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이라고 하면 보통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의 엄숙한 도덕과 산업혁명의 매연이 떠오르지만, 그 시대를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다름 아닌 한 쌍의 시인 부부였다.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과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1806-1861).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당대 사회의 위선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엘리자베스, 침실에서 세상을 바꾼 여성
엘리자베스 바렛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의 장난에 시달렸다.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척추 부상으로 평생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고, 아버지 에드워드 몰턴 바렛(1785-1857)은 딸들의 결혼을 철저히 금지하는 독재자였다. 하지만 침실이라는 감옥이 오히려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39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 시인이라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존재였던 그녀는 1844년 시집 <시편>을 출간하며 영국 문단을 뒤흔들었다. 특히 <울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작품으로 아동 노동의 참혹함을 고발했는데, 이는 당시 '어린이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야 한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금기를 정면으로 깨뜨린 것이었다.
로버트, 사랑으로 완성된 늦깎이 천재
로버트 브라우닝은 엘리자베스보다 6살 어린 '연하남'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나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는 다소 별난 취향의 소유자였던 셈이다. 1833년 첫 시집 <파울린>을 익명으로 출간했지만 혹독한 비평에 상처받아 한동안 침묵했던 그는, 엘리자베스의 작품을 읽고 완전히 매료되어 1845년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당신의 시를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직진 고백으로 시작된 이들의 로맨스는 574통의 연애편지로 이어졌다.
19세기판 가출, 아버지 몰래 도망친 40대 커플
1846년 9월 12일, 엘리자베스는 40세의 나이로 생애 첫 가출을 감행했다. 아버지가 브라우닝과의 만남을 금지하자, 둘은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당시 영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병약한 노처녀가 연하의 남자와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이었거니와, 무엇보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바렛은 딸을 완전히 의절했고,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따뜻한 기후는 엘리자베스의 건강을 회복시켰고, 45세에 아들까지 낳았다. 의사들이 평생 침대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던 여자가 사랑의 힘으로 기적을 이룬 것이다.
사회비판의 날카로운 칼날
브라우닝 부부는 단순한 연인 시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오로라 리>(1856)에서 여성의 독립과 자주성을 주장했고, <카사 귀디 창문에서>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지지했다. 노예제 폐지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던 그녀는 <도망친 노예에게>라는 작품으로 미국의 노예제를 강력히 비판했다.
로버트 역시 <반지와 책>에서 17세기 이탈리아의 살인사건을 통해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고발했고, <피파가 지나간다>에서는 산업화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냈다. 그의 극적 독백체 기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으로, 기존의 서정시 전통을 깨뜨리는 혁신이었다.
영국 사회에 미친 파장, 사랑도 혁명이다
브라우닝 부부의 영향력은 단순히 문학적 차원을 넘어섰다. 이들의 결혼은 19세기 영국 사회에 여러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첫째, 여성의 지위 변화에 기여했다. 엘리자베스의 성공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는 후에 여성참정권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당시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 법적 상식이었는데, 엘리자베스는 결혼 후에도 독립적인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둘째, 결혼제도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부모가 정해주는 결혼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사랑에 기반한 자유로운 결혼을 실천한 것은 혁명적이었다. 이들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점차 연애결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셋째, 사회개혁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동노동 문제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고발은 1833년 공장법 개정과 1870년 교육법 제정에 여론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문학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회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문학사적 의의, 낭만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브라우닝 부부는 19세기 영국문학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워즈워스(1770-1850)와 콜리지(1772-1834)의 낭만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이들은 현실적이고 사회참여적인 문학의 길을 열었다. 특히 로버트의 극적 독백체는 후에 모더니즘 시의 선구가 되었고, T.S. 엘리엇(1888-1965)과 에즈라 파운드(1885-1972) 같은 20세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이러니, 사후의 명성 역전
살아생전에는 엘리자베스가 더 유명했다. 1850년 워즈워스가 죽자 그녀가 계관시인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다(결국 테니슨(1809-1892)이 되었지만). 반면 로버트는 아내의 그늘에 가려진 '시인의 남편'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평가가 뒤바뀌었다. 로버트의 복잡하고 심리적인 작품들이 모던한 감각으로 재평가 받은 반면, 엘리자베스의 감정적이고 직설적인 작품들은 다소 구식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는 문학사의 아이러니이자, 동시에 여성작가들이 겪는 전형적인 운명이기도 했다.
21세기에도 유효한 브라우닝의 메시지
브라우닝 부부가 세상을 떠난 지 150년이 넘었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사랑의 힘으로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은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특히 가부장적 권위에 맞선 엘리자베스의 용기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계급사회와 불평등 문제가 21세기 영국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브라우닝 부부가 살아있다면 아마 지금의 영국 사회도 신랄하게 비판하지 않을까? 그들의 펜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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