즉각 왕의 모든 권한을 박탈했다. 2008년 5월 제헌 의회 선거가 실시됐고, 이 선거 결과 10년간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총을 들고 왕정에 맞선 마오이스트가 제1당으로 화려하게 제도권에 입성했다. 2008년 5월 28일 제헌 의회는 첫 번째 회의에서 왕정 종식을 결의하고 연방 민주 공화국 건설을 선포했다. 10년 내전 기간 마오이스트 반군을 이끌던 프라찬다가 공화국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다.

혁명의 유효기간

새로 수립된 네팔 공화국은 대중들에게 토지 개혁과 과거사 청산 그리고 네팔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선보였다. 특히 토지 개혁은 10년 내전 기간동안 마오이스트가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핵심 동력이었다. 산에서 전투만 벌이던 마오이스트들에게 제헌 의회 1당을 몰아준 것도 이런 염원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1당이래 봐야 601석 중 229석이었다. 내각제 하에서 총리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한때 마오이스트들이 타도해야 한다는 왕정 하의 그 제도권 정당과 말이다. 연립 정부 구성의 핵심 쟁점은 토지 개혁 문제였고, 마오이스트 지도자 프라찬다는 그 핵심 쟁점을 유예시킴으로 총리직에 오른다.

더 큰 문제는 마오이스트 엘리트들 스스로가 새로운 기득권층, 어찌 보면 카트만두의 새로운 왕족이 되었다.

산속에서 총을 들었던 그들은 국회의원이 돼 특권을 누렸고 수도의 화려한 저택에서 살며 한때 그들이 타도하고자 했던 지주, 엘리트 계층과 얽히기 시작했다.

네팔의 과거사 청산은 10년 내전 기간 동안 약 1만 7천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실종자를 낳은 전쟁 범죄를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자는 주장이고, 이는 공화국 성립 당시 모든 정당의 공통된 약속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 전쟁범죄라는 것이 한쪽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게 아닌, 정부군 혹은 마오이스트 반군이 모두 얽혀 있는 데다, 양쪽 세력이 제헌 의회 수립 직후부터 연립 정부를 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얽히고설킨 상황이다 보니 결국 누구도 이 문제를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 심판자가 된 셈이다. 2015년이 돼서야 정치적 흥정 끝에 과거사 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럼에도 6만 건의 피해 사례가 접수됐지만 단 한 명의 고위급 가해자도 처벌받지 않았다. 정부군, 마오이스트 모두 말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안정'이다. 네팔 혁명은 많은 나라가 혁명 후 겪는 일종의 혼란한 청산 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 급속도로 기득권이 되어버린 혁명가들의 얼굴만 남겼다.

프라찬다, 왕을 몰아낸 세 명의 새로운 왕 중 하나

마오이스트 지도자 프라찬다의 본명은 푸시파 카말 다할. 프라찬다는 '사나운 자'라는 의미로 그가 반군 지도자였던 시절 알려진 이름이다. 지금이야 엄연히 푸시파 카말 다할 의원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프라찬다라고 부른다. 그는 10년 간의 네팔 내전을 이끌며 네팔 전 국토의 80%를 실질 지배한 혁명의 아이콘이었다.

그와 관련된 삶에서 가장 수수께끼인 부분은 인민 혁명의 문턱에서 왜 타협했는가라는 점이다. 인민 전쟁(네팔 내전) 말기 네팔은 전 국토의 80%가 마오이스트의 수중에 떨어졌고, 왕국이 작동하는 지점은 카트만두와 포카라 등 몇몇 거점 도시들뿐이었다. 게다가 왕이 전제정을 선언하며 대부분의 정당이 군주제 타도를 외치는 와중에 군사력을 가진 그는 기존 정당을 흡수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당시 상황에서 보면 시간은 프라찬다의 편이었다.

그는 산에서 내려온 후 여러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상황에 대해 본인의 입장을 밝혔는데, 크게 요약하자면, 카트만두 점령을 시도했을 경우 격렬한 시가전이 필연적으로 동반돼 카트만두가 피바다가 됐을 텐데, 이럴 경우 인도가 군사 개입을 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게다가 당시 미국 역시 마오이스트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왕립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만약 인민 전쟁에 성공했다고 해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국제적 고립이 필연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굳이 무리하게 인민 혁명으로 가지 않아도 갸넨드라 국왕이 전제적으로 선포하면서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프라찬다는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본인은 혁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방식을 수정했다고 주장한다.

공화정 수립 과정까지만 보면 그의 입장 변화는 궁극적으로 그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겼다. 그는 반군 지도자에서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화려하게 변신했고, 록탄트라 안돌란을 승리로 이끌며 총 한 방 쏘지 않고 카트만두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문제는, 이 위대한 타협이 공화국 수립의 토대가 되었지만, 동시에 함께 혁명 정신의 배신이라는 씨앗도 잉태했다는 점이다. 전술했듯 제헌 의회 선거에서 마오이스트는 압도적인 1당은 됐지만 과반은 차지하지 못했다. 당시 마오이스트의 승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만큼 농촌에서의 지지가 압도적이었고, 이는 농민들은 토지 개혁을 원했음의 방증이다. 문제는 내각제하에서 과반수를 넘지 못한 1당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당은 마오이스트에 적대적이었기에 1당을 배제한 연립 정부 구성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총리가 되기 위해 불과 얼마 전까지 총을 겨누던 세력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 그 조건은 토지 개혁의 유예였다. 10년간 그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연립 정부 구성의 대가로 그가 제일 먼저 유예시킨 것은 바로 그 약속이었다(인민전쟁 시기 마오이스트가 점령한 지역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문제는 2006년 평화협정 세부조항에서 '마오이스트가 점령지에서 몰수한 재산은 원상복귀한다'는 세부조항이 들어가서 원점화 된 것이다).

토지 개혁이 실패하고 과거사 청산이 봉인된 상태에서 그에게 남은 건 권력뿐이었다. 정글에서 입던 군복을 벗고 카트만두의 저택으로 이사하면서 그건 이미 예고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측근들은 국회의원, 장관, 공기업 사장이 됐고, 그가 타도하려 했던 바로 그 왕족이 되었고, 엘리트가 되었다. 혁명은 국가 재산을 사유화하고, 부패 카르텔을 형성하고, 자녀들에게 특권을 세습하기 위한 과정이 되었다.

프라찬다 본인은 세 차례의 총리직을 역임했다. 제헌의회 당시 프라찬다 1기 내각은 내전 당시의 교전 당사자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이후 네팔 정치의 과정이 수많은 원칙없는 이합집산(심지어 네팔공산당 ML와 왕당파가 연립정권을 구성하기도)을 거치며 너무나 쉽게 권력에 포섭되었고 프라찬다와 그의 가문도 사회개혁의제보다는 권력 쟁탈과 권력유지, 족벌 간 이권 나누기에 뛰어들었다. 동생은 상원 의장이고, 딸은 바랏뿌르시 시장, 며느리는 장관이자 하원 의원이었다. 손녀는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친중 정권의 붕괴인가?

네팔 사태는 한국에서 좀 묘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29시간 만의 초단기 정권 붕괴까지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네포키즈와 기득권이 된 혁명가 서사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고,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네팔 사태를 친중 정권 붕괴, 공산당 정권 붕괴 서사라는 단 하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이러니 네팔 관련 방송을 하거나 글만 쓰면 양쪽 사람들이 모두 들러붙어 공격을 해댄다.

일단 축출된 KP 샤르마 올리 총리가 친중이었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네팔의 지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네팔은 고전 지정학의 교과서라 불린다. 네팔의 남쪽 국경에는 인도가 있다. 네팔은 국토의 75%가 산악 지대다. 그것도 그냥 산이 아니라 히말라야다. 유일한 평야는 인도와 맞닿아 있는 남부 지대다. 북쪽은 다들 알다시피 히말라야다. 히말라야를 넘으면 티베트 고원이 펼쳐진다. 즉 국경을 접한 단 두 개의 두 나라가 인도와 중국이다. 오죽하면 네팔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사이에 낀 연약한 고구마라고 부를 정도다.

이러한 지리적 운명은 수백 년간 네팔의 외교를 규정해왔다. 티베트 고원을 중국이 지배하기 전의 북쪽 이웃인 티베트는 1대 1로 비교했을 때 네팔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남쪽의 인도는 네팔에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다.

인도 관점에서 네팔은 중국 세력과 직접 국경을 맞닿지 않게 하는 전략적 안보 완충지대이자 문화적 세력권에 속한다. 인도는 1950년 네팔과 평화 우호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은 '양국은 상호 안보와 평화 유지를 위해 외교적 협의에 따른 행동을 취한다'는 문구로 네팔의 대외 정책 자율성을 부정했고, '인도는 네팔군 현대화와 군사 장비 공급에 협조한다'는 문구로 네팔이 군사적으로 인도에 종속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특히 '양국 국민은 상대국 내에서 거주, 재산 소유, 무역, 취업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양국의 경제 규모를 고려한다면 네팔에 전적으로 불리한 조항이다. 경제적으로 네팔은 인도에 예속될 수밖에 없게 설계됐다.

인도는 이를 근거로 네팔의 왕위 계승부터 총리 임명, 헌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네팔의 내정에 간섭했다. 그리고 인도의 이런 갑질을 모르는 네팔 사람들은 없다.

인도 내정 간섭의 결정적 사건은 2015년에 터졌다. 네팔이 7년간의 진통 끝에 새 헌법을 공포하자 네팔 남부, 인도 국경 지대의 마데시 족이 시위를 시작했다. 인도는 시위로 인한 안전 문제를 들며 네팔로 향하는 모든 물류를 끊어 버렸다. 문제는 그로부터 불과 5개월 전 네팔은 치명적인 지진을 겪었고 이때까지도 의약품이 부족하던 실정이었다는 점이다.

네팔은 이때까지만 해도 인도를 통해 석유, 의약품, 생필품의 100%를 의존하고 있다. 특히 석유 의존도 100%는 치명적이었다. 이 봉쇄로 인해 네팔 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시절의 총리가 이번에 축출된 K.P 샤르마 올리다. 그는 중국 페트로 차이나와 유류 공급 MOU를 체결, 그해 11월 첫 번째 중국발 석유 인도분이 네팔에 도착한다. 비슷한 시기 올리는 중국을 통한 인터넷망 연결을 허용하고, 중국 항구를 이용할 수 있는 무역·운송 협정을 체결한다. 그 전까지 네팔은 반드시 인도를 거쳐 무역과 운송을 했는데, 이제 중국 내륙을 가로질러 중국 항구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뚫은 것이다. 올리는 이로 인해(이 시기) 인도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네팔을 구한 국민 영웅으로 등극한다.

한국에서 친중이라 엮는 프레임을 네팔에서는 인도로부터의 주권·자주라고 읽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개선에도 불구하고 네팔의 현실은 여전히 인도에 압도적으로 편중되어 있다. 네팔 전체 교역의 70%는 여전히 인도와 이루어지고 있으며, 노동 시장, 문화, 종교, 심지어 네팔 정치인의 사적 네트워크까지 모든 것이 인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네팔 국민에게 인도는 '우리의 내정을 언제든 간섭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피곤한 강대국'이다. 반면 중국은 '인도를 견제할 유일한 카드이지만, 그들의 돈이 어떤 위험을 가져올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에 가깝다.

2025년 9월, Z세대가 반정부 투쟁을 시작한 이유는 올리가 친중이라서도, 반인도라서도 아니다. 그들의 분노는 프라찬다(마오이스트), K.P. 올리(공산당 ML),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국민회의) 등 왕정을 뒤엎은 '혁명 1세대' 전부를 향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느 나라와 친하게 지내든 상관없이, 그들 모두가 똑같이 부패했고, 똑같이 자녀들에게 특권을 세습했으며, 자신들의 미래를 훔쳐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친중 정권 붕괴'라는 프레임은 이 잿더미 속에서 '부패 일소'를 외친 네팔 청년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위험한 오독에 불과하다.

미심쩍은 9월 9일의 대화재

9월 23일 <뉴욕타임스> 탐사 보도팀은 네팔의 '젠지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가 우발적 분노가 아닌 조직적 방화인 것으로 보인다는 장문의 기사를 발표했다. <뉴욕타임스>의 특종, 그리고 이후 네팔 매체를 통해 추가 보도된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9월 8일 발포 직후 디스코드에 주요 정치인의 거주지를 구글 맵에 표시한 좌표가 유포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좌표에 찍힌 대부분의 집이 하나 혹은 둘로 보이는 집단에 의해 순차적으로 방화되기 시작했다.

싱하 두르바르 광장의 정부 부처 또한 일련의 집단에 의해 시차를 두고 방화가 이루어졌다. 뼈대만 남은 정부 부처 건물의 방화는 보통의 화재에서 발생하는 화력으로는 손상이 불가능하다. 내부에 화학 물질이 놓였고, 미리 창문을 열어(평소에 창문은 항상 닫혀 있다고 한다.) 환기가 이루어지도록 도운 흔적도 있다.

'젠지 시위대'는 방화 초기부터, 이런 행동은 내부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런 폭력적 행동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판해 왔다.

아무튼 대법원의 사건 기록까지 모두 타버린 현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구 정치 세력이다. '젠지 혁명' 이전에도 지지부진하나마 부정부패 수사는 이뤄지고 있었고, 수사 당국의 칼날 또한 무디긴 했으나 현역 정치인들을 겨누고 있었다. 즉 대법원과 공공 기록 보관소의 화재는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완벽한 증거 인멸이다.

두 번째 이익 집단은 왕당파다. 2008년 궤멸됐다고 여겨졌던 왕당파는 공화국의 실패, 즉, 1세대 혁명가들의 타락을 자양분 삼아 꾸준히 세력을 불려왔다. 최근 몇 년간 카트만두에서는 이럴 거면 차라리 왕정이 낫다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들려왔다. 왕당파의 관점에서 Z세대의 분노는 '공화국 자체의 실패'를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에게 의회와 정부 청사는 공화국의 상징이다. Z세대의 분노는 어쩌면 그들이 극복하려 했던 두 개의 구시대에게 하나는 면죄부를, 또 하나에게는 기회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진실은 잿더미에 묻혔다. 9월 23일 <뉴욕타임스>는 화재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고 보도했다. 보도 직후 수실라 까르끼 임시 내각은 조사 위원회를 발족한다고 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열흘만 있으면 불이 난 지 두 달이 다 돼 간다. 방화의 증거 또한 이미 소실됐다.

잿더미 위에 선 임시정부

6개월 기한의 수실라 까르끼 임시 정부가 출범했다. 1년 전 비슷한 정권 타도에 성공한 방글라데시가 선(先)개혁, 후(後)선거를 표방한 반면 수실라 까르끼 정부는 2026년 3월까지 선거를 치르는 게 목적임을 표방했지만 이제는 혁명의 주체로 격상된 Z세대들은 조급하다. 6개월 안에 개혁도, 부패 척결도, 선거도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 수실라 까르끼 네팔 총리가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서 열린 추모 행렬에서 고인이 된 네팔인 인질 비핀 조시를 애도하고 있다. 네팔 출신 유학생 비핀 조시는 농업을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에 갔다가 10월 7일 하마스에 납치되어 포로로 잡혀 있는 도중 살해됐다.ⓒEPA=연합뉴스

수실라 까르끼가 물려받은 건 번듯한 집무실도 없는 모두 타 버린 정부 청사, 천막에서 근무하는 공무원과 경찰, 관광업을 비롯해 붕괴된 핵심 외화벌이 산업, 그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탈옥범, 사라진 총기, 시위대에 발포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에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찰, 다음 달 월급 지급도 걱정해야 하는 파산 상태의 국가다.

여기에 기존 주요 정당은 수실라 까르끼 총리가 국회의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총리직에 임명될 권한 자체가 없다며 한 달 만에 문을 연 대법원에 연이어 총리직 임명과 의회 해산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요구하고 있다. 수실라 까르끼 임시 정부는 그를 추대한 Z세대 시위대를 제외하면 사방이 적이다. 출범부터 고립무원이었는데, 벌써부터 그동안 한 게 뭐냐는 Z세대 일부의 푸념이 나온다. 다들 알다시피 시위대는 어느 순간 갑자기 흩어진다.

쫓겨난 전직 총리 K.P 샤르마 올리와 그의 정당인 네팔 공산당 ML은 내년 3월 선거 보이콧을 결정했고, 마오이스트와 네팔 국민회의도 선거 보이콧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수실라 까르끼 임시 정부가 부여받은 단 하나의 공적 임무인 선거 실시조차 불투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24년 방글라데시 총선은 '선거'라는 행위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장례식'이 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당시 제1야당 BNP는 공정한 선거 관리가 불가능하다며 총선 보이콧을 선언했고, 여당 아와미 리그는 유권자의 30%도 안 되는 투표율로 의석을 싹쓸이했다. 선거는 치러졌지만, 그 결과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적 참극'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정부는 공무원 할당제에 분노한 청년들의 시위로 붕괴했다.

만약 이들 3대 정당이 모두 선거를 보이콧한다면, 수실라 까르끼는 Z세대가 배출한 신생 정당들과 함께 '그들만의 선거'를 치러야 한다. 결과는 뻔하다. 새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정통성 시비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도합 당원 수만 230만에 달하는 주요 세 개 정당은 신정부를 끊임없이 흔들며 제2의 혁명 혹은 반혁명을 도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에 '공화국의 실패'를 외치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왕당파의 복귀 시도까지 겹친다면, 네팔의 혼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미 마감 직전 왕당파가 대규모 집회를 선언했고, 수실라 까르끼가 왕당파 지도자를 만나고 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선거가 앞으로 다가올수록 네팔 정국은 더 거친 혼돈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Z세대는 29시간 만에 '파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건설'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제반 여건은 최악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성공한 몇 개의 혁명만 기억할 뿐, 잘된 혁명도 그리 많지 않았다. 혁명이란 늘 혁명을 지키려다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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