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의 스승이 공업용 페인트로 벽화를 그린 까닭

[손호철의 벽화 기행] 5. '혁명적 풍운아' 시케이로스

"우리의 근본적인 미학적 목표는 예술적 표현을 사회화하고 우리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를 씻어내는 것, 이젤 회화의 타성을 몰아내고 기념물 공공 벽화 예술에 헌신하는 것, 여러 세기 동안 모욕당해온 원주민들, 장교들에 의해 교수형 집행인으로 강요되어 온 병사들, 부자들에 의해 채찍질을 당해온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다비드 시케이로스. 1896~1974)

"아니 이게 뭐지!" 25년 전 멕시코를 처음 방문해 다비드 시케이로스의 '신민주주의'라는 벽화를 보는 순간, 나는 충격에 빠졌다. 그동안 화집 등을 통해 보아온, 정태적인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와 달리, 한 여성이 두 손을 묶은 사슬을 끊고 두 주먹을 뻗고 있는 것이 마치 그림을 찢고 나에게 달려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술궁미술관에 리베라, 오로스코의 벽화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 이 그림은 다시 보아도 감동적이다.

▲ 예술궁미술관에 디에고 리베라, 호세 오로스코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 시케이로스의 '신민주주의' ⓒ손호철

리베라와 오로스코에 비해 10살 정도 어린 시케이로스는 가장 다이내믹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살에 서구식 미술교육에 반대하는 수업 거부를 주도해 퇴학당하고 개방학교를 세웠다. 18살에 멕시코혁명에 참여해 대위로 농촌을 진군하며 민중과 민중예술에 대해 공부했다. 20대 초에 무관으로 유럽에 근무하며 큐비즘 등 현대미술을 공부했고, 1921년 귀국해 유럽주의와 인디오주의(토착문화 예찬론)를 모두 비판하며 예술가혁명노조를 조직했다.

공산당에 입당했고, 1930년 노동절 시위를 주도한 죄로 광산촌으로 유배되어 민중의 삶을 배웠다. 1932년 미국으로 망명해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과 친교하고, 큰 그림을 그릴 때 프로젝트를 이용해 작은 그림을 벽에 투사해 스케치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외벽에 사용하는 방수페인트를 벽화에 사용하기 시작한 이도 그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열대 아메리카'라는 벽화를 그렸지만, 매카시즘에 의해 파괴됐다가 2012년 복원됐다(작년 이 그림을 보러 갔었는데,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그 색채가 너무 죽어있어 실망했다. 알고 보니, 원작의 고유성을 보존하기 위해 복원을 하되 채색은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 시케이로스가 로스앤젤레스에 그린 '열대의 아메리카' 원래 모습(위)과 매카시즘에 의해 파괴된 뒤 복원한 모습 ⓒ손호철

시케이로스는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미국에서 추방되어 우루과이로 갔다. 우루과이에서 물감을 구하기 어려워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했고 스프레이건을 사용하는 등 기술적 혁신을 이뤘다. 우루과이에서도 정치 활동으로 쫓겨나 뉴욕으로 돌아와 실험적 워크샵을 운영했다. 여기에 참여한 제자 중 한 명으로 그에게서 '물감 뿌리기' 등 혁신적 기법을 배운 사람이 미국 추상화가의 대가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의 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이다.

시케이로스는 3명의 벽화 대가 중 멕시코를 넘어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이다. 물감뿌리기를 그에게서 배운 폴록뿐만이 아니라 현대 그래피티도 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리베라, 오로스코 등 벽화가들이 오랜 프레스코기법과 붓으로 그리는 전통적 화법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는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하고 스프레이건을 도입했다. 현대 그래피티가 사용하는 공업용 페인트와 스프레이건을 시케이로스는 193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리베라는 "속물이자 혁명예술의 데카당스(퇴폐적 경향)"이며 "퇴행적이고 기술적으로 낙후"했고 정치적으로도 '트로츠키주의자'였다. 특히 리베라가 록펠러와 헨리 포드의 청탁을 받아 벽화를 그린 것에 대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제국주의 미학"이라고 비판했다(이에 대해, 리베라는 자신은 "적의 진영 안에서 싸우라"는 레닌의 말을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오로스코에 대해서도 "부르주아 회의주의자로, 위대한 화가이지만 형편없는 철학자"이며 "오랜 밀폐와 혐오에 빠져 사이비예술의 공허한 상징주의에 익사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시케이로스는 1937년 스페인내전에 전투병으로 참가했고 1939년 귀국했다. 그는 기술적인 면,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제작과 작업방식에서도 1세대와 달랐다. 1세대가 주로 정부 프로젝트에 의해 작업을 했다면(그의 표현을 빌면, '관제 벽화'), 그는 '민중프로젝트'를 선호해 주로 노동조합 사무실 등에 벽화를 그렸다(그도 말년에는 정부 프로젝트를 했다). 작업도 자신이 모든 걸 결정하고 조수들을 부리는 1세대 방식을 비판하고, 여러 명이 평등하게 논의해 공동제작하고 수입도 공동분배하는 집단제작 방식을 택했다. 사실 그가 그리는 벽화는 항상 적자였고, 그는 자신의 유화를 팔아 장만한 돈을 벽화 제작에 사용했다.

1940년, 그는 스페인내전 동지들과 함께 리베라가 주선해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를 암살하기 위해 트로츠키 집에 기관총을 난사한 혐의로 투옥됐다(그 당시까지 그는 소련공산당의 공식노선을 지지하는 '스탈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멕시코칠레대사였던 시인 네루다의 도움으로 칠레로 도망갔다. 칠레에서 귀국 후에는 암살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고 4년간 은둔생활을 했다.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2등상을 받았고 여러 대형 벽화를 그렸다. 1960년 대통령을 공개비판하고 교수 노동자 구속에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구속됐다.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피카소 등 국제 예술계의 압력으로 2년 만에 풀려났다. 1966년 레닌평화상을 받았고 쿠바를 방문해 지지 벽화를 남겼다.

그는 부유한 '강남 좌파'였지만 검은 터틀넥에 싼 바지를 입고 검소하게 살았다. '멕시코 최고의 배우'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극적인 언행을 즐겼고, 그런 직설적인 언행으로 친구가 없었다. 그는 세 명의 벽화대가 중, 아니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풍운아'였다. 아니 단순한 '혁명적 풍운아'가 아니라 '혁명실천적 풍운아'였다. 그는 리베라처럼 관념적 좌파, '살롱 좌파'가 아니었다.

▲ 1960년 사진작가 Galeria Garcia가 찍은 시케이로스

그는 17살에 수업 거부를 주도해 퇴학당했다. 리베라가 파리에서 와인을 마시고 오로스코는 혁명군 사무실에서 삽화를 그리고 있던 멕시코혁명 때도, 그는 10대의 나이에도 전선을 누볐다. 20대에는 예술가혁명 노조를 만들었고, 30대에는 노동절 시위를 주도하다 오지로 유배를 가고,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미국서도 사회운동을 멈추지 않아 추방당해, 우루과이로 갔다. 거기서도 운동을 하다가 또 추방당했다.

40대에는 스페인내전에 전투병으로 참여했고, 귀국해서는 기관총으로 트로츠키 암살을 시도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60대(당시 멕시코의 평균수명은 57세로, 지금과 달리 60대면 '완전 노인'이었다)에도 대정부 투쟁을 멈추지 않다가 2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결코 '먹물 예술가'가 아니었다.

시케이로스는 선배들과 비교해 기술, 이념, 제작방식만이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멕시코시티 남쪽에 있는 '세계 최대의 대학'인 국립 멕시코대학(UNAM)을 찾아갔다. UNAM의 중앙도서관에 도착하자, 건물 위에 세워진 압도적인 벽화에 숨이 막혔다. 오른쪽은 서구가 보는 '코페르니쿠스식 우주'라면 왼쪽은 마야가 본 '고대 멕시코식 우주'를 그려 대비한 것이다. 갑자기 무미건조하고 자기정체성이 없는 서울대학교 건물이 부끄러워졌다.

▲ 국립 멕시코대학 도서관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건축물. 오른쪽엔 코페르니쿠스가 보는 우주를, 왼쪽에는 마야가 보는 우주를 그렸다. ⓒ손호철

그는 UNAM의 외벽에 거대한 크기의 벽화를 여럿 남겼다. 1세대 벽화는 대부분 실내에 그려, 벽화라고 하지만 이들이 비판한 서구미술과 마찬가지로 민초들은 벽화가 그려진 미술관이나 건물로 가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시케이로스는 이를 탈피했다. 국립 멕시코대학 벽화처럼 많은 벽화들을 건물 외벽에 그렸다. 이는 그가 비 등 날씨 변화에 취약한 프레스코기법을 넘어서 방수 기능을 가진 현대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시케이로스가 국립 멕시코대학 건물 외벽에 그린 입체적 벽화들. 그는 리베라, 오로스코와 달리 방수가 되는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해 외벽에 벽화를 그릴 수 있었다. ⓒ손호철

그는 이처럼 벽화를 외벽에 그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나가며 벽화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벽화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실현시킨 것이다. 그의 UNAM 벽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학에 인민을, 인민을 대학에'라는 작품으로 2차원적인 벽화와 3차원적인 조각을 결합한(그의 표현으로는 '예술적 통합') 작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950년대에 제작되어 70년이 지난 만큼 빛바랜 색을 다시 칠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 안타깝게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멕시코시티에서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이 폴리포름(Polyforum)이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 맞춰 기획됐지만 1970년대에 완성된 이 건축물은 갤러리와 극장 등을 통합한 종합예술관으로 시케이로스가 어디까지 진화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작이다. 그는 벽화를 건축물에 맞춰 그리는 입체적 벽화로 발전시켰고 '지구와 우주를 향한 인류의 행진'이라는 엄청난 크기(8700평방미터)의 벽화를 그렸다. 이 벽화는 1부 '부르주와 민주혁명을 향한 인류의 전진', 2부 '미래의 혁명', 3부 '평화, 문화, 조화'라는 3부작으로 되어 있다.

도착해서 보니, 벽으로 막아 놓아서, 폴리포름이 보이지도 않았고 폴리포름 쪽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야 벽이 끝나고 폴리포름 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 쪽으로 들어가니 경비가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았다. 시설이 폐쇄되었다는 것이다. 경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건물 외벽의 벽화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는 생각에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카메라의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 건축물과 통합된 입체적 벽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보여준 시케이로스의 폴리포름 ⓒ 손호철

시케이로스는 실내 벽화의 경우도 노동자와 민중들이 삶의 현장에서 매일 볼 수 있게 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북쪽에 있는 멕시코전기 노조사무실로 향했다. 우리의 한국전력 노조 비숫한 이 노조 사무실에는 시케이로스가 그린 명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 건물이나 박물관에 그린 리베라나 오로스코의 벽화를 '관제 벽화'라고 비판하고, 민중의 일상적인 생활 현장인 노동조합 사무실 등에 벽화를 그렸다. 노조 사무실에는 시케이로스가 그린 거대한 벽화가 나타났다. 노조 사무실에 세계적인 화가의 벽화라니 잘 믿기지 않는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 시케이로스가 멕시코전기 노조 사무실에 그린 벽화. 그는 정부가 의뢰하는 벽화를 '관제 벽화'라고 비판하며 주로 노조 사무실 등에 벽화를 그렸다. ⓒ손호철

갑자기 우리의 공공운수노조 사무실, 아니 더 처절한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에 한국 최고의 민중화가 신학철 화백의 '모내기'나 박불똥 화백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걸려 있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시케이로스, 그는 정말 뜨거운 열정의 혁명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안타깝게도, 멕시코 사회의 보수화(이에 따른 재정적 지원의 소멸)와 현존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 등의 영향으로 위대한 멕시코의 민중벽화 운동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강단 화단'이 아닌 (사파티스타 공동체 등) 풀뿌리 민중운동에서는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 시케이로스의 작품과 자료들을 모아놓은 '시케이로스 미술관'과 그곳에 전시된 한 작품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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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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