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좋아하지 마라. 트럼프가 웃는다

[오찬호의 틈새] 지금은 기후위기 찬반토론을 할 때가 아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빨리 에어컨을 접했다. 처음엔 낮에만 켰다가 곧 밤에도 틀었다. 며칠은 취침예약을 맞춰놓고 잠들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롭게 잠에서 깨길 몇 번 한 다음부터는 밤새 틀었다. 그러다가 새벽에 에어컨을 끄고 아이들 방의 창문을 열어주곤 했다. 그러면 어떤 날은 새벽까지도, 때론 종일 에어컨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역순으로 에어컨에서 멀어졌다. 그 순간순간마다의 감정이 매해 특별해짐을 느낀다. 더위가 더 지독해졌음을 내 몸이 알기 때문일 거다. 에어컨 안 틀고 창문만 열어놓은 채 잔 날에는 이런 날이 왔음에 감격하기도 했고, 서늘함에 창문을 닫을 때는 평소 투덜거렸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과 작별했다. 선풍기를 창고에 넣으면서 나는 기어코 멍청한 소릴 뱉는다.

"역시, 계절은 정직해!"

정직하기는, 개뿔이다. 그래서 가을은 나쁜 계절이다. 이 청명하고 파란 하늘은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참다 보면 소중한 가을을 만날 거라는 착각 말이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점점 인내심이 바닥이 되고 있는 게 단지 사람의 의지가 약해서는 아닐 거다. 형형색색 단풍을 보며 긍정적으로 살자고 다짐하는 게 좋은 태도이기는 하지만, 그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동시에 짧아지고 게다가 과거만큼 색깔도 선명하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게 진짜 긍정이지 않겠는가. 9월에 가을이 실종되면, 가을은 10월에라도 오겠지만 그게 신의 선물일 리 없다. 인간이 빚은 대참사 아니겠는가.

소설가 김탁환의 칼럼 <안전한 실패의 시간>(한겨레, 2025. 9. 24)에는 나오는 아름다운 대목이다. 곡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소설가는 어떻게 하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지를 농부들에게 물을 때마다 "땅이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실패해도 된다"라는 답을 듣는다. 작물 재배가 거듭 실패하면 이런 말과 마주한다. "철에 맞춰 다시 심으면 돼.“

그렇게 깨달은 땅의 이치를 소설가는 이웃을 상대로 가르치는 글쓰기 수업에 적용해 마음껏 실패하다 보면 좋은 문장을 마주할 수 있음을 전한다. 훈훈한 이야기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고백과 응용의 효능감이 존재할지는 모르겠다. 땅의 가르침이 들쑥날쑥해졌으니 말이다.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안 될 작물은 계속 안 될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대구 사과'라는 표현은 우습기만 할 뿐이다. 대구에서 아무리 땅을 믿고 재배한들, 땅은 기후 변동에나 정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래서 약속하지 않은 걸 주기도 한다. 이게 땅의 위대함일까? 충청남도 곳곳에서 귤이 재배되는 건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뉴스에 나온 재배업자는 "여기서도 귤이 이렇게 잘 나는데, 힘들게 제주 귤을 왜 찾죠?"라고 말한다. 청정 제주의 선물이라면서 망고가 소개되는 건 어떠한가. 재배될 수 없었던 열대과일을 볼 수 있는 게 제주가 특별해서일까. 기온이 올라서다. 그러니 제주만 특별하겠는가. 지금은 제주보다 훨씬 북쪽에서도 망고가 수확된다. 2023년에는 밀양에서 애플망고 첫 수확에 성공했다. 올해에는 지리산 산자락에서도 망고가 재배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관련 기사를 따라가다 보니 이런 당혹스러운 문장을 마주한다. "앞으로 기온이 계속 오른다면 산청 애플망고가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개별 농가에서야 위기를 기회로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겠지만, 인류에게 기후 위기는 결코 선물이 될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요즈음 돌아가는 추세를 보면, 기온이 계속 올라 애플망고의 경쟁력이 생겼으면 하는 희망은 그래도 솔직한 것 같다. 기후 변동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최소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보다는 양심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Reuters=연합뉴스

조금은 기후위기가 과장됐겠지, 이렇게 생각하길 그들은 바란다

'심각한' 기후위기는 존재하지 않고, '늘 있어왔던' 기후변화만이 다시 반복될 뿐이라고 줄곧 주장했던 트럼프는 2025년 9월 23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탄소절감 등의 여러 기후정책들을 '녹색 사기'라면서 맹비난했다. 트럼프가 그러는 게 낯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서 그럴 줄은 몰랐는데 그는 그랬다. 물론 대부분의 언론과 과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즉각 반론을 제기했지만, 트럼프는 기후위기를 허구로 보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게 목적이었을 거다. 논란만 일으켜도 사람들은 혹시나 하면서 의구심을 가지니 말이다. 임신 중 타이레놀 복용이 아이의 자폐증을 유발하니 자제하라고 일단 질러놓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임신 중에 해열제가 필요한 사람은 늘 있을 거고 타이레놀을 선택한 사람이 왜 없겠는가.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아이가 자폐이면, 그때부턴 타이레놀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버릴 거다. 과학자들은 타이레놀을 안 먹었어도 발병했을 것이니 연관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이 논란을 접한 당사자와 음모론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걸 먹어서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때, 트럼프는 또 말할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의 무지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기후위기가 과장일 것이라는 작은 조각 하나만으로도 세상엔 엉터리 주장들이 남발할 것이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사회적 에너지는 낭비될 것이다. 그럴수록, 위기는 더 빨리 다가와 끔찍한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이럴 거다. 해수면 상승으로 섬들이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도 괜찮은 거야? 북극곰은 멸종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아직도 돌아다니는 거지? 그러다가 추운 겨울마다 "지구가 뜨거워졌다는 건 허구"라는 말들을 뱉을 거다.

기후위기를 어찌 해결할지도 토론하기 바쁜데, 기후위기가 진짜인지 아닌가를 검토하는 건 너무 끔찍하다. 모든 데이터가 과거의 기후변동 수준의 변화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의 변화들은 과거의 패턴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고, 그 원인은 인간의 활동임이 명명백백 드러났지만 아무리 설명한들 "원래 그랬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사람을 어찌 마주할 것인가. 더위가 심각하다고 하면 원래 여름은 더웠다고 할 것이고, 산불의 심각성을 따지면 산불 안 난 적 있었냐고 하는 사람과 토론할 수 있는가? 홍수를 걱정하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하면서 망고를 이 땅에서 재배할 수 있는 걸 신의 은총이라고 여기자는 주장을 진지하게 들을지도 모른다.

이 빌어먹을 가을의 아름다움에 취한 나도, 지옥 같았던 여름을 매년 겪는 인생의 반복 정도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를 반성한다. 이미 기후위기의 증거는 내 몸이 느끼고 있는데, 그때만 반짝 심각해졌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이 신선한 가을을 보면서 불평불만만 하고 살았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단언컨대,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트럼프는 춤을 출 거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이따위로 논쟁할 여유가 없다. 기후위기는 인간의 탐욕이 빚은 결과다. 개인은 탄소를 많이 배출할수록 이 자본주의 경쟁 구도에서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다. 그렇기에 기후위기의 끔찍한 결과를 조금이라도 제어하려면 강력한 사회구조적 변동이 필요하다. 불평등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건 말이 안 될 거다. 차별과 혐오가 줄어들면, 기후위기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열릴 거다. 그래서 차별과 혐오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트럼프가 그토록 반대한다. 지금은 가을에 감사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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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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