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대학생들의 기숙사 입주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이미 입주한 학생에게도 퇴실 조치를 내릴 수 있는 규정을 시행하고 있는 대학이 45곳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20대 우울증 환자가 역대 처음으로 20만 명을 넘어서는 등 청년들의 정신건강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지만 이들은 더욱 고립되는 추세다.
대학 측은 기숙사 퇴실 조치가 공동생활 질서를 유지하고 다른 학생이 겪을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배제의 대상으로 낙인찍는다고 우려를 표한다.
'정신질환자=전염병 보균자·성폭행범'이라는 대학 기숙사 운영규정
17일 교육부가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에 제출한 '대학 기숙사 정신질환자 입주 거부 관련 국내 소재 대학 기숙사 규정 전수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전국 2·3·4년제 대학 392곳(캠퍼스 기준) 중 45곳에서 입주 제한 대상에 정신질환자 학생을 포함하거나 이미 입주한 학생에게 퇴실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조항을 기숙사 규정으로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입주 제한과 중도 퇴실 조치를 모두 기숙사 규정에 명시하고 있는 대학은 24곳, 입주 제한 규정만 둔 대학은 8곳, 중도 퇴실 규정만 둔 대학은 13곳이다. 정신질환자 학생의 기숙사 입주를 막는 대학 규정을 전수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84곳은 조사에 응하지 않아 실제 수치는 더 높을 수 있다.

수도권에서는 한양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성결대학교, 용인대학교 등 다수 사립대에서 입주 제한과 중도 퇴실 조치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제퇴사처분 대상자로 "법정 전염병 환자 및 보균자 또는 정신질환자"를 규정하고 있는 한양대는 <프레시안>에 "공동생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됐다"면서도 "다만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사건 발생 시 피해 정도에 따라 처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예대는 우울증과 조울증 등을 가진 대학생을 중심으로 퇴소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서울예대 관계자는 <프레시안>에 "(정신질환자 학생이) 기숙사에서 이상행동이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해당 학생과 상담하고 보호자에게 연락하면 보통 휴학을 선택한다"라며 "실제로 입주 시 정신질환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지만 규정상 명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방에서는 지방거점국립대학교(강원대학교, 부산대학교), 국립대학교(부산교육대학교), 사립대(경북과학대학교, 조선대학교, 중부대학교 등) 등 국립과 사립을 막론하고 정신질환자 학생들을 규제하고 있다.
강원대는 민·형사상 법률 위반 행위 또는 단체생활 부적격자를 강제퇴사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 예시로 정신질환자를 표기하고 있다. 강원대 관계자는 <프레시안>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만든 규정"이라며 "다만 지금까지 정신질환자가 피해를 끼친 사례가 없어 퇴실 조치를 내린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퇴실 대상으로 전염성 질환자와 정신질환자를 규정하고 있는 부산교육대학교 또한 <프레시안>에 "교대 특성상 학생들이 크게 장애를 가진 경우는 없다"면서도 "학생들에게 피해가는 행동이나 불미스런 일이 있을 땐 퇴실 조치를 내릴 수 있어 규정으로 두고 있다"고 했다.
부산대의 경우 '심인성 질환 등으로 본인 또는 타인에게 물리적·정신적 피해를 유발하는 행위를 시도한 자'에 대해 벌점 10점을 부과해 퇴소 조치를 내리고 있다. 반면 '절도·폭행·음주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 자'와 '화재 발생이 가능한 행위를 저지른 자'는 7~10점 사이의 벌점을 부과해 비교적 약한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했다. 즉, 정신질환자를 절도·폭행·음주·방화범보다 엄격하게 처벌하는 셈이다.
부산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음주 상태로 다른 문을 두드리거나 난동을 부리는 학생들이 있어 차등적으로 벌점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며 "심인성 질환자에 대한 퇴실 조치의 경우 제정 당시 자해 시도 등으로 다른 학생들이 충격을 심하게 입을 수 있어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신질환자 일괄 규제는 차별…배제 아닌 지원 강화해야"
정신질환을 가진 대학생들은 청년들의 정신건강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질환자의 치료를 돕기보다 배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해당 규정들이 부적절하다고 입을 모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20대 환자의 수는 20만6101명이다. 이는 전체 20대 청년(637만2432명) 중 3.2%에 차지하는 수치다.
문제는 지난해 우울증 환자가 2020년(14만6977명) 대비 40%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조울증, 불안장애, ADHD 등을 가진 20대 정신질환자의 수도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우울증과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를 가진 대학생 A(25) 씨는 <프레시안>에 "규정이 너무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타 학생이 보기에 기분이 나쁘거나 이상하다고, 수업 시 조금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기숙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 아니냐"며 "삶의 기반이 더 어려운 사람들이 같은 등록금을 지불하고 학교를 다니는데 지원은 못해주더라도 쫓아낸다는게 너무 불합리하다고 느껴진다"고 호소했다.
우울증을 가진 대학생 B(23)씨 또한 "이런 규정이 있으면 정신질환 당사자들이 룸메이트가 자신의 정신질환 여부를 신고하지 않을지 노심초사할 것"이라며 "그러면 진단 사실이나 증상을 더 숨기려고 할 것이고 이는 정신질환자 학생 개인의 건강에도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정신질환자 자체를 기숙사 거주 제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김현수 전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프레시안>에 "질환에 따른 차별은 없어야 하고 오히려 편의와 우대를 제공해야 한다"며 "정신질환은 신체질환에 준하거나 더 우대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인권감수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모든 정신질환이 타해의 우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정신질환을 전부 터부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규정들은 오히려 편견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경우에 한정한 규정으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질환이 있더라도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도움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미국의 경우 대학이 정신질환을 이유로 학생에게 일방적인 기숙사 퇴실 조치를 내리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미국장애인법(American Disability Act)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자에 대해 사회보장, 일상생활, 교육 및 관련 분야에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한다. 또한 대다수 미국 대학 기숙사 규정은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등 정신질환 자체가 아니라 자살 시도, 반복적·폭력적 행동, 약물 오남용 등 자신이나 타인의 안전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에 한해 퇴소 조치를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한다.
서미화 의원은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위험 집단으로 규정해 배제하는 것은 편견과 낙인을 강화하는 차별적 조항"이라며 "모든 학생이 안전하게 학업과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교육부 관계자는 정신질환자 기숙사 입주를 제한하는 규정에 대한 교육부 입장을 묻는 <프레시안> 질의에 "해당 규정을 시행하는 대학 등과 협의하면서 개선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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