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에서부터 강선우까지…갑질의 사회학

[오찬호의 틈새] '그럴 수 있지'가 '그럴 순 없지'로, 그게 민주주의다

김무성의 노룩패스는 완벽했다. 캐리어를 한 번의 손목 스냅으로 자신의 대각선 방향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보낼 수 있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2017년 5월 23일, 공항 출입구를 나오는 김무성은 그 어려운 기술을 시전하며 연두색 색깔의 캐리어를 보좌관에게 안전하게 전달했다. 덕분에 보좌관은 몇 걸음 덜 걸었고, 거물 정치인을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기자들은 최소 몇 초는 시간을 벌었다.

이 일은 갑질의 표본처럼 언론을 도배했다.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지만 해프닝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면서 곧 각종 폭로가 이어질 것처럼 떠들었지만,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 정치적 반감을 지닌 이들은 이 작은 에피소드를 확대해 원래부터 권위적인 인간이라는 말을 연결했지만, 오히려 같이 일해보고 싶은 상사라는 반론까지 여의도에 떠돌았다.

하지만 그 정치인과 그 보좌관의 사이가 평소에 어떠했는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으로 보였을 거다. 살면서 경험하는 하대(下待)야 비일비재한 게 인생이지만, 유독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웠던 순간이 어찌 없었겠는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그때 그 상사가 순간적으로 겹쳐졌다면, 캐리어가 굴러가던 1초는 누구에게 슬로비디오로 다가왔을 거다. 전화기를 건네던, 메모지를 던지던, 먹다 남은 음식을 치우라면서 내밀던 뭐 등등이 악몽처럼 떠오르면서 말이다. 이걸, 캐리어를 민 정치인이 사과할 일은 아니겠지만 갑질로 오해한 대중을 지나치게 예민하다면서 탓해서도 안 된다. 우린, 그럴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했기에 예민할 수 있는 거다. 거칠게 말해, 문명은 "그럴 수 있지"가 "그럴 순 없지"로 변해가는 역사일 거다. 수많은 폭력이 그럴 수 있다면서 은폐되지 않았던가. 가정 폭력은 남편이라면 그럴 수 있는 거였다. 심지어 배우자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강제로 해도 무탈했다.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부모니까 그럴 수 있는 거고, 교사니까 괜찮은 거고, 친구끼리 장난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사회생활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았다. 직장 상사니까 해도 되는 성희롱 수준의 신체 접촉과 음담패설에 가까운 농담은 어떠했는가. 이게 이제야 그럴 순 없는 것들이 되었다. 한순간에 된 게 아니다. 많은 이들이 싸우고 연대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이끌어낸 결과다. 우리는 이걸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시대정신을 긍정적으로 읽었다면, 캐리어를 던지지 않았겠지.

변화가 지체되는 틈에, 갑질이 'gapjil'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권력 남용(power abuse)이나 괴롭힘(bullying)이라는 표현으로는, 한국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gapjil'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소개된 단어로는 'Hwa-byung'(화병), 'jaebeol'(재벌), 'yangban'(양반)이 있다. 기존의 영어 단어로는 의미 전달이 무척이나 빈약했다는 것이다. 재벌과 갑질이 겹쳐진 땅콩회항 사건은 그래서 대단히 한국적이다. 외국에서도 직원 못살게 구는 권력자야 많다. 하지만 그 정도로의 놀라운 일이 실제로 벌어지진 않는다.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14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가 오전 질의를 마치고 정회되자 청문회장을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본인이 괜찮다면, 괜찮을까?

사실, 갑질이란 게 을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대수롭지 않음이 민주적으로 합의된 경우는 거의 없다. 경쟁자 숙청을 밥 먹듯 하는 포악한 독재자가 변기 물 새는 것을 처리하라고 하면 어떤 을이 감히 '아무리 독재자라도 이건 아니지'라고 상상하겠는가. 무서워서 그렇게 못한다. 과거의 모습이긴 하지만, 독재자스러운 조직의 수장은 지금에도 있다. "다시는 이 바닥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라는 겁박은 현대사회에서도 곧잘 들린다.

교수가 강사에게, 의사가 전공의에게, 연출가가 배우에게, 헤어디자이너가 수습생에게, 정치인이 비서에게 그리고 국회의원이 보좌관에게 그랬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세상에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100%가 알려지겠는가. 대부분의 을들은 이게 내가 할 일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다. 대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어서다.

갑이 포악스럽지 않아도 갑질은 존재한다. 갑이 자신에게 충성한 을에게 물질이든, 명예든 어떻게든 보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을은 알아서 갑의 주변을 과도하게 살핀다. 현명한 갑이라면 이를 눈치채고 막아야 하겠지만, 거기 길들여지면서 세상이 너무 편한 걸 알았기에 말릴 타이밍을 놓친다. 교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사는, 하라는 대로 해야지만 전문의가 될 거라고 믿는 전공의는, 주연배우가 될지 모른다는 배우는, 그리고 혹시나 국회의원 공천 받을 기대를 하는 보좌진들은 그렇게 별의별 짓을 다 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설명이다. 누구도 '잘 될 걸 기대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잘못될 게 두려워서' 움직인다. 그래서 변기 고치러 달려간다.

이게 오랫동안 본인이 괜찮다고 여기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었다. 이 관념은 실패했다. 왜? 변기만 고치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 일의 범위는 무한대로 늘어난다. 식사하고 나오는 갑의 칫솔, 치약을 을이 챙겨놓는 수준이 아니다. 평소 좋아하는 고추장을 따로 챙기는 정도가 아니다. 5분 대기조로 살아야 한다. 5분이면 이미 늦는다는 자세로, 부르면 부리나케 뛰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의 비서 업무 매뉴얼 중에는 목욕할 때도 휴대폰을 소지해야 하고 갑의 기분을 거스르는 일체의 행동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을 정도다.

이게 기본값이 되면 지켜야 할 선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처음엔 변기를 고치고 다음엔 분리수거를 하고 다음엔 음식물도 치운다. 그러다 보면 갑은 을에게 그래도 된다고 여긴다. 변기 물 새는 걸 고쳐준 걸 고마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안 시킬 생각을 해야 하는데, 보통은 더한 일을 명령한다. 하나를 시키면 열을 알아들어야 한다면서 구박한다 그러다가 을도 사람이란 사실을 망각한다. 결국 사달이 난다. 조현아, 이윤택, 안희정이 스쳐 지나가지만 자세하게는 말하진 않겠다. 공통점은, 그럴 순 없다는 걸 갑이 먼저 알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는 거다.

그럴 순 없는 일이 그럴 수 있는 일이 되는 경우는 권력이 개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산재사고 대부분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해도 되는 분위기를 넘어서지 못해서 발생한다. 하청업체는 안전을 따지지 않아야지만 원청에 인정을 받는다. 비정규직은 위험해도 몸부터 일단 움직인다. 그래야만, 정규직 관리자로부터 성실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평가 없이 밥줄 연장은 불가능하다. 그러다가 기계에 끼여서, 장비에 깔려서 끔찍하게 죽는다.

남의 집 변기를 수리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건 변기 수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남의 집 쓰레기를 치우는 걸 추억으로 여길 강심장은 세상에 없다. 이게 본질이다. 의원님이 다른 을들에게 따뜻했다는 증언은 전혀 중요치 않다. 을은 괜찮을지 몰라도, 병과 정이 그 일을 했다. 이때, 을은 갑을 대변해야 할까? 아니면 병을 보호해야 할까? 그 선택에 따라, '그럴 수 있는' 일이 '그럴 순 없는' 일이 되기도, 또 반대의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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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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