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오요안나 어머니는 딸의 'MBC 합격날' 영상 보며 울었다

[현장] 추모문화제 엄수…같은 시간 MBC는 유족 상의 없이 기상캐스터 폐지 발표

"안녕하세요. 요안나입니다. 오늘은 제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 거냐면요."

문화방송(MBC)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 씨의 1주기인 15일. MBC본사 앞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방송을 시작하기 전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오 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앞에는 8일째 단식 중인 딸을 잃은 어미니, 장연미 씨가 눈물을 훔치며 앉아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오 씨의 성장 과정을 담은 사진이 한 장씩 떴다 사라졌다. 이어 오 씨가 MBC 기상캐스터 합격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며 찍은 '몰래카메라' 영상이 재생됐다.

장연미 : 뭐야. MBC야? 뭔데? 이게 뭐야? 최종면접?

오요안나 : 네. 그리고 제가 되었습니다. (웃음)

장연미 (웃고 박수치며) 우와. 잘 했어. 잘 했어. 잘했다. (딸을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생했어. 어유 고마워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 기뻤던 그날을 담은 영상을 보며 장 씨는 오열했다. 그 옆에는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와 고(故)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균 씨가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곁을 지키는 100여 명의 시민이 그 아픔을 함께했다.

▲ 15일 서울 마포 상암MBC본사 앞에서 열린 MBC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 1주기 추모제. 무대에 상영된 영상 속에서 딸 오요안나 씨와 장연미 씨가 MBC 기상캐스터 합격 사실에 기뻐하며 끌어안고 있다. ⓒ프레시안(최용락)

'MBC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 1주기 추모 문화제'가 이날 서울 종로 상암MBC본사 인근에 차려진 오 씨의 분향소 앞에서 엄수됐다.

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끝난 뒤 무대에 오른 장 씨는 먼저 파출소에서 온 전화를 통해 비보를 듣고 택시를 잡은 뒤 '빨리 가주세요'라고 기사에게 여러번 부탁했고, 현장에 도착해 편안히 자는 듯한 딸을 본 날이 바로 1년 전 오늘이라며 흐느꼈다.

이어 마음을 가다듬고 딸과의 시간을 추억했다. 어릴 때부터 딸과 친하게 지낸 친구 이야기, 그 친구가 장 씨에게 취직 사실을 알리며 전화해 '언니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라고 해 같이 울었다는 이야기, 딸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늘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좋은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했다는 이야기등이었다.

그랬던 딸이 '엄마 미안해'라는 말과 함께 직장내괴롭힘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1주기가 됐지만 장 씨는 MBC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했다. 딸의 죽음에 대한 MBC 자체 진상조사 보고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장 씨는 "MBC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다른 회사도 아니고 정의를 부르짖던 MBC가, 한 사람마다 소중한 우주들인데 그 우주들 함부로 버리고, 죽어도 신경 안 쓰고 돌아보지 않고 그래도 되는 건가"라고 MBC를 질타했다.

장 씨는 "요안나 때문에 살았고 요안나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 인생의 목표는 없어졌다"면서도 "그렇지만 비정규직으로 가슴앓이 하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 살아남아서 도와주고 싶고 같이 울고 싶다"고 했다.

이어 "요안나가 하늘에서 오늘 이 추모제에 오신 분들 모두의 행복을 빌어주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제2, 제3의 요안나가 나오지 않게 많이 성원해주시고, MBC를 질타해주시라. 그러면 힘을 내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15일 서울 마포 상암MBC본사 앞에서 열린 MBC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 1주기 추모제에서 고인의 어머니 장연미 씨가 발언하고 있다. ⓒ프레시안(최용락)

장 씨의 발언에 앞서서는 추모위원으로 자원한 종교계·노동시민단체 인사들과 오 씨와 비슷한 처지에서 일하는 방송 노동자들이 무대에 올라 오 씨를 추모했다. 장 씨는 딸의 이름이 나올 때면 눈물 짓고, 방송 비정규직의 처지가 언급될 때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방송사에서 작가로 일하다 부당해고된 뒤 소송에서 이겼지만, 원래 직군이 아닌 방송지원직에 배치됐다고 밝힌 김지원 씨(가명)는 "사람답지 못한 취급이란 게 따로 있겠나.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했는데 정규직, 비정규직을 따지는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가"라고 말했다. 이어 "세상을 떠난 기상캐스터의 어머니는 곡기를 끊으셨다"며 분노했다.

김 씨는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방송국의 시계는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며 "아직은 발버둥 칠 힘이 조금 남아있다는 이유로 멀리서라도 당신의 뜻과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꿈이 좌절되지 않기를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오 씨의 동료였던 김성헌 씨는 "오요안나는 MBC 기상캐스터로 살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시대를 이제 끝내야 한다"며 "부디 퇴사라는 도피조차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일을 사랑한 그녀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MBC에 호소했다.

신하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은 "저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가 사라질 때의 슬픔을 어떻게 헤아릴지 위로할지 말하기 어렵다"며 "이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우리가 나아갈 길 밝히는 등불이 되도록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 15일 서울 마포 상암MBC본사 앞에서 열린 MBC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 1주기 추모제. ⓒ프레시안(최용락)

예기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추모제 도중 MBC가 유족과 상의 없이 오 씨의 직업이었던 기상캐스터 직군을 폐지한 뒤 기상기후전문가 직군을 신설해 내년도에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지원 자격은 기상·기후·환경 전공자나 자격증 소지자, 또는 관련 업계 5년 이상의 경력자다.

이 때문에 장 씨는 추모제 도중 자리를 떠나 엔딩크레딧, 직장갑질119 등 단체 활동가들과 대책을 논의해야 했다. 애초 장 씨는 오 씨의 동료였던 기상캐스터들이 정규직이 되기를 바라왔다.

추모제 뒤 참가자들은 MBC 주변을 행진하며 "MBC는 사과하라", "재발방지대책 마련하라", "조사결과 공개하라" 등 장 씨의 요구를 구호로 외친 뒤 분향소 앞으로 돌아와 헌화했다.

대열을 이끈 박점규 직장갑질119 활동가는 행진 도중 MBC가 단식 중인 유족과 상의 없이 기습적으로 기상기후전문가 채용을 발표한 데 대해 "노동운동을 오래 했지만,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유족을 무시하는 사측은 처음 봤다"며 "오 씨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현재 일하는 기상캐스터가 공채 경쟁에서 떨어지면 자르겠다는 안이다. 어머니의 단식 때문에 오 씨의 동료들을 해고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같은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109 또는 SNS상담 마들랜(www.129.go.kr/etc/madlan)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