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 오랜 침묵을 깨고 한국과 미국을 향해 담화를 내놓았다.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연이은 담화를 통해서다. 조선이 이 시점에 한국과 미국을 향해 입장을 내놓은 것은 올해에 8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국가발전 5개년 계획을 마무리하고 내년 초로 예상되는 9차 당대회의 기조를 검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2021년 1월에 열린 8차 당대회에서 한국을 향해서는 "근본 문제", 즉 한국의 대규모 군비증강과 연합훈련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 개선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또 미국을 향해서는 핵무력 강화를 통해 "대미 장기전"에 나설 뜻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런데 9차 당대회를 앞두고 미국과 한국에서 연이어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미국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세 차례나 만났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4년 만에 백악관으로 돌아왔고,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되고 조기 대선을 거쳐 이재명 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대외 환경의 변화는 조선으로 하여금 '반미'와 '적대적 두 국가론'에 기초한 기존 노선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내부적 검토의 사유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28일 김여정이 내놓은 '조·한 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담화에서는 기존 입장의 재확인에 방점이 찍혔다. "우리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는 공식입장을 다시금 명백히 밝힌다"고 했다. 동시에 이전 담화에 비해 비난이나 조롱의 강도는 크게 줄어들었다.
조선은 이번 담화를 통해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조선이 한국을 국가로 간주하는 것처럼 한국도 조선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한미, 한미일 연합훈련이 계속되는 한,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적대시 정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입장이다.
하나둘씩 신뢰회복 조치를 취하면서 남북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고 있는 이재명 정부와 근본 문제에 있어서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김정은 정권의 입장 차이가 어떻게 조율될 수 있을지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김여정이 미국을 향해 내놓은 담화에는 더 분명한 입장이 담겨 있다. 담화에선 "현 국가적 지위를 수호함에 있어서 그 어떤 선택안에도 열려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현 국가적 지위"란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의미한다.
이는 미국이 비핵화 요구를 내려놓고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 조선도 정상회담을 포함한 북미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담화에서 핵 보유국간의 관계 개선의 필요성과 김정은-트럼프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북미간의 입장 차이는 명확한 듯하면서도 미묘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줄곧 북미정상회담 추진 뜻을 밝히면서도 그 목표가 "완전한 비핵화"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있다. 정작 트럼프 본인은 이렇게 언급하지 않고 "핵보유국과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취지의 발언만 해왔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트럼프를 '제외'한 트럼프 행정부와 조선 사이에는 확연한 입장 차이가, 트럼프 '개인'과 조선 사이에는 미묘한 접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측 불가능성'을 협상 지렛대로 삼아온 트럼프가 조선의 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할 것인지, 정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가 북미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정세의 최대 변수가 될 것이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최근 신간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를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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