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년 영국 노퍽에서 태어난 토마스 페인(1737-1809)만큼 인생의 극적 반전을 보여준 인물도 드물다. 퀘이커 교도인 아버지와 영국 국교도(성공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태생부터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관 사이에서 살아야 했다. 코르셋을 만들던 평범한 장인이 어떻게 두 대륙을 뒤흔든 혁명가가 되었을까?
퀘이커 교도들은 당시 영국에서 차별받는 종교집단이었지만, 모든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배경이 페인의 급진적 민주주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페인의 초기 인생은 그야말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코르셋 만들기에 실패하고,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하고, 장사도 망하고, 심지어 결혼도 두 번이나 실패했다. 하지만 퀘이커 교도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는 평등사상과 정의감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역사는 종종 이런 '루저'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다. 1774년, 37세의 나이로 미국 대륙에 발을 디딘 페인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게 된다.
상식이라는 이름의 폭탄
1776년 1월, 페인은 《상식》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했다. 겨우 47페이지짜리 얇은 책자였지만, 그 파급력은 핵폭탄급이었다. 당시 미국 식민지 주민 250만 명 중 12만 부가 팔렸으니, 인구 비례로 따지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240만 부가 팔린 셈이다. 현재의 베스트셀러도 이 정도 판매고는 꿈도 못 꾼다.
《상식》의 핵심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왜 바다 건너 작은 섬나라인 영국이 거대한 미국 대륙을 지배해야 하는가?" 페인은 왕정제도를 "이교도들이 만든 발명품"이라고 일갈하며, 조지 3세(재위 1760-1820)를 "왕실의 짐승"이라고 불렀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을 향해 "청와대의 개"라고 부른 격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불경한 표현이었지만, 바로 그 직설적인 화법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펜으로 승부한 독립전쟁
페인의 진가는 미국의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더욱 빛났다. 1776년 12월, 미국 독립군이 연전연패하며 사기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는 《위기》 연작을 발표했다. 그 유명한 첫 문장, "이것은 인간 영혼을 시험하는 시대다"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명문으로 남아있다.
조지 워싱턴(1732-1799)은 이 글을 부하들에게 읽어주며 사기를 진작시켰고, 실제로 미국 독립군은 트렌턴 전투에서 영국군에 대항해 대승을 거두었다. 한마디로 페인은 '키보드 워리어'의 원조격이면서, 동시에 그 키보드 질이 실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낸 셈이다.
대서양을 건넌 혁명의 불씨
미국 독립이 성공하자 페인은 1787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혁명적 사상은 이미 대서양을 건너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지자, 페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의 권리》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페인은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1729-1797)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왕과 귀족들은 자연이 아닌 인위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이미 20만부가 팔린 뒤였다. 당시 영국 인구를 고려하면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단두대 앞에서도 펜을 든 남자
프랑스 혁명에 매료된 페인은 1792년 프랑스로 건너가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의 광기는 그마저 집어삼켰다. 루이 16세(재위 1774-1792, 처형 1793)의 처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고, 로베스 피에르(1758-1794)의 공포정치 시대에는 단두대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까지 갔다.
그런데도 페인은 감옥에서 《이성의 시대》를 집필했다.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 책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성경은 인간이 만든 책일 뿐"이라는 주장은 오늘날의 진보 신학자들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주제를 18세기에 정면 돌파한 것이다.
두 조국에서 받은 엇갈린 대접
미국으로 돌아온 페인을 기다린 것은 냉대였다. 《이성의 시대》 때문에 무신론자로 낙인찍힌 그는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독립영웅이었던 그를 이제는 "더러운 작은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외면했다. 토마스 제퍼슨(1743-1826) 같은 소수 지식인들만이 그와 교분을 유지했을 뿐이다.
영국에서의 평가는 더욱 가혹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페인은 영국 땅을 밟을 수조차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왕정제도는 여전히 견고했고, 오히려 페인의 급진적 사상은 "위험한 사상"으로 치부되었다.
시대를 앞선 선각자의 비극
페인의 불운은 그가 너무 앞선 시대를 살았다는 데 있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 인권, 사회보장제도 같은 개념들을 그는 이미 18세기에 주장했다. 《농업정의》에서 제시한 기본소득 개념은 21세기에 와서야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가 주장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는 이제 헌법의 기본원리가 되었고, "정부는 국민의 동의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동시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증명
페인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인물이다. 그의 글은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프랑스 혁명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후세에 민주주의와 인권사상의 초석을 놓았다.
코르셋 장수에서 시작해 세계사를 바꾼 혁명가가 된 토마스 페인.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준다. 때로는 시대를 앞선 외로운 목소리가 역사를 바꾸는 진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죽은 이 '세계 시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과연 당신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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