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중 시위, 한국 사회 인종주의의 또 다른 얼굴

[시민건강논평] 중국인, 동포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막으려면

이전까지 보기 드문 시위가 올해 들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 중국동포, 중국 이주민이 많은 곳에 의도적으로 찾아가 천박한 혐오를 쏟아내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혐중 시위 말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 표현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현실에서 직접적인 위협과 피해를 끼치는 수준에 이른 것은 새로운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명동에서 시위가 막힌 그들이 지난주 대림동으로 옮겨 시위를 열 때, 그 바로 건너편에 혐오 시위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급히 모여 기자회견을 연 것은 지금이 혐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상당히 중요한 국면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극우 세력이 주도하는 혐중 시위의 목적은 세력을 결집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각종 음모론까지 동원하고 있으나, 애초에 그들이 전략적으로 혐중을 활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간 한국 사회에 반중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반중 정서는 국가 간 첨예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누적된 탓도 있지만, 국내 정책과 문화적 타자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래전부터 중국동포와 화교는 제도적으로 차별받아 왔고, '더럽다', '위험하다'는 낙인 속에서 문화적으로 타자화되며 인종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왔다(자세한 내용은 <다민족 사회 대한민국>(손민서, 2024) 참고).

차별과 혐오는 국적이나 피부색,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국적, 피부색, 문화 등으로 구분 짓는 게 먼저고, 그 뒤에 차별과 억압의 이유가 덧붙여진다. 국내 체류 중국인의 범죄율이 내국인의 범죄율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은, 중국 동포들에 덧붙인 위험하다는 이미지가 인종주의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심지어 혐오 정서를 주의해야 한다는 기사의 제목조차 혐오를 재생산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국 내 인종주의는 이미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위험의 '이주화'"라는 표현은 언젠가부터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그 결과 산재사망률이 높기로 유명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망은 정주노동자보다 약 3배가 더 많았다(☞관련 보고서). 보통 한국에 오는 이주노동자들이 정주노동자 평균보다 훨씬 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차이는 더 충격적이다. 노동자로서뿐 아니라 이주민으로서 차별적 위험에 내몰리는 구조를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언론에서도 다루어진 네팔의 반정부 시위는 언뜻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리지만,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네팔 내에서는 취업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해 일을 찾아 해외로 떠밀리는 청년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 그런 가운데 올해 2월 한국에서 고용주의 임금 체불과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던 네팔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지난 5년간 한국에서 85명의 네팔인이 사망했으며, 그중 절반이 자살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러한 소식이 네팔 청년층의 정부 불신과 분노를 키웠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의 인종차별이 그 대상 집단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에는 그 분노가 주로 네팔 정부에 향했지만, 곧 그 대상이 한국으로 향해도 이상하지 않다.

9월 초, 한국에서 네팔의 반정부 시위와 비교도 안 되게 관심을 받은 것은 조지아주 공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대거 구금되는 사태였다. 반인권적인 체포 장면과 구금 시설의 실태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는 사실은 외면당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반인권적 단속과 구금이 이뤄진 지 불과 10여 일 후에 한국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관련기사). 무리한 단속 과정에서 이주민이 다치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외국인보호소는 이전부터 '새우꺾기' 등 인권침해로 악명이 높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고, 사망 사건조차 반복되고 있다. 만약 이런 일이 한국인에게 반복된다면 사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누군가는 그저 법을 집행한 것뿐이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차별적 제도가 미등록 이주민을 양산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고용허가제와 같은 차별적 이민제도로 이주노동자는 임금체불이나 불합리한 대우, 각종 차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정해진 제도와 실질적 권력관계로 구제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가 부당한 대우에서 벗어나려면 미등록이주민이 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에 오는 과정에서 거액의 빚을 내 브로커에게 비용을 지불한 상황에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하기 어렵다.

차별적 제도는 고소득 국가의 백인 전문인력에게는 영주권 신청 자격이나 가족 동반 등 정착에 호의적인 권리를 제공하지만, 저소득 국가 출신 유색인 노동자에게는 저임금 노동을 시키다가 돌려보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극도로 제한하며,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한다. 인종으로 구분 짓고 위계를 나누고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제도는, 저소득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을 한국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는 권리를 짓밟아도 괜찮은 존재, 막 대해도 괜찮은 존재라는 시그널을 준다. 그 가운데 차별적 제도를 체화하고, 인종 간 위계를 내면화한 선주민은 이주노동자를 지게차에 매달고, 모욕하고, 협박하는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한다.

이처럼 복합적인 맥락 속에 뿌리내린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단순한 한두 가지 조치로 해결할 수는 없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멈추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중국인과 중국동포에 대한 혐오 그전에도 북풍몰이나 지역감정 등 유사 인종주의가 있었다. 혐중 다음에는 또 무엇이 올지 모른다.

따라서 인간을 노동력과 같은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 집단의 우열을 가리는 범주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공존과 포용을 말하고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적 공간에서 실제 피해를 초래하는 혐오 표현을 제약하도록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이주민을 2등 시민으로 위치시키는 제도를 개선해 이들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복지와 노동권을 강화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인종주의 확산은 고소득 국가 전반에서 나타나는 반인권적, 반민주적 극우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심화되는 불평등 속에서 이전보다 생존이 더욱 빠듯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들의 불안과 분노가 약자에 대한 혐오로 전가된다. 국가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나 복지 확충보다는 값싼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해 문제를 봉합하려 하고, 이는 이주민 차별을 강화한다. 따라서 모두가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토대 마련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직시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우리가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저지르는 것 역시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조지아주에서 한국인들이 당한 인권침해에 분노했다면, 한국에서 이주민들이 당하는 인권침해에도 똑같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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