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외면한 성소수자 건강 연구

[서리풀연구通] 美 국립보건원 건강 연구 예산 중 0.8%만 성소수자에…한국은?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은 전 세계 보건의료 분야에서 가장 큰 연구비 지원기관이다. 의학 및 공중보건 분야의 기본적인 지식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전체 인구집단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수명을 연장하며 질병과 장애를 줄인다는 사명을 가지고 설립된 국립보건원은 2022년 한 해에만 480억 달러(약 67조 2000억 원)를 연구에 투자했다. 이 중 82%는 외부 연구기관 지원에 사용되어 미국 전역 2500개 이상의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30만 명 이상의 연구자들이 약 5만 건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국립보건원은 성소수자의 건강 증진을 위한 연구 인프라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2011년에는 성소수자가 겪는 건강 격차를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연구와 국가적 차원의 연구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5년에는 국립보건원 내에 성소수자 연구소를 설립했고, 2016년에는 성소수자를 건강 격차가 있는 인구집단으로 공식 지정했다. 이를 기반으로 2019년에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성소수자 건강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비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번에 소개할 연구는 미국 국립보건원이 성소수자 건강 연구를 실제로 얼마나 지원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연구 바로가기: 국립보건원에서 지원하는 성소수자 인구에 관한 연구). 연구진은 국립보건원의 연구정보공개시스템(RePORTER)을 활용해 2012년 1월 1일부터 2022년 12월 31일까지 국립보건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연구 프로젝트의 초록을 수집했다. 성소수자 관련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총 1653편의 초록을 찾았고, 이 중 1093편이 성소수자 건강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로 확인되었다. 초록 내용을 분석하여 성소수자 건강 연구의 연도별 변화, 연구 분야, 하위집단별 특성을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여러 층위에서 성소수자 건강 연구가 국가 연구비 지원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성소수자 건강 연구에 대한 국립보건원의 연구비 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2012-2022년 사이 국립보건원이 지원한 연구 프로젝트는 총 14만 2280건으로 601억 달러(약 84조 1400억 원)가 투자되었다. 이 중 성소수자 건강 연구는 1093건(4억 9170만 달러, 약 6883억 8000만 원)으로 전체의 0.8%에 불과했다. 2012년 61건(0.6%, 2360만 달러)에서 2022년 172건(1.1%, 8320만 달러)으로 증가하긴 했지만, 미국 내 성소수자 인구 비율이 7.6%인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크게 부족한 수준이다.

둘째, 건강 분야별로는 HIV/AIDS 연구에 대한 편중이 두드러졌다. HIV/AIDS(716건, 65.5%, 3억 3980만 달러)에 대한 성소수자 건강 연구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정신건강(322건, 29.5%, 1억 3430만 달러), 약물 사용(218건, 19.9%, 1억 560만 달러), 성적 건강(186건, 17.0%, 8390만 달러), 음주(132건, 12.1%, 4710만 달러) 순이었다. HIV/AIDS 연구에 대한 편중으로 인해 암, 고혈압 등 만성질환이나 폭력 등 기타 건강 문제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셋째, 성소수자 내 정체성별 하위집단 간 불평등이 존재했다. 전체 1093건 중 741건(67.8%, 3억 5790만 달러)이 게이, 바이섹슈얼 등 남성 성적소수자(sexual minority) 중심 연구였다. 반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등 여성 성적소수자와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어 이중 소외 현상을 보였다.

넷째,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대한 고려가 매우 부족했다. 성소수자는 하나의 동질한 집단이 아니라 인종/민족, 성별, 나이, 계급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 이질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전체 연구 중 인종/민족 정체성을 고려한 연구는 461건(42.2%, 2억 2890만 달러)에 그쳤다. 인종/민족별로는 흑인(223건, 20.4%, 1억 790만 달러), 히스패닉/라틴계(108건, 9.9%, 6080만 달러) 연구가 가장 많았으며, 상대적으로 아시아인(14건, 1.3%, 540만 달러)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었다. 연령대별로는 18세 미만 청소년 대상 연구가 207건(18.9%, 1억 1050만 달러), 50세 이상 고령 성소수자 연구는 36건(3.3%, 1750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번 연구가 밝혀낸 연구비 지원 현황을 보면, 성소수자 건강이 여전히 미국 국립보건원의 연구 포트폴리오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최대 보건의료 연구 지원기관인 미국 국립보건원조차 성소수자 건강 연구에 전체 예산의 0.8%만 투입한다는 점은 성소수자 인구집단이 사회적으로 보다 가시화되고 이들의 건강 증진 수요가 증가하는 현실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 수치는 성소수자 건강을 둘러싼 구조적 소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한 사례이며, 이러한 구조적 소외로 인해 성소수자의 건강 격차는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다. 물론 현 미국 정부 하에서는 성소수자 건강 연구에 대한 0.8% 지원마저 크게 축소된 상황이다. 올해 초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립보건원의 성소수자 건강 연구 지원이 대부분 중단되었다.

사실 미국 상황을 논하기에는 한국의 성소수자 건강 연구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너무 부족해 거리감이 드는 게 현실이다. 한국의 보건복지부나 질병관리청은 성소수자를 건강 격차를 가지고 있는 인구집단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성소수자 건강 연구가 국가 차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연구비 지원 부재는 성소수자 건강 연구 부족으로 직접 이어지고, 이는 성소수자 건강 증진을 위한 보건의료 정책 수립에 필요한 근거 부족으로 연결된다. 이로 인해 국가 보건의료 예산에서 성소수자 인구집단은 고려되지 않고, 이는 다시 성소수자 건강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소외의 재생산 구조를 벗어나려면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에서 공식적으로 성소수자를 건강 격차를 지닌 인구집단으로 인식하고, 국가연구개발사업에서 성소수자 건강 연구 우선순위를 명시하며, 국가 차원의 성소수자 건강 연구소를 설립해 관련 연구를 촉진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성소수자 건강 연구 지원 → 활발한 연구 수행 → 근거 기반 성소수자 건강 증진 정책 수립 → 성소수자 건강 격차 감소 및 건강 증진'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이후 10여 년만에 동일한 조사가 전체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다시 진행되고 있다. 국가 지원을 받은 연구 중 청소년을 포함한 첫 성소수자 연구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이번 연구를 통해 성소수자 건강 증진을 위한 정책적 근거가 충분히 마련되고, 이를 토대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건강 증진 정책이 수립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서지 정보

Weideman, B. C., Ecklund, A. M., Alley, R., Rosser, B. S., & Rider, G. N. (2025). Research Funded by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Concerning Sexual and Gender Minoritized Populations: A Tracking Update for 2012 to 2022.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15(3), 374-386.

▲14일 서울 종로구 종각역에서 제26회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을지로 입구까지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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