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니토덴코의 자회사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일하다 해고된 뒤 불에 탄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 공장 위에서 600일째 고공농성을 이어오던 박정혜 한국옵티칼지회 수석부지회장이 29일 땅을 밟았다. 한국사회가 보유한 부끄러운 세계기록 하나가 멈추는 순간이었다.
다만 박 부지회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처음 안전모를 매며 옥상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부터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지갯빛 노조 깃발을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해고 조합원들의 고용승계를 약속받지 못했다는 점 때문인 듯 했다.
박 부지회장을 맞이하기 위해 농성장 아래 모인 200여 명의 시민은 그런 그에게 "멋지다", "수고했다"고 외쳤다. 그들 중에도 눈시울이 불거진 이가 많았다.
잠시 뒤 크레인을 타고 내려와 땅을 밟은 박 부지회장은 "이제 실감이 난다. 오늘이 내려가는 날이지만 위에 있으니 실감하지 못했다"고 말문을 뗐다.
이어 "잘못은 니토덴코가 했는데, 왜 고통은 노동자가 받아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승리해서 내려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이 두 다리로 내려올 수 있게 해 준 동지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박 부지회장은 "아직 투쟁이 끝난 게 아니다. 앞으로도 정부와 국회가 저희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주기 바란다. 그래서 더 이상 고공에 오르는 동지가 없길 바라며, 우리 노동자들이 정말 행복한 세상을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발언 뒤 박 부지회장은 오랫 동안 만나지 가족, 조합원 등과 인사를 나눈 뒤 구급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녹색병원으로 향했다.


세계 최장 고공농성을 이어가던 박 부지회장이 이날 땅에 내려온 이유는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이 한국옵티칼 해고자 고용승계 문제 해결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니토덴코 자회사 한국옵티칼에서 일하다 공장 전소 뒤인 2022년 10월 정리해고된 노동자 7명은 현재 비슷한 물량을 생산하는 다른 자회사 니토옵티칼로의 고용승계를 요구 중이다. 니토옵티칼은 지난해에만 77명을 신규채용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
박 부지회장이 땅을 딛기 전 농성장 바로 아래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이 연 이날 회견에도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환경노동위원회 간사인 김주영 의원, 배진교 대통령실 경청통합수석 등이 참석했다.
김 장관은 "오늘 오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께서는 해외순방 결과를 결산하고, 내년도 정부 예산을 심의하는 중요한 자리임에도 마지막으로 옵티칼 문제를 하문했다. '노동부 장관이 가진 권한을 아끼지 말고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하셨다"며 "노사 간 교섭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도 "외투기업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지만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않고 노동자를 나 몰라라 팽개치고 있다"며 "이제 집권여당과 정부, 대통령실이 함께 나서서 먹튀기업이 노동자를 배신하고 팽개치는 문제에 대한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정치인들의 발언이 있은 뒤 그간 고공농성에 연대해 온 단체 인사와 시민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저항하며 309일 간 크레인 고공농성을 했고, 한국옵티칼 희망뚜벅이를 수 차례 조직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했지만 지연된 희망은 반드시 희망이어야 한다"며 "약속대로 민주당과 정부가 박정혜의 투쟁을 이어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세종호텔 고공농성도 속히 해결해 일터로 돌아가게 해달라"며 "박정혜 동지 건강 잘 회복하시길 빌고 또 빈다. 그리고 옵티칼 동지들, 말벌 동지들은 더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진짜 승리하는 날 박정혜 동지의 페스티벌 춤을 꼭 보자"고 말했다.
양한웅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은 "정말 미안하다. 종교라는 게 한국에서 이름은 거대한데 노동자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 것 같다"며 "정말 정말 죄송하다. 우리가 힘이 모자라고 기도가 모자란 것 같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옵티칼 고공농성에 연대해 온 시민 김민지 씨는 "지난 4월에도 집회에서 말할 기회를 얻어 '제가 500일이 되기 전에 다 내릴 거다'라고 말했는데 이제 600일"이라며 박 부지회장이 "왜 600일을 보내야 했는지 기억해달라. 잊히지 않게 해달라"고 정치인 등에게 말했다.

한편 이날 땅에서 박 부지회장을 맞은 70여 명은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6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이 198일째 고공농성 중인 서울 종로 세종호텔 앞 도로구조물 앞에서 출발한 희망버스 두 대를 타고 왔다.
이들을 배웅하며 고 지부장은 "오늘 더 드릴 말이 없다. 내려가시면 제 몫까지 꼭 안아주고 오시라"며 "저도 빨리 내려주시라"고 너스레를 건넸다. 시민들은 "옵티칼 고용승계 보장하라",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하라" 등 구호로 화답한 뒤 희망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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