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 가면 쓴 '팬덤 비즈니스' 정치

[기자의 눈] 브레이크 없는 '국민주권 정부'의 위험한 질주

2017년 5월 9일 밤, 대선 승리가 확정된 문재인 후보는 "다음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라고 했다. 대선 기간 내내 "정당 책임정치에 기반한 민주당 정부를 구현하겠다"던 공언대로다.

정당정치의 복원과 대의민주주의 작동의 핵심을 협치에 맞췄던 정부 명칭 '민주당 정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취임 100일 즈음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문 대통령은 "국민들은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국민의 집단 지성과 함께하는 게 국정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며 방향을 바꿨다.

그는 "국민들은 주권자로서 평소 정치를 구경만 하고 있다가 선거 때 한 표를 행사하는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면서 "국민들은 촛불집회처럼 정치가 잘못할 때 직접 촛불을 들어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고, 댓글을 통해 의사를 표시하고, 정당의 권리당원으로 참여하고, 정부 정책도 직접 제안하고 그것을 반영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직접민주주의는 '적폐 청산'과 공명했다. 7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구가하는 인기 있는 대통령이 여소야대 입법 지형을 우회해 '촛불 혁명'을 독점하려면, 제1야당이 적폐의 온상으로 고립돼 '탄핵의 강'에서 오래 허우적거릴수록 유리했다.

정치 외 다른 수단이 적폐 청산 열기를 고양하는 데에 동원됐다. 검찰 개혁을 슬그머니 미뤄둔 사이, 지방 고검을 떠돌던 특수부 출신 검사 한 명을 서울중앙지검장 자리에 파격 승진시켜 적폐 수사를 맡겼다. 문 대통령은 "살아 움직이는 수사를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해서도 안 된다"(2019년 5월 3일)며 2년이 지나도록 검찰의 고삐를 풀어뒀다.

그렇게 '문재인-윤석열 합작품' 적폐 수사는 전방위로 길게 이어졌다. 그 사이 제도정치권에선 대의민주주의의 바탕인 다당제가 단명하고, 2020년 총선을 거쳐 민주당이 압도적 우위를 점한 양당 체제가 고착됐다.

'조국 사태'가 벌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임기 말 직접민주주의 광장에 소환된 열혈 주권자 국민들은 문 대통령의 운신의 폭을 제약했다. 정파와 이념이 갈려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벌어진 '조국 대전'에 대통령과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적폐를 도려낸 공으로 검찰총장에 발탁한 윤석열 검사와 검찰 개혁 역시 시기도, 조합도 어울리지 않았다. 강경 지지층에 기댄 민주당은 '검수완박'을 꺼내들었다. 징계라는 관료적 수단으로 검찰총장을 찍어내려던 '강성' 법무부 장관의 독주를 대통령도 제어하지 못했다.

결과는 뼛속까지 검사인 전직 검찰총장 머리에 공정과 정의의 왕관을 얹는 역효과를 냈다. 임기 말까지 문 대통령 지지율은 고공행진했지만, '주권자 국민'은 촛불로 집권한 정부를 단 한 번만 기회를 주고 갈아치웠다.

직접민주주의로 포장한 더 센 '팬덤 정치'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세계 무대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천명했다. 미국 뉴욕에서 "민주 대한민국"의 복귀를 알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민주권 정부'는 집단 지성의 힘으로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내는 민주주의의 혁신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인공지능(AI) 기술의 유용성을 설파하며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면 높은 생산력을 동력 삼아 혁신과 번영의 토대를 세우고,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유용한 기반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마침 직접민주주의론이 플랫폼 기반 '팬덤 비즈니스'의 외양을 꾸미는 장치로 세계적으로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살은 포퓰리즘 정치다. SNS로 대중들을 직접 선동해 독보적 정치 브랜드를 구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표주자다.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을 유능하게 활용해 지지자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변방의 장수'에서 대통령에 오른 이 대통령의 성공 경로도 겹친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22년에 '개딸(이재명 강성 지지층)'을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라고 평가한 바 있다.

유력한 대선주자이자 민주당 대표 시절이던 지난 2월에도 이 대통령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민의 주권 의지가 일상적으로 국정에 반영되도록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겠다"고 예고했다.

특히 "국민 중심 직접민주주의는 제2의 민주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며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을 약속했다. 계엄 대통령을 탄핵한 "빛의 혁명"의 진로를 '국회 내란 잔당 척결'로 유도하려는 메시지로 읽혔다. 곧바로 민주당은 국민소환제 도입 법안을 발의했다.

탄핵 정국과 맞물려 유사 내전 같은 대선을 치러 집권한 세력이 불러낸 직접민주주의는 선동적이다. 입법부 방지턱이 크게 낮아진 여대야소 지형에서 여권은 '내란 척결' 전선을 세 갈래로 뻗었다.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 내란 척결, 위헌 정당 해산"(정청래 대표)이라며 겨눈 국민의힘을 비롯해 검찰, 그리고 사법부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선악을 역할 분담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여권의 질주를 추동하는 힘은 '추종형 팬덤'을 넘어, 흐름을 주도하는 '몸통'이 된 강성 지지층에서 나왔다. 이들의 영향력이 '민심'으로 둔갑하는 일이 잦다.

3대 특검법에 관한 여야 합의가 14시간 만에 파기된 장면이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대통령도 "정부조직법을 개편하는 것과 내란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어떻게 맞바꾸냐"며 지지층 여론에 끌려갔다.

'검사 대통령'의 칼과 방패 역할을 톡톡히 해온 검찰은 해체 수순에 돌입했다. 검사의 권한을 어디까지 제한할지, 새로운 권력기관의 칼을 어떻게 통제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못했다. 어쨌든, 유예기간 1년을 거쳐 내년 10월이면 1947년에 출범한 검찰청 간판이 떨어진다.

다음은 사법부. 이 대통령은 삼권 분립에 '권력 서열론'을 적용해 민주당의 독주에 힘을 실었다. '최고 권력' 국민주권이 직접 선출한 입법부가 임명 권력인 사법부보다 우위라는 해석이다. 이에 힘입은 민주당은 제보의 신빙성조차 확인되지 않은 '조희대-한덕수 회동설'을 파헤치겠다며 청문회에 이어 대법원 현장 국정감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겨눈 타깃의 실질은 대법원이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데에 있다. 사법부의 대선 개입이자 내란 공조라는 주장이다. 정청래 대표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며 사퇴를 촉구했다.

사법부 스스로 신뢰도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는 진영과 정파를 막론하고 이견이 없다. 그러나 거대 여당이 주도하는 '조희대 청문회', '조희대 사퇴론'에 관해선 반대 여론이 높게 나타난다. 여권 강성 지지층과 일반 여론의 괴리는 이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율의 동반 하락에서도 확인된다. 민주당은 '사법부 신뢰 하락'을 개혁의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압도적 최하위는 늘 국회다.

절제와 타협이 본령인 대의제가 정상 기능해야 12.3 비상계엄이 파탄낸 민주주의가 돌아온다. 제도 정치를 무력화하는 팬덤 정치는 언젠가 부메랑처럼 등 뒤로 날아온다. 민심의 실제를 오판한 문재인 정부의 실패가 남긴 교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9월 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여야 지도부 오찬 회동에 참석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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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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