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일요일', 그리고 벨파스트 '벽화 전쟁'

[손호철의 벽화 기행] 8. 북아일랜드 역사를 바꾼 그날 이후

'일요일, 피의 일요일

일요일, 피의 일요일

일요일, 피의 일요일...'

(U2가 1983년에 발표한 곡 'Sunday Bloody Sunday' 중)

"저거 바비 샌즈 아닌가?"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길을 걷고 있는데, 익숙한 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와 억압에 저항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투옥되어 66일 간의 단식 끝에 사망한 바비 샌즈의 거대한 벽화였다.

▲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에 있는 바비 샌즈 벽화 ⓒ손호철

벨파스트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단위면적당 벽화가 가장 많은 '현대 벽화의 수도'다. 특히 '신교도 영국연합지지자'들과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일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일랜드와 통합하는 것을 지지하는 '가톨릭 민족주의' 커뮤니티 간의 오랜 갈등과 관련해, 벽화가 두 진영 간 정치투쟁의 핵심 전선이 되어 왔다. 다시 말해, 벨파스트는 1970년대 이후 '벽화의 정치', '벽화 전쟁'의 메카다.

3년 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는 일부 시민들이 폭죽을 터트리고 일부는 경적을 울리며 깃발을 흔드는 등 축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세계의 추모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아일랜드의 이 같은 분위기, 그리고 '벨파스트의 벽화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내가 방문했을 때, 벨파스트 타이타닉 박물관 앞에는, 누가 설치한 것인지 모르지만, '영국은 아일랜드의 적이다'라는 충격적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 '영국은 아일랜드의 적'이라는 충격적 팻말이 벨파스트 타이타닉 박물관 앞에 놓여 있다. ⓒ손호철

아일랜드는 '유럽의 한국', 한국은 '아시아의 아일랜드'라고 불릴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 식민 지배와 분단, 내전을 거친 역사로부터 술을 좋아하고 가정적이며 흥이 많아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라이다. 대부분 아일랜드하면 노래 '오- 대니 보이', <율리시스>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 비극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 '기네스 맥주'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젊은이들이 하이볼을 만들어 마시는 것이 유행하며 가성비가 좋은 제미슨 등 '아이리시 위스키'가 인기를 끌고 있다.(위스키는 스코틀랜드산 '스카치'가 유명하지만, 아일랜드가 처음 위스키를 만들었고 두 번 증류하는 스카치와 달리 아이리시 위스키는 세 번 증류해 훨씬 부드럽다.)

▲ 벨파스트에 위치한 타이타닉호를 기념하는 기념관 ⓒ손호철

바다를 끼고 영국으로부터 1백여km 떨어져 있는 아일랜드는 영국의 4분의 1 면적에, 인구도 1800년 기준으로 3분의 1(현재는 8분의 1)에 불과하며, 12세기부터 사실상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922년 독립까지 무려 8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특히 16~17세기 종교개혁에 따른 종교전쟁에서 신교의회파인 크롬웰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선포하고 권력을 잡은 뒤 가톨릭이 다수인 아일랜드를 정벌했다.

영국은 이후 신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아일랜드로 이주시켰고 아일랜드인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이들에게 배분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 의회를 해산하고 완전히 영국에 흡수했다. 1840년대 주작물인 감자에 전염병이 돌아 '대기근'이 발생한 데다가 영국 지주 수탈까지 겹쳐 100만 명이 죽고, 200만~300만 명이 미국 등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 결과 850만 명이던 인구는 500만 명대로 줄었다.

▲ 1840년대 대기근을 추모하는 조각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거리에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에 일으킨 '부활절 봉기'를 기폭제로 독립투쟁을 가속화했다. 영국은 1922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허용하되 영국에서 이주한 신교도들이 다수인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남는다는 협약을 제안했다. 아일랜드의 주류 세력은 차선책으로 이를 수용했지만, 강경파는 반대했다. 협약 수용 세력과 북아일랜드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강경파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분단'은 피할 수 없었다. 우리처럼 아일랜드도 식민지배 후 내전과 분단을 겪은 것이다.

영국 지배 하에 남은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대한) '충성파(Loyalist)'라고 부르는 '다수 세력'인 신교도와 (아일랜드공화국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공화주의자(내지 공화국파)'라고 부르는 '소수파 가톨릭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이 계속됐다. 특히 1960년대 들어 영국과 다수파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시민운동을 대부분이 신교도인 아일랜드무장경찰(RUC)과 신교도 무장단체들이 무력으로 대응하고 영국이 군대까지 배치하면서 '충돌(The Troubles)'은 일상화됐다.

▲ 더블린에 위치한 아일랜드 역사 박물관에는 1916년 영국 지배에 저항하는 '부활절봉기'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비틀즈의 일원으로 독립 후 평화운동에 앞장서 '이매진'과 같은 명곡을 남긴 존 레논과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밴드이자 사회의식이 강한 U2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점이다. '피의 일요일'은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바꾼 비극적 사건이다.

"탕-탕-탕-" 일요일인 1972년 1월 30일 오후 4시, 북아일랜드에서 두 번째 큰 도시인 데리에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테러용의자' 등에 대해 재판 없이 구금을 할 수 있도록 한 영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반대해 북아일랜드민권협회(NICRA)가 조직한 시위대를 향해 영국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이다. 이 '북아일랜드의 광주학살'로 평화시위를 하던 가톨릭계 26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분노한 가톨릭민족주의자들도 자구책으로 '방어적 무장투쟁'에 나섰다. 북아일랜드 저항운동하면 떠오르는 임시 아일랜드공화국군(PIRA, 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이 대표적인 예이다. IRA는 원래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 만들어졌고 북아일랜드가 영국령에 남은 뒤에도 이에 저항해 투쟁해왔지만 별 영향력이 없었던 조직이었다. 하지만 유혈의 일요일 이후 많은 지지와 충원이 이루어져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선 것이다.

투옥된 PIRA(이하 IRA로 표기한다) 대원들은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바비 샌즈 등이 목숨을 잃었고, 이로써 국제적으로 북아일랜드 문제를 국제적으로 여론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두 진영은 30여 년 간의 무력충돌로 약 3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4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 중 민간인이 2800명이며, 300명은 아일랜드무장경찰인 RUC, 200명은 아일랜드 주재 영국군부대인 UDR(Ulster Defence Regiment) 병사다.

두 진영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 이르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벽화다. 가톨릭 진영은 부당한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고 커뮤니티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1981년 단식투쟁과 바비 샌즈의 죽음이 기폭제가 됐다. IRA 무장투쟁으로 피해자들이 생기면서 신교도 지역도 벽화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벨파스트 벽화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우선, 멕시코 벽화처럼 정부가 지원한 것이 아니라 풀뿌리가 만든 것이며 '멕시코 벽화 3인방' 같은 거장들이 없다. 그런 만큼 멕시코 벽화처럼 예술성이 뛰어나거나 세련되지 않고, 투박하지만 정치적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시케이로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내에 그려진 멕시코 벽화와 달리, 바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중심가 길거리 벽에 그려져 '진정한 벽화'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 가톨릭 지역과 신교도 지역이 마주치는 벨파스트는 벽화 전쟁의 최전선이다 ⓒ손호철

양 진영의 인명 피해가 계속되자, 1990년대에 들어 이 같은 갈등은 소모적이며 미래가 없다는 인식이 양 진영에 퍼져갔다. 1998년 4월 10일,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모든 정치세력이, 그리고 영국과 아일랜드가 일종의 '평화협정'인 '성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s, 성금요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날을 기리는 날이다)'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1)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으며 북아일랜드 행정부와 입법부를 만들어 자치를 허용하고 여러 인권과 평등을 보장하고 차별을 없앤다, 2)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다수가 원하면 아일랜드로 통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협약 이후 폭력 사태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인구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02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가톨릭계가 42.3%로 북아일랜드 100여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신교도(30.5%)를 넘어 다수가 됐다. IRA의 '합법적 정치조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고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주장하는 신페인(Sinn Fein) 당이 꾸준히 영향력을 키워갔다. 신페인당은 급기야 2022년 총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제1당이 됐고 2024년 총선에서도 제1당을 유지했다. 신페인당은 평화협정의 합의내용 중 2번 항과 관련해, 북아일랜드의 독립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할 것을 영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12개 지역 중 세 번째로 가난한 지역이다. 충돌에 대한 기억을 갖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경제적 어려움에 북아일랜드를 떠나고 있다. 2024년 현재, 아일랜드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10만 달러를 넘어선 반면 영국은 그 절반인 5만 달러 선이다. 이 같은 상대적인 아일랜드의 풍요는 북아일랜드 공화주의자에게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와의 통합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